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억울하다” 청동 속의 표정마저 침울

이재태의 종 이야기(15)

‘베르사이유의 장미’ 마리 앙투아네트

“베르사이유의 장미”라는 일본 만화로 우리에게 친숙한 마리 앙투아네트는 프랑스 왕 루이 16세의 부인이었다. 그녀는 사치하며, 난잡한 파티를 여는 적국 출신의 왕비로 국민들에게 과도한 세금을 부과하고 그들의 아픔을 이해하지 못한 언행으로 프랑스 혁명을 유발하였고 국외로 탈출하려다 실패하여 단두대에서 처단된 비운의 왕비 이미지가 박혀있다.

마리 앙투아네트는 1755년 11월 2일, 빈에서 황제이자 토스카나 대공인 신성 로마 제국의 프란츠 1세와 합스부르크 왕가의 상속녀로 헝가리와 보헤미아의 여왕이자 오스트리아 제국의 여제 마리아 테레지아의 사이에서 막내로 태어났다. 자유분방하게 성장한 그녀는 모국어인 독일어 외에도 프랑스어와 이탈리아어 등의 외국어와 음악과 댄스 등을 배웠으며 하프연주에 소질을 보였다. 그러나 유독 프랑스어가 유창하지 않아, 후일 프랑스의 왕비로 생활하는 동안 주변의 따가운 시선을 받았다는데, 그녀에게 곱지 않은 프랑스인들의 시선이 그녀에 대한 편견을 만들었다고 믿어진다.

당시 오스트리아는 신흥 강국 프로이센의 위협을 받고 있었는데, 그녀의 어머니 마리아 테레지아는 전통적으로 적대국이었던 프랑스와의 동맹을 강화하려고 노력하였다. 프랑스도 강력해진 이웃 프로이센을 견제하기 위해 평소 앙숙이었던 오스트리아와의 협력이 필요했다. 프랑스왕 루이 15세의 공식 애첩으로 국사에 큰 영향을 행사하던 퐁파두르 후작 부인이 나서 오스트리아와 외교동맹을 맺고 공주 마리와 루이 15세의 손자인 루이 오귀스트의 정략 결혼을 추진하였다. 1770년 5월 16일, 마리는 14살에 베르사유 궁전에서 루이와 결혼식을 치러 프랑스의 마담 마리 앙투아네트가 되었다. 그들 부부는 결혼한 후 7년 동안 자녀가 없었으나 이후 네 명의 자녀를 두었다. 1774년, 루이 15세가 서거하고 남편이 루이 16세가 되자 마리는 프랑스의 왕비가 되었다.

 

마리는 왕비가 되고나서는 크고 작은 구설에 오르고 프랑스 국민들로부터 비난을 받았다. 왕으로 부터 베르사유의 프티 트리아농 궁전을 선물 받아 평소 동경하던 전원적인 분위기로 개조하였을 따름이었으나 국민들에게는 호화별장으로 개축하였다는 소문이 났다. 또한 프랑스 왕실과의 출생적 이질감에서 오는 외로움을 달래기 위하여 사교를 즐겼고, 파티나 가면무도회를 자주 열어 사치하며 국고를 낭비한다는 비난을 받았다. 당시 왕족과 귀족들은 화려한 로코코 문화에 몰두하여, 대부분 무절제한 사치를 했으므로 프랑스 왕실 국고가 휘청할 만큼 돈을 많이 썼다고 한다. 그러니 그녀가 왕비로 있었을 때 국고가 파산지경이 된 것은 사실이나, 그것은 그녀의 사치보다는 선대의 향락과 미국 독립전쟁의 지원 때문이었다고 한다. 사실 그전의 다른 왕비들과 비교하면 그녀가 쓴 돈이 많은 것이 아니었고, 왕과 왕비 부부가 쓴 돈은 왕실 예산의 10%에 불과했다고 한다. 곱고 흰 피부와 퐁파두르 스타일의 머리, 늘씬한 체형이었던 그녀는 의복에 관심이 많았고 프랑스 패션을 주도하고 유행을 선도했다. 당시 프랑스 왕실은 왕비가 옷을 갈아입는 것과 화장하는 모습까지도 공개하던 탓에 베르사유 궁전에는 왕비를 구경하려는 사람들로 매일 장사진을 이루었고, 이미 적국 오스트리아 출신의 왕비로 곱지 못한 시선을 받던 그녀에 대한 소문은 더욱 나쁘게 퍼져나갔다. 그녀에게는 ‘적자(赤字) 부인’ ‘오스트리아의 암캐‘라고 불릴 정도로 여론이 악화되었다.

1785년에는 ‘다이아몬드 목걸이 사건’이 발생하며 그녀에 대한 민중의 불신은 더 커졌다. 목걸이 사건은 앙투아네트를 팔아먹은 사기극이었다. 라 모트 백작 부인은 파리 추기경 로앙을 속여 2,800캐럿의 다이아몬드 목걸이를 가로챈다. 라 모트 백작 부인은 신앙생활은 뒷전인 채 왕비의 환심을 사 총리가 되려는 로앙의 욕망을 파악하고, 그에게 앙투아네트를 대신해 목걸이를 사달라고 요청한다. “왕비가 왕 몰래 목걸이를 사고 싶어 하니 비밀에 부쳐달라”는 거짓말을 한 것이다. 추기경은 그 말을 듣고 160만 리브르짜리 목걸이를 왕비 대신 구입키로 한다. 로앙이 보석상으로부터 목걸이를 넘겨받자 백작 부인은 왕비에게 전하겠다며 가져간 후, 목걸이를 해체해 팔아 큰돈을 번다. 사건의 전모는 약속한 지급일이 지났는데도 돈을 받지 못한 보석상이 왕비를 찾아가 그간의 과정을 설명하여 밝혀지게 된다. 왕비는 크게 분노했고 추기경을 파리 고등법원에 고소했다. 하지만 궁지에 몰리게 된 것은 그녀 자신이었다. 이 사건이 법정에 오르면서, 사람들은 소문으로 떠돌던 앙투아네트의 사치를 사실로 받아들인 것이다. 백작부인은 태형을 받고 추방되었으나, 로앙에게 무죄가 선고되면서 왕비는 더욱 곤경에 처한다. 재판이 1년을 끌면서 소문은 증폭됐고, 그녀는 이 사건의 피해자였는데도, 국민은 그녀가 사건을 주도했다고 생각하고 그녀를 증오하였다.

한편 궁정 내에서는 마리 앙투아네트와 스웨덴 귀족 페르센 백작과의 염문이 확산되었고, 나쁜 소문은 점차 퍼져나갔다. 더구나 그녀는 시민들에게 ‘빵이 없으면 케이크를 먹으라고 하라’는 말은 한 적이 없으나, 혁명군들은 선동을 위해 고의적으로 이 말을 퍼뜨렸고 여러 유언비어들은 복합적으로 민중의 증오를 가중시켰다.

 

 

심성이 착했으나 우유부단했던 루이 16세는 프랑스 개혁을 시도하려 했으나 귀족들에게 과세를 하지 못했고 입헌군주제도 받아들이지 못했다. 결국 1789년 7월 14일, 혁명군에 의해 프랑스 혁명이 발발했고, 마리 앙투아네트의 비호를 받던 귀족들은 망명해 버린다. 국왕 일가도 망명을 하려다 혁명군의 포로 신세로 전락하여 베르사이유에서 파리의 튈르리 궁전에 갇혀 지내며 혁명군의 감시를 받게 된다(.바렌느 사건) 루이 16세는 불명예를 두려워하여 프랑스에 머물고자 했으나 마리 앙트와네트는 모국 오스트리아로 망명을 계획했다. 그녀는 오스트리아 대사를 통해 비밀 편지로 본국과 연락을 취했고 페르센 백작의 도움을 얻어 위조 여권을 손에 넣었다. 마침내 1791년 6월 20일 대형 마차에 식량과 술, 옷을 가득 싣고 남편과 아이들, 시녀와 미용사까지 동반하여 몰래 파리를 빠져나왔다. 그러나 이미 소문이 난데다 짐이 많아 진행속도가 느렸으므로 군인들에게 잡혔고 결국 국왕 가족은 파리로 끌려오게 되었다. 국왕의 권위는 실추되었고, 친국왕파 세력으로부터도 호감을 잃었다. 공화파가 전면에 등장하며 루이 16세가 반(反)혁명 측이라는 인식을 퍼뜨렸다.
1792년 프랑스 혁명전쟁이 발발하였고, 마리 앙투아네트가 적군에게 프랑스군의 작전을 몰래 알려주고 있다는 소문이 퍼졌기에, 파리 시민과 의용군은 국왕 일가를 탕플탑에 유폐시킨다. 8월 26일에 프랑스 영토 롱위가 프로이센군에 함락되고, 파리 침공에 대한 위기감이 높아지자 의용병을 모집했으나, “감옥에 수감되어 있는 반혁명주의자들이 의용군의 출병 후 파리에 남은 가족을 학살할 것”이라는 소문이 떠돌기 시작했다. 곧 반 혁명파에 대한 사냥이 시작되었고, 파리 코뮌의 감시위원회는 모든 포로를 인민의 이름으로 재판할 것을 명령했다. 혁명 의용군이 편성되어 “반혁명의 음모에 당하기 전에 먼저 처단하자!”고 선동하였고, 민중에 의한 감옥의 습격이 시작되었다. 습격당한 감옥에서 많은 죄수들은 끌려 나와 약식 재판 후 학살되었다. 마리 앙투아네트와 운명을 함께하기 위해 귀국하여 체포된 랑발르 공작부인도 비참하게 죽었고, 마리 앙투아네트는 절망하였다.

1793년 1월 21일, 혁명 재판은 루이 16세에게도 사형 판결을 내려 단두대로 참수형에 처했고, 아들 루이 샤를도 어머니에게서 강제로 떼어졌다. 그해 8월 1일에 마리 앙투아네트는 콩세르쥬리 감옥으로 이감된 뒤, 10월 초에 공개 재판을 받았지만, 결과는 이미 정해져 있었다. 민족주의에 물든 혁명기의 민중에게 마리 앙투아네트는 단지 오스트리아 여자였고 반역자였다. 1793년 10월 15일, 그녀는 혁명 재판으로부터 사형 판결을 받았으며, 다음날 콩코드 광장에서 남편의 뒤를 따라 단두대에 의해 참수 당했다. 합스부르크 왕가 출신인 그녀는 반혁명의 혐의로 3일 간 심문을 받는 내내 의연하고 담대한 모습을 보였으며 형장의 이슬로 사라지는 순간에도 품위를 잃지 않았다. 혁명 직전, 마리 앙투아네트는 편지에 “불행 속에서야 겨우 인간은 자기가 누구인가를 알 수 있습니다”라고 썼다고 한다.

 

 

프랑스 혁명 당시에는 마리 앙투아네트에 대한 평가가 매우 부정적이었으나, 최근 그녀에 대한 부정적인 평판의 대부분은 과장된 것으로 밝혀지고 있다. 왕정시대 프랑스 왕비로서는 특별히 부적절한 행동이 없었다는 평가와, 당시 왕비들은 거의 정치에 참여하지 않았기 때문에 정치적 능력을 이유로 그녀를 폄하하는 것 역시 지나치다고 한다. 1793년 로베스 피에르의 ‘공포정치’가 시작되면서 혁명광장에 설치된 단두대에는 피비린내가 가시지 않았으며, 프랑스 혁명에서 가장 참혹하게 꺾인 인물은 그녀였다. 혁명세력은 그녀를 성적 스캔들의 주인공으로 만들었으며 남성 공화주의자들은 왕비의 부정한 사례를 들어 여성의 정치참여를 도덕적 타락으로 몰고 갔다. 당시 오스트리아와 프랑스는 앙숙관계였고, 두 국가 간의 전쟁으로 프랑스 국민들은 많은 아들과 형제를 잃었으므로 오스트리아에 적대감을 가지고 있었다. 그 두 나라의 화해와 동맹을 위해 앙투아네트는 프랑스로 왔지만 역사의 소용돌이에 휘말려 프랑스 혁명의 원인이라는 죄를 뒤집어썼다는 것이다..

마리 앙트와네트는 유럽에서 다양한 형태의 테이블종으로 복제되어졌다. 나는 이 종을 흔들 때 마다, 마치 그녀가 내 앞에 나타나 그녀의 억울했던 사정을 이야기할 것 같은 상상을 한다. 여기에 두 개의 대표적인 종을 소개한다. 1977년 영국의 고햄(Gorham) 은제품 회사는 ‘역사를 바꾼 여성 6명’을 은도금 종으로 만들어 시장에 내어 놓았다. 많은 사람들이 마리 앙트와네트가 인류에게 도움이 되는 어떤 위대한 일을 했는가? 하며 여기에 의문을 제기한다. 아마, 그녀의 부정적인 이미지로 인하여 세상을 바꾼 프랑스 혁명의 도화선이었다고 판단한 것 같다. 스페인의 이사벨라여왕 영국의 빅토리아여왕 이탈리아의 메디치부인 등이 포함된 다른 다섯 명의 위대한 여왕들과는 대조가 된다. 그래서 청동종 속의 그녀의 표정은 이렇게 침울한가 보다.

 

※ 이재태의 종 이야기 이전 시리즈

(1) 세상을 깨우고 귀신 쫓고…신묘한 종들의 사연

(2) 무시무시한 검은 전사가 당장 튀어 나올 듯

(3) 적군기 녹여 종으로…승전의 환희-눈물 생생

(4) 천재 화가 ‘달리의 나라’에서 부활한 앨리스

(5) 딸의 작전에 넘어가 맞은 ‘그녀’… 종도 20개나

(6) 성모 마리아와 고문기구, 이 지독한 부조리

(7) 여왕의 꼿꼿한 자태에 서린 독립 열망과 분노

(8) 부리부리한 눈빛… 아직도 통독 황제의 위엄이

(9) “프랑스가 발 아래” 프로이센 한때의 자부심 충만

(10) 지옥같은 참호전투…전쟁 부산물 예술로 부활

(11) 전에 없던 부르조아풍 의상, 근대화 상징물로

(12) “그대에게 행운이…” 미첼레 성인의 사랑 가득

(13) 다양한 감정 실린 종소리…나에겐 한때 ‘공포’

(14) 한 시대를 풍미…. 비와 함께 떠난 왕의 애첩

 

코메디닷컴 관리자 kormedi@kormedi.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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