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보다 황홀… 연금술사가 빚은 ‘마이센 자기’

이재태의 종 이야기(42)

유럽 자기의 고향 마이센-드레스덴

독일 남동부의 엘베강변 작센주 드레스덴(Dresden)은 과거부터 문화와, 정치 및 상업 중심지였다. ‘독일의 피렌체’로 불리던 아름답고 호화로웠던 무역 중심 도시였고, 스위스의 산악 풍경과 비견된다고 ‘작센의 스위스’라고도 했다. 제2차 세계 대전 중이던 1945년 2월 연합군 공군의 폭격으로 2만 5천명의 민간인이 희생당한 아픔을 지니고 있다. 폐허가 되었던 도시는 종전 이후 다시 재건되었고, 독일 통일 이후에는 폭스바겐 자동차 공장이 들어서는 등 다시 독일의 상공업 중심지로 발전하고 있다. 드레스덴에는 작센의 왕 프리드리히 아우구스트 1세가 만든 보물 저장고인 녹색의 둥근 천장을 비롯하여, 젬퍼 오페라하우스, 레지덴츠 궁전, 쯔빙거 궁전 등 유명한 관광 자원들이 잘 알려져 있다.

마이센(Meissen)은 드레스덴 서북부 30km에 위치한 인구 3만 명 남짓한 작은 도시이다. 마이센은 드레스덴과 함께 유럽 도자기의 고향으로 알려져 있는데, 이는 이곳에서 유럽 최초로 자기가 제작되어 유럽의 도자기 시대를 열었기 때문이다. 마이센에서 도자기를 개발하기 전까지는 중국과 일본의 도자기가 유럽으로 수입되었다. 유럽 귀족들은 도자기에 열광하였고, 중국과 일본은 17, 18세기 동안 유럽에 7천만 피스의 도자기를 팔았다고 한다. 큰 도자기 한 개는 큰 주택 한 채의 가격과 비슷하였다. 유럽인들은 도자기(china)를 ‘중국(China)’의 국명과 같이 표시할 정도로 중국은 도자기를 생산하는 나라라고 생각했다. 

흙을 빚어 높은 온도의 불에서 구워낸 도자기(陶瓷器, china, porcelain)는 크게 도기(陶器)와 자기(瓷器)로 구분된다. 도기는 진흙(점토, 陶土)으로 섭씨 800~1000도에서 굽지만, 자기는 고령토(瓷土)를 주된 원료로 1200~1400도의 고온에서 굽는다. 도기는 물이 스며들지만 자기는 물이 스며들지 않는다. 규산성분의 자기는 도기보다 강도가 훨씬 강하여 얇게 만들 수 있고, 투광성과 광택이 있으며 두드리면 맑은 소리가 난다. 자기 중에서 청자는 1250도에 굽는다. 이에 비해 백자는 가마 온도가 1300도까지 상승하여야 만들어지므로 과히 자기의 제왕이라고 할 수 있다.

토기와 도기는 만들기가 쉬워 전 세계에서 사용되어왔으나, 자기는 오랫동안 중국, 한국, 일본, 베트남 등 동아시아 국가에서만 만들 수 있었다. 자기를 만드는 비법은 재료로 쓰이는 흙인 고령토(kaolin, 카올린)를 구할 수 있느냐의 문제였다. 고령토(영어 kaolin)는 중국 강서성 고령(카올링)산에서 많이 나오는 돌가루 흙인데, 고령토에 다른 흙을 섞어 자기를 만드는 것이다. 그러나 고령토는 흔한 흙이 아니었고, 유럽은 고령토를 찾지 못해 오랫동안 자기를 만들지 못하였다고 할 수 있다. (경상북도 고령에는 고령토가 생산되지 않는다.)

중국의 자기는 13세기 말 유럽에 처음 소개되었다. 당시에는 매우 귀하고 보석과 비교될 정도로 비쌌다. 동서교역이 확대되며 본격적으로 중국 자기가 유입되자 유럽 왕실과 귀족들은 중국 자기에 열광하였고, 중국 자기를 ‘동양에서 온 하얀 금’이라 불렀다. 자기를 소유하고 있다는 것은 높은 신분의 상징으로 여겨졌으며, 귀족들이 ‘자기’를 구한 날에는 손님들을 초대하여 축하파티를 열었다고 한다.

동양에서 자기를 수입하던 유럽인들은 단단하면서도 아름다운 중국식 자기를 만들어 부자가 되는 꿈을 이루기 위해 온갖 노력을 다하였다. 그러나 오랫동안 성공하지 못하였다. 그러다가 다양한 시도 끝에 고령토를 섞어 자기를 만드는 비법을 알아낸다. 마침내 1709년 드레스덴 교외의 마이센 가마에서 그들의 오랜 숙원을 처음으로 이루었던 것이다. 

마이센 자기를 만들게 한 작센공국의 선제후이자 폴란드의 왕이었던 아우구스트 2세는 드레스덴에 여러 건축물을 세워 ‘바로크의 도시’라는 명성을 얻게 한 사람이다. 가난한 작센공국의 군주였던 그는 군자금과 건축 자금을 마련하기 위하여 자기 제조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그는 연금술사 요한 프리드리히 뵈트거를 가두어두고 자기를 만들도록 했다. 뵈트거는 원래 프로이센 태생으로 그의 고향에서는 연금술사로 소문이 났다. 그는 프로이센의 왕 프리드리히 1세가 자신을 가두고 금을 만들 때까지 내보내주지 않을 것을 두려워하여 작센공국으로 도망을 간 것이었다.

그러나 작센의 왕 또한 소문으로 듣고 있었기에, 즉시 뵈트거를 연금하고 두 명의 감시자를 붙여 도망가지 못하게 한 것이다. 그러나 그가 금을 만드는데 실패를 거듭하자 왕은 화학적 조합만으로는 금을 만들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에게는 도자기의 비법을 연구하고 있던 티룬 하우젠과 같이 자기를 개발하도록 명령이 떨어졌다. 당시 중국 자기는 황금과 맞먹는 가치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아우구스트 2세는 비밀유지를 위해 드레스덴에서 엘베강을 따라 북쪽에 위치한 소도시 마이센의 알브레히츠부르크 성 내부에 가마를 만들었다. 도공은 자기제조법을 타인에게 이야기할 수 없었고 성 외부로의 출입도 금지됐으며, 외지인도 성에 들어올 수 없었다. 감옥과 같은 마이센 성의 실험실에 감금된 그는 8년간의 실험 끝에 1709년 마침내 유럽 최초의 단단한 자기를 만들어 내는 데 성공하였다. 1년 전 자기를 만드는데 가장 중요한 재료인 카올린을 발견한 뒤, 노력 끝에 흰 태토로 된 자기를 만든 것이다. 이를 바탕으로 1710년에 마이센 성에 ‘왕립 작센 자기소’가 설립되며, 본격적으로 자기가 생산되었다.

마이센 자기의 형태는 유럽에서 인기리에 사용되던 은제품의 형태를 본 땄으며 다양한 색채의 에나멜로 장식되었다. 마이센은 유럽 최초의 왕립 자기 생산지였고, 나중에 KPM (Königliche Porzellan Manufaktur) 브랜드로 발전하게 됐다. 감옥과도 같은 성 안의 자기 제조실에서 생활해야 했던 뵈트거는 9년 만에 젊은 나이로 생을 마감하게 된다.

뵈트거를 이은 헤롤트, 켄들러 시대에 이르러, 마이센자기는 상감기법을 도입하며 18세기 중엽까지 독보적 전성기를 열었다. 이들은 초창기에는 중국의 징더전(景德鎭)과 일본의 이마리 도자기의 디자인을 모방했지만 점차 당시 유행하던 문양과 형태를 자기 속에 넣었다. 헤롤트는 회화적 요소를, 켄들러는 조각적 요소를 자기에 가미한 것이다. 특히 켄들러는 백자에 인물, 새와 같은 동물을 상감 조각한 자기를 만들어 내어서 유럽에서 호평을 받았다. 또한 밝은 색으로 섬세하게 꽃을 그리는 마이센 자기의 특징인 독일식 꽃장식도 이 시기에 개발되었다.

작센에서 자기를 생산하는데 성공했다는 소식은 짧은 시간 내에 전 유럽으로 퍼져나갔고, 마이센 도자기의 제조 비밀도 오래 지켜지지는 못하였다. 자기를 만든 지 8년이 지난 뒤, 두 명의 도공이 탈출해서 오스트리아로 도망하여 비엔나에서 자기를 생산한다. 그러나 합스부르크왕가는 이들을 제대로 지원하지 않았기에 비엔나의 도자기가 융성해지지는 못하였다.

프랑스, 영국은 마이센의 비법을 알아내려고 많은 노력을 하였다. 프랑스는 끊임없이 자기 생산에 힘을 기울였고, 결국 1768년 프랑스 최초의 자기를 탄성시켰다. 자기가 생산된 세부르는 원래 그림이 발달한 곳이었는데, 카올린이 발견되고 일단 자기가 완성되자 얼마 후 마이센 자기와 맞먹는 명성을 얻게 되었다. 결국 약 반세기가 지나자 프랑스, 영국, 비엔나 등 유럽 전역으로 자기 제작 기술이 급속히 확산되었고, 유럽과 독일에는 도자기 제조공장들이 곳곳에 건설되어 경쟁적으로 자기를 생산하였다.

마이센-드레스덴 공방은 다른 제품과의 차별화하고 마이센 장인의 진품을 모조품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해 1722년 도자기의 밑면에 작센주의 상징인 ‘교차된 장검(長劍, 쌍칼)’을 표시하였다. 이는 전 세계에서 가장 오랫동안 사용되어온 상표 중 하나가 되었다.

마이센에는 매장이 없었기에 마이센에서 생산된 도자기는 드레스덴에서 판매되었고, 일반적으로 ‘드레스덴 자기’라 통칭된다. 마이센 도자기가 인기를 끌자 드레스덴에는 도자기 공예가들이 모여들었고 스튜디오라는 공방이 들어선다. 스튜디오는 마이센에서 생산한 깨끗한 백자를 가져와서 마이센 도자기 패턴의 장식을 하여 완전한 도자기로 만들어 판매하는 곳이었다. 드레스덴에는 20세기 초까지 200개가 넘는 스튜디오가 있었다. 이와 같이 깨끗한 상태의 백자가 스튜디오로 판매되어, 스튜디오에서 개별적으로 장식한 작품들을 하우스말러(hasumaler, 영어 house painting)’라고 한다.

마이센에서의 고급 도자기의 공급이 딸리게 되자 어떤 스튜디오는 마이센의 2등급 도자기를 구입하여 핸드페인트를 더하고, 그 위에 자기들의 상표를 그려 넣어 판매하기도 하였다. 나중에는 독일 바바리아, 영국의 워체스터, 프랑스 리무즈 지방의 도자기를 들여와 핸드 페인트한 후 드레스덴 도자기로 판매된 경우도 있었다. Donath & Company, Franziska Hirsch, Richard Klemm, Amrosius Lamm, Carl Thieme, Helena Wolfsohn 등이 그 당시 유명했던 스튜디오들이다.

그중 헬레나 볼프손은 드레스덴에서 가장 유명했던 도자기 스튜디오였다. 그녀는 1843년부터 1883년까지 자신의 이름을 붙인 스튜디오를 운영했는데, 아름다운 꽃 그림이 그려진 로코코 형식의 도자기를 장식한 그릇이나 장식품을 주로 판매하였다. 그러나 1883년 독일 법원이 이 스튜디오가 드레스덴의 ‘왕실도자기 제작공장(KPM)’의 이름을 무단 사용한 것에 대하여 사용중지와 함께 많은 금액의 배상금을 선고하여 문을 닫았다. 필자는 적지 않은 돈을 지불하고 그녀의 공방에서 만든 아름다운 여성 인물 도자기 종을 수집할 수 있었다. 마침내 아래 사진에 있는 두 명의 귀부인 마이센 종을 눈앞에서 마주할 수 있는 행운을 얻은 것이다.

1864년 왕립도자기공방인 KPM는 마이센의 트리비슈탈로 이전하였다. 1950년에는 동독의 국영 기업에서 개인으로 전환되었으나, 독일 통일 후인 1991년에 다시 작센주의 소유가 되었다. 마이센 도자기는 지금도 손으로 제작되며 인가된 전문 상인에 의해 전 세계로 판매되고 있다.

우리나라의 청자와 백자와 같은 전통 자기도 은은하고 무척 아름답다. 그러나 화려한 드레스 차림의 마이센 도자기 종이 만들어 내는 청아한 종소리는 필자에게 여유와 평화를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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