‘핑크 리본’ 전파하며 아시아 최고 학술대회 ‘봉긋’

[Voice of Academy 7- 학회열전] 한국유방암학회

유방암 인식제고를 위해 세계보건기구는 매년 10월 19일을 세계 유방암의 날로 지정했다. 사진은  지난 10월 서울 용산공원에서 열린 2023 핑크 페스티벌. 핑크 페스티벌은 한국유방암학회·대한암협회·한국유방건강재단이 공동으로 주최한다. [사진=한국유방건강재단]
30여년 전인 1992년 12월 외과 의사 9명이 뜻을 합쳤다. 당시 유방암은 덩치도, 젖가슴도 큰 서양인의 암으로 여겨졌고 외과 칼잡이들은 ‘낭만닥터 김사부’처럼 위, 간, 대장, 유방 가릴 것 없이 수술하는 게 당연시되던 때였다.

그때 젖가슴을 주로 수술하는 의사가 나오기 시작했고 오로지 유방만 수술하는 의사도 등장했다. 권굉보(영남대), 배정원(고려대), 백남선(원자력병원), 양정현(국립의료원), 이민혁(순천향대), 이희대(연세대), 장일성(충남대), 정상설(가톨릭대), 정파종 교수(한양대·가나다 순) 등은 유방암을 함께 공부하자고 합의했다.

1992년 9명 의기투합… 학회 출범 씨앗

이들은 서울대 의대의 ‘카리스마 칼잡이’ 최국진 교수를 찾아가 유방암을 연구하자고 제안했고, 최 교수는 흔쾌히 응했다. 최 교수의 수제자 노동영 교수도 당연히 이 모임에 끼었다. 곧 권 교수의 제자 이수정 교수가 합류했고, 구범환(고려대), 이광만(원광대), 조세헌(동아대), 김이수 교수(한림대)와 이성공 박사(제일병원) 등이 뒤따랐다.

이들이 두 달에 한 번씩 서울의 각 병원을 돌며 학술모임을 가질 때만 해도 30년 뒤 우리나라에서 유방암 환자가 5배 이상 늘어날 줄도, 이 모임이 아시아 최상급 외과 학회로 발전할 줄은 누구도 몰랐다.

모임은 1996년 1월 ‘한국유방암연구회’로 닻을 올렸고, 이듬해 6월 서울대 의대 강당에서 미국 존스홉킨스대의 윌리엄 둘리, 일본 게이요대의 코흐지 에노모토 교수 등을 초청해 첫 학회를 열었다. 10월에는 영남대에서 추계학술대회를 개최했다. 연구회는 1999년 6월 학회로 승격했고 교과서 《유방학》 1판도 발간했다.

유방암학회는 2001년 아시아유방암학회를 유치했고, 2007년부터 국제유방암학회(GBCC·Global Breast Cancer Conference)를 개최하고 있다.

특히 GBCC는 2007년 노동영 서울대 교수(현 강남차병원장)와 양정현 성균관대 교수(현 상주적십자병원장)가 존스홉킨스대 간호대 전희순 교수 등과 함께 미국암협회(ACS)를 후원하는 수잔코만재단에 제안해 성사된 학술대회로 26개 국 1000여명이 참석했다. 존스홉킨스 보건대의 조주희 연구원(현 삼성서울병원 암교육센터장)이 환자 화장, 암투병 요리 등의 환자 세션을 마련했고 국내에 핑크리본 점등행사, 핑크리본 마라톤 등을 선보이는 계기가 됐다. 학술대회는 처음에는 격년으로 열리다 지금은 매년 개최되고 있으며 지난 4월 대회에선 39개국에서 2500여명이 참석, 아시아 외과 학술대회 가운데 최고로 우뚝 섰다.

“초기에는 해외 연자를 초청하면 답이 없는 경우가 많아 노동영 교수님을 비롯한 회원들이 권위자를 초청하기 위해 진땀을 빼고 식은땀을 흘렸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해외 학자들이 초청을 영광스럽게 생각하는 학회로 자리잡았습니다.” -한원식 유방암학회 이사장(서울대)

임상연구 지원 가물에 콩나듯…

학회는 해외 학회에도 적극 진출했다. 올해만 해도 7월 미국임상종양학회(ASCO)에서 노우철 건국대 교수와 박연희 성균관대 교수가 주요 발제자로 발표했고 임석아 서울대 교수와 김성배 울산대 서울아산병원 교수는 패널로 참석했다. 12월 유방암 관련 미국 최대 학회인 샌안토니오유방암학회에선 김희정 울산대 교수가 아시아 학자 중 최초로 발표자들의 의미를 정리하고 해설하는 ‘토론주관자(Discussant)’로 활약했다.

학회는 2005년 영문 국제학술지 《Journal of Breast Cancer》를 발간하기 시작했으며 2008년 과학인용색인(SCIe)에 등재됐다.

유방암학회는 유방초음파 및 맘모톰 워크숍, 항암요법 심포지엄, 유방암학회 인정의 자격시험 등을 통해 국내 유방암 수술 의사들의 실력을 상향 평준화함으로써 유방암 환자의 생존율을 높이는데 크게 기여했다.

이 학회는 일반인에게 ‘핑크 리본’을 주관하는 학회로 잘 알려져 있다. 노동영 교수가 설립한 유방건강재단과 학회가 함께 매년 10월 ‘유방암 예방의 달’에 전개하는 행사로 대국민 강좌, 사랑의 마라톤, 핑크 리본 점등식 등을 통해 유방암에 대한 인식 확대와 예방의 중요성을 알리고 있다.

“유방암은 서구암이어서 진료와 연구에서 우리는 후발 주자입니다. 수술과 항암치료에서는 서구에 결코 뒤지지 않을 정도로 상향 평준화됐습니다. 연구는 계속 격차를 줄이고 있지만 환경이 녹록하지는 않습니다.” – 한 이사장

한 이사장에 따르면 기초 연구에선 과제가 그나마 적게라도 있지만, 임상연구 지원은 턱없이 부족한 것이 현실. 전국 병원에서 유방암 환자가 호르몬 치료를 받으면서 난소 억제 주사를 맞으면 적게 재발하고 오래 산다는 것을 입증한 암정복사업 임상연구는 세계 학계의 주목을 받았고, 초음파 소견에서 림프절로 전이가 안 됐으면 절제 수술을 안해도 되는지를 검증하는 보건의료연구원 지원 연구는 환자에게 큰 도움을 줄 것으로 기대되지만 이런 유형의 연구지원이 서구에 비해 가물에 콩나듯이 희귀하다는 것.

한 이사장은 “임상시험과 중개연구 분야에서 학회 차원에서 더욱 투자하고 정부 지원과 후원을 이끌어내 궁극적으로 환자에게 도움이 되도록 진료지침을 개선하는데 전력을 다하겠다”면서 “사회와 보건당국도 급증하는 유방암의 피해를 줄일 수 있도록 이 부분 연구에 관심을 기울여주길 바란다”고 말했다.

    이성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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