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흑사병이 바꾼 유전자, 자가면역질환 초래” (연구)

박테리아 제거 능력 강화로 체내 우호적 박테리아까지 공격하게 돼

흑사병의 유행으로 유럽 인구의 절반, 세계적으론 최대 2억 명의 목숨을 앗아간 것으로 추정된다. [사진=게티이미지뱅크]
700년 전 지구촌을 강타했던 팬데믹(세계적 유행병)에 적응하기 위한 유럽인의 유전자변화로 크론병 같은 자가면역질환이 생겨나게 됐다는 연구가 나왔다. 1300년대 중반 유라시아와 북아프리카에서 치사율 60%로 악명을 떨친 흑사병이 그 장본인이다. 《네이처》에 발표된 캐나다와 미국, 프랑스 연구진의 논문을 토대로 영국 BBC와 미국 NYT가 20일(현지시간) 보도한 내용이다.

희생자들의 몸에 검은 반점이 나타난다고 흑사병으로 불린 이 병은 설치류를 먹고 사는 벼룩에 의해 옮겨지는 박테리아인 예르시니아 페스티스(Y 페스티스)로 인해 발병했다. 당시 흑사병의 유행으로 유럽 인구의 절반, 세계적으론 최대 2억 명의 목숨을 앗아간 것으로 추정된다.

캐나다 맥마스터대와 미국 시카고대, 프랑스 파스퇴르연구소의 연구진은 이처럼 거대한 사건이 인간 진화에 큰 변화를 몰고 왔을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1348~1349년 흑사병으로 사망한 사람들이 대량으로 매장된 영국 런던 이스트 스미스필드 공동묘지를 비롯한 3개의 무덤에서 발굴한 318구의 유해의 치아와 뼈에 담긴 DNA를 분석했다. 1000년~1500년까지 살았던 사람들의 유해로 그 중에서 흑사병 희생자의 유해는 42구였다.

연구진은 이들 유해의 DNA를 추출한 뒤 염기서열을 분석해 면역 반응과 관련된 유전자 356개 중 흑사병 이후 245개의 유전자가 변이를 일으켰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특히 그 중에서 35개의 유전자가 빠른 속도로 퍼져 나갔다는 점에서 흑사병에서 살아남기 위한 자연선택의 결과일 가능성이 높아 보였다.

연구진은 다시 850년~1800년 사이에 살았던 덴마크인 198명의 유해의 DNA를 분석했다. 그 결과 이들 면역 유전자의 돌연변이가 흑사병 이후 덴마크에서도 빠르게 퍼져 나갔음을 발견했다. 영국과 덴마크 표본의 돌연변이를 비교한 결과 특히 급속도로 퍼져서 흑사병에 대한 보호를 제공했을 것으로 추정되는 4개의 돌연변이를 추려냈다.

그중 하나가 ERAP2 유전자의 돌연변이다. 이 유전자는 침입한 바이러스나 박테리아를 잘라내고 그 파편을 면역 체계에 보여 적을 더 효과적으로 인식하고 중화하는 단백질을 만드는 역할을 한다. 흑사병 이후 발생한 이 유전자의 2가지 유형 돌연변이는 면역세포가 Y 페스티스 같은 박테리아를 더 잘 제거하도록 해준다.

이 2가지 유형을 지닌 사람은 흑사병에서 살아남을 가능성이 40%나 더 높아진다. 연구진의 한 명인 시카고대의 루이스 바레이로 교수(진화유전학)는 “그것은 매우 크고 엄청난 효과”라면서 “인간에게서 발견된 가장 큰 진화적 이점으로 추정된다”라고 말했다.

ERAP2 유전자의 2가지 버전의 돌연변이를 부모로부터 물려받게 되면 흑사병을 이겨내고 다시 아이를 낳아 그 유용한 돌연변이를 물려줌에 따라 이 유전자는 빠르게 확산됐다. 연구진의 한 명인 캐나다 맥마스터대의 헨드릭 포이나르 교수(진화유전학)는 “2~3세대에 걸쳐 10%의 변화를 보는 것은 큰일이며, 지금까지 인간에서 가장 강력한 자연선택 사건일 것”이라고 말했다.

연구진은 그 효과를 관찰하기 위해 실험실에서 Y 페스티스 박테리아와 2가지 버전의 ERAP2 유전자를 가진 사람의 면역세포를 혼합했다. 해당 버전의 유전자를 지닌 면역세포는 놀라울 정도로 박테리아를 제거한 반면 그렇지 않은 면역세포는 제 역할을 하지 못했다.

오늘날 인류는 이 돌연변이를 지닌 유전자를 갖는 경우가 흑사병 이전시대 보다 더 흔하다. 그래서 페스트에 대한 내성이 강화됐다. 그 대신 이들 버전의 ERAP2는 우리 몸의 내장에 있는 우호적인 박테리아도 공격해 해로운 염증을 일으키는 크론병의 위험을 증가시킨다. 바레이로 교수는 ERAP2가 제 역할을 너무 잘하게 되면 적뿐 아니라 친구에게도 위협이 된다고 지적했다.

우리의 DNA에 새겨진 역사적 유산은 다른 경우에서도 확인된다. 우리의 DNA의 1~4%는 네안데르탈인의 유전자를 물려받은 것인데 코로나19와 같은 질병에 대응하는 우리의 능력에 영향을 미친다. 바레이로 교수는 ERAP2 돌연변이로 인해 생존율을 40%나 높인 것은 인체면역결핍바이러스(HIV)에 대한 내성을 갖게 한 돌연변이나 우유소화를 돕게 만든 돌연변이의 이점을 뛰어넘는 최고의 자연선택일 가능성일 수 있다고 밝혔다.

그러나 코로나19 대유행은 유사한 유산을 남기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고 BBC는 전했다. 진화는 유전자를 번식시키고 물려주는 능력에 의해 결정되는데 코로나19에 주로 희생된 사람은 이미 아이를 낳는 시점을 넘긴 노인들이라는 점에서 연령에 상관없이 희생자를 낳는 흑사병과 다를 수 있다는 설명이다.

연구진은 흑사병 때 진화한 다른 유전자들도 계속 연구하고 있는데 모두 면역과 관련된 유전자들이라고 NYT는 전했다. 바레이로 교수는 “그들 유전자가 그렇게 강한 자연선택을 받았다는 것은 질병과 싸움에서 그만큼 중요한 역할을 한다는 것이고 이는 비단 페스트에만 적용되는 것은 아닐 것”이라고 밝혔다.

해당 논문은 다음 링크(https://www.nature.com/articles/s41586-022-05349-x)에서 확인할 수 있다.

    한건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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