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연휴 응급실에서 ‘영웅 윤한덕’을 떠올리며

[Dr 곽경훈의 세상보기]

옛 중앙응급의료센터 홈페이지의 고 윤한덕 센터장

‘해가 지지 않는 대영제국’을 구현한 빅토리아 여왕은 어렸을 때 왕위계승을 기대하기 힘든 ‘끄트머리 왕족’이었다. 그래도 대영제국을 다스리는 하노버 왕가의 일원이어서 운이 좋으면 결혼을 통해 조그마한 왕국의 왕비를 기대할 수 있는 정도였다. 그러나 조지 3세와 조지 4세의 후손 대부분이 이런 저런 이유로 사망하면서 왕위계승 순위가 상승했고, 1837년 1월 20일 윌리엄 4세가 사망하자 스무 살에도 이르지 못한 어린 나이에 왕위에 올랐다.

즉위 초만 해도 여왕이 60년을 훌쩍 넘게 통치하며 ‘브리튼 연합왕국의 국왕’이자 ‘무굴제국의 황제’로 ‘대영제국의 황금기’를 상징하는 존재가 되리라 예상하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1901년까지 이어지는 여왕의 치세 동안 영국은 강력한 군사력과 막대한 부를 자랑했을 뿐만 아니라 사상과 문화도 크게 발전했다. 가난을 딛고 작가로 성공한 찰스 디킨스는 당시 사회의 모습을 세밀하게 묘사한 글을 남기며 상업적으로도 베스트셀러의 위력을 알렸다. 또 독일에서 망명한 칼 마르크스는 ‘자본주의의 심장’인 런던에서 《자본론》을 저술하며 공산주의를 구상했고, 존 스튜어트 밀은 같은 문제를 보다 부드럽고 온화하게 해결하고자 공리주의를 발전시켰다. 찰스 다윈은 진화론을 주장하며 ‘과학의 시대’를 알렸다.

그러나 존 스튜어트 밀과 찰스 다윈이 대표하는 ‘빅토리아 시대의 새로운 물결’에 모두 찬성하지는 않았다. 공리주의와 진화론 같은 새로운 사상을 비난하고 반박하는 사람도 적지 않았다. 이 가운데 역사학자 토마스 칼라일은 돋보이는 존재였다.

토마스 칼라일은 ‘유능할 뿐만 아니라 정의롭고 용감한 영웅’이 역사의 발전을 이끌고 반대로 무능하고 불의한 자가 권력을 가지면 재앙이 발생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면서 1789년의 프랑스혁명을 ‘무능하고 불의한 권력자에 대한 천벌’이라 설명했다. 나아가 여러 조건이 무르익어도 영웅이 나타나지 않으면 역사의 다음 단계로 발전할 수 없다고 주장했다. 심지어 극심한 빈부의 격차 같은 당시 사회가 마주한 문제도 공리주의 사상이나 민주선거가 아니라 정의롭고 강력한 영웅이 나타나 사회를 다스리는 것으로 해결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면서 청교도혁명을 이끈 독재자 올리버 크롬웰을 ‘바림직한 영웅’으로 제시했다.

고개를 갸웃거릴 수밖에 없는 부분이 많은 주장이지만, 당대뿐만 아니라 오늘날에도 ‘영웅이 역경을 딛고 세상을 구원한다’는 주장에 매력을 느끼는 사람이 적지 않다. 특히 복잡해서 쉽게 해결하기 힘든 문제일수록 우리는 그런 영웅을 바라고 의존한다. 다원화한 사회의 반영일까, 요즘에는 전쟁이나 혁명의 영웅뿐 아니라, 각 분야에서 영웅이 부각된다. 언론에서는 영웅 찾기가 중요한 사명처럼 보이기까지 한다.

2년 전 설날 연후 때 우리 곁을 떠난 중앙응급의료센터 윤한덕 센터장도 이런 의미에서 영웅일 것이다. 그는 2019년 2월 4일 설날 연휴 동안 전국의 응급실에서 발생한 다양한 상황을 대비하려고 퇴근을 미루고 일하다가 집무실에서 싸늘하게 발견됐다. 고인은 눈을 감기 1주일 전 1주 129시간 이상 일하면서 과로가 누적됐다고 한다. 51살이면 앞으로 할 일이 많은데 너무 아까운 나이었다.

언론과 사람들은 고인을 추모하며 닥터 헬기, 권역외상센터 도입 등 응급의료체계 구축에 고인이 쏟은 헌신과 열정을 추어올렸다. 정부는 6개월 뒤 국무회의에서 ‘국가사회발전 특별공로순직자 의결안’을 통해 고인을 국가유공자로 선정했다. 민간인의 국가 유공자 선정은 1983년 미얀미 아웅산 테러 당시 세상을 떠난 민병석 대통령 주치의와 이중현 동아일보 사진기자 이후 처음이었다. 윤 센터장의 모교인 전남대 의대의 동창회는 지난해 2월 윤한덕 평전 《의사 윤한덕》을 발간했다. 동창회는 또 ‘윤한덕 상’을 제정, 지난 3일 첫 수상자로 정은경 질병관리청장을 선정했다고 발표했다.

그런데 윤 센터장이 떠난지 2년이 지난 지금, 과연 ‘응급의료체계’를 개선하려는 충분한 노력이 이어지고 있을까? 혹시 우리는 어디선가 제2, 제3의 윤한덕 같은 영웅이 나타나 문제해결에 헌신하기를 은근히 바라는 것은 아닐까? 아니면, 영웅을 만들고 우리의 아픔이나 한계에 대해 위안거리를 삼고, 그 영웅의 진짜 아픔과 꿈을 잊어버리는 것은 아닐까? 하늘나라 윤 센터장이 설날 연휴에 더욱 악화된 응급실 환경에서 탈진한 심신으로 환자를 보살피는 의료진을 본다면 어떤 생각을 할까?

이성주 기자 stein33@kormedi.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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