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통령 주치의 산실… 외국의사도 가입 원하는 학회
[Voice of Academy 6-학회열전] 대한내분비학회
대한내분비학회가 매년 국내에서 개최하는 서울국제내분비대사학술대회는 의사들 사이에서 ‘시켐’(SICEM·Seoul International Congress of Endocrinology and Metabolism)으로 불린다.
지난 10월 말 서울 잠실 롯데호텔월드에서 열린 시켐2023에선 미국, 유럽, 호주의 내분비학회 임원들을 포함, 해외 33개국 의학자 490여 명을 비롯해 1300여 명이 참가했다. 400여 편의 초록이 채택됐으며 이 가운데 200여 편은 외국 학자가 발표했다.
학회에선 미국 유럽 대만 내분비학회 회장들이 한 자리에서 강연하는 ‘내분비학 정상회의(Global Endocrine Summit)’도 열렸고, 미국 유럽 일본 대만 호주 5개 협력 학회와 협동 심포지엄도 펼쳐졌다. 이 분야에서 명실상부한 아시아 대표 국제학회라는 위상을 여실히 보여준 것.
유럽생화학회(FEBS· Federation of European Biochemical Societies) 임원들은 학회의 열띤 분위기에 마음이 움직여 내년 4월 열리는 학회에서 젊은 주요 연구자에게 상과 상금을 수여하고 싶다고 제안했다.
'서울학술대회', 10년만에 세계화 '우뚝'
시켐에 처음 참석한 외국 의사들은 시켐이 10년 밖에 안 됐다는 것을 알면 깜짝 놀란다. 학회 회원들도 이렇게 발전하리라곤 꿈도 못 꿨다.
2013년 강무일 당시 이사장(가톨릭대)이 김성운 전 이사장(경희대)의 제안을 받아들여 ‘학회 세계화’를 내세우고 국제 학회를 추진하려고 했을 때만 해도 “진짜?” “우리가?” 하는 반응이 적지 않았다. 강 이사장은 서울아산병원의 송영기 교수를 국제협력이사, 가톨릭대의 유순집 백기현 교수를 각각 학술이사와 총무이사로 영입하고 밀어붙였다.
이듬해 난데없이 튀니지에서 협력 요청이 왔다. 우연히 대한내분비학회 의사들의 뜨거운 학구열을 경험했던 튀니지 의사가 남편인 무하메드 나프티 주한 튀니지 대사에게 다리를 놓아달라고 요청한 것. 대한내분비학회 임원들은 튀니지를 방문해 협약을 맺고 돌아오는 길에 ‘시켐의 성공을 암시하는 길조라고 반가워했고 실제로 그렇게 됐다. 다음 해 튀니지 학회 임원들이 시켐에 참여했고, 이에 더해 미국내분비학회는 학회에 부스를 설치해 달라고 자발적으로 요청하고 학회 등록과 함께 부스를 운영하기까지 했다. 학술대회가 거듭될 때마다 해외 학자들의 ‘관심 지수’가 쑥쑥 올라가더니 10년 만에 내분비 분야의 아시아 지존으로 자리잡았다.
학술지 세계화의 역사도 학술대회 못지 않았다. 학회가 ‘세계화 원년’인 2013년 학술지를 전면 영문으로 발행하겠다고 했을 때 일부 의사들은 대놓고 헛웃음을 내질렀다. 면전에서 반대하는 이도 있었다. 임원진은 “세종대왕이 노할지라도 영문화가 답”이라고 믿고, 비난을 각오하고 평탄한 길이 아닌 비탈길로 갔다.
10년 동안 이 학술지 《EnM》(Endocrinology and Metabolism)의 간행위원장을 맡은 이원영 강북삼성병원 교수와 편집위원들은 사생활을 반납하다시피 하며 원고 청탁과 심사, 교열에 매달렸다. 지성이면 감천이라고, 2017년 과학인용색인확장판(SCIE)에 등재됐고 2020년에는 영향력 지수(IF) 4를 뛰어넘어 국내 최상위급이 됐다. 학자들이 논문을 게재하고 싶어도 경쟁이 뜨거워 4, 5편 가운데 1편만 채택될 정도로 권위가 올라갔다.
1982년 출범...민헌기 민병석 허갑범 등 주축
“국제 학계에선 한국 학회가 10년만에 일본이 100년동안 구축한 성과를 뛰어넘었다고 얘기합니다. 실제로 학회가 출범할 때만 해도 우리를 가르치다시피 한 일본 학회에선 우리를 많이 부러워하는 듯해요. 일본내분비학회 학술지는 일본어 논문이 90%를 차지하지요. 국제적 인용이 적을 수밖에 없어 IF도 우리보다 1점 가량 낮습니다.” -이재혁 총무이사(한양대 명지병원 교수)
“국제협력 측면에서 선진 학회엔 배우고, 병진 학회와 협력하고, 후진 학회는 도와주자는 것이 무언의 약속과도 같은데 우리는 병진국과 후진국이 계속 늘고 있습니다. 일본은 선진 학회에서 병진 학회로 바뀌었지요.” -이시훈 국제협력이사(가천대 길병원 교수)
대한내분비학회는 1982년 7월 공식 출범했다. 1970년대 대학병원 내과에서 세부전공으로 내분비대사내과가 생겼고, 호르몬 질환에 대한 학문적 접근 필요성이 높아지면서 자연스레 학회 설립 목소리가 나왔다. 1979년 민헌기 서울대 교수가 회장을 맡고 가톨릭대 김승조, 민병석 교수와 연세대 허갑범 교수 등이 함께 시작한 내분비연구회가 전신이다. 연구회는 월례 집담회를 17차례 갖고 민헌기 회장, 민병석 성호경 부회장 체제로 학회 닻을 올렸다.
국민 식생활의 서구화로 당뇨병 환자가 급증하고, 진단의학의 발전으로 갑상선질환과 각종 호르몬 질환이 크게 늘면서 학회의 중요성이 덩달아 커졌고, 회원들의 노력이 더해져 세계적 학회로 성장했다. 공교롭게도 초기 기둥들 가운데 세 명이 대통령 주치의를 지냈다. 고 민헌기 교수는 박정희 대통령의 주치의였고 민병석 교수는 전두환 대통령의 주치의로 아웅산에서 유명을 달리했다. 고 허갑범 교수는 김대중 대통령의 주치의였다.
학회는 당뇨병, 갑상선질환, 골다공증, 비만, 지질·동맥경화, 뇌하수체질환 등 호르몬과 관련한 수많은 질환을 치료하는 이론적 토대를 닦으며 진료지침과 통계자료들을 발표해왔으며 최근 10년 동안엔 부신질환, 노년내분비장애, 환경호르몬, 내분비희귀질환 등에 대한 연구회를 통해 연구 영역을 넓히고 있다.
“14년 먼저 설립된 대한당뇨병학회를 비롯해 대한골대사학회, 대한갑상선학회, 대한동맥경화지질학회 등과 건강한 협력관계를 유지하고 있습니다. 많은 회원들이 겹치기도 한데, 통합적 접근의 중요성이 부각되면서 내분비학회의 중요성이 커지고 있습니다. 실제로 대한의학회, 대한내과학회 등에서 내분비학회를 관련 질환 학회를 아우르는 대표 학회로 인정하고 있지요.” -정윤석 이사장(아주대병원 교수)
학술대회+학술지+기초의학 통해 도약
내분비질환의 대표 학회는 국내 유관학회와 경쟁에 머물기보다는 세계로 눈을 돌렸고, 학술대회와 학술지의 ‘두 마리 토끼’가 모두 껑충껑충 뛰어다니는 성과를 냈다. 미국 유럽 중국 대만 등과 협약을 맺었고 올해엔 호주내분비학회와 교육, 교류 지원협약을 맺고 젊은 의학자 5명씩 서로 단기연수를 보내도록 했다. 내년에는 일본과도 ‘병진 학회’로서 협약을 맺을 계획이다. 내년 유럽내분비학회에선 한-유럽 공동 세션이 마련돼 있고, 미국내분비학회에선 별도 협력 미팅이 예정돼 있다. 이런 ‘국제화’에 따라 외국 의사들도 학회 가입을 원해서, 현재 회원 1700여 명 가운데 231명이 외국인인 국제회원이다.
“학회 발전에는 두 축이 토대가 됐어요. 한 축이 국제화였다면 한 축은 기초의학 중시였습니다. 초대 부회장 성호경 교수가 서울대 생리학교실 소속이었고 창립 회원 37명 가운데 5~7명이 기초의학자였습니다. 지금도 기초의학자 78명이 정회원으로 크게 활약하고 있습니다.” -백자현 회장(고려대 생명과학대 교수)
학회 회원들은 그럼에도 기초-임상 협력에서 ‘여전히 배 고프다’고 공감한다. 이은직 전 이사장이 취임 직후 기초의학 중시와 중개연구 활성화를 당면 과제로 공포했을 정도다.
학회는 이에 더해 젊은 의사들에 대한 과감한 투자와 공익 기여를 통해 한 단계 더 도약한다는 목표를 달성하려고 한다.
“의대생을 대상으로 호르몬 학문의 중요성을 알리는 캠프를 개최하고 젊은 의사들에게 호주를 비롯한 해외 연수를 알선하는 등 ‘미래 내분비 의사’를 육성하는 데 힘쏟으려 합니다. 또 내년에 재단을 만들어 국민 홍보와 호르몬 질환 취약계층을 지원하는 등 사회적 역할도 강화할 계획입니다. ‘호르몬의 날’을 제정, 시민들에게 호르몬의 중요성과 내분비 질환의 위험에 대해서도 적극 알리겠습니다.” -정윤석 이사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