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꺼진 불도 다시...” 사라지지 않는 매독
백은정의 女子이야기
# 1
앳된 얼굴의 한 여성이 진료실로 들어왔다. 제대로 걷지도 못하고 얼굴을 찡그린
것으로보아 외음부나 아랫배에 무슨 불편이 있다고 짐작된다. 그의 나이는 불과 만
19세. 제대로 앉지도 못하고 “3일전부터 바깥 쪽 거기가 불편해서 단순한 피부병인
줄 알고 약국에서 연고만 사서 바르고 있는데 좋아지지 않는다”고 털어 놓았다.
그의 증상을 눈으로 확인한 나는 화들짝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대학병원 근무시절
이후로는 10여년 가까이 좀처럼 보지 못한 외음부 궤양이 눈에 들어 왔다. “아 매독일지도
몰라”라는 생각이 퍼뜩 든다.
일단 환자에게 상황을 설명하고 △혈액검사 △궤양부위 촬영 △조직검사를 했다.
며칠 후, 아니나 다를까 모든 검사가 매독균 양성반응을 강하게 내보였다. 매독 초기였다.
매독 치료제인 페니실린(Benzathine Penicilline G)을 주사했다.
일주일 후 다시 진료실에 온 그 여성의 표정은 아주 밝았다. 초기, 즉 1기 또는
2기 상태의 매독은 주사를 한번만 맞아도 치료가 가능하다. 난 놀란 가슴(?)에 환자에게
페니실린 주사를 한번 더 맞게 했다. 그리고 6개월 후 다시 혈액검사를 해야 한다고
설명했다.
# 2
한눈에 봐도 무척 지적인 분위기의 그 40대 여자는 매우 단호한 인상이었다. 진료실에 들어와서도
한참을 불안정한 눈빛으로 있다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처음엔 벌레에 물린 줄로만 알았는데....(한참을
뜸들이다) 그리고, 10년도 더 전에 매독으로 치료받은 적이 있어요” 졸기라도 할
듯한 나른한 오후에 정신이 퍼뜩 들었다. 아니 요새 웬일이지? 매독은 이렇게 흔한
병이 아닌데… 그도 처음에는 대수롭지 않게 여기다 똑같은 모양으로 몸에 붉은색
반점이 다시 생기자
갑자기 의심이 났단다.
10여 년 전 처음 매독에 걸렸을 때 먹는 약으로 치료를 했고 그 후에 경과를 살피지
못했단다. 아마 그 상태에서 그의 매독은 초기 매독에서 2기 매독으로 옮기고, 기나긴
잠복기를 거쳐 지연성 매독(Latent Syphilis)으로 나타난 듯했다. 혈액검사 결과
역시 매독균 양성반응이 나타났다. 이 여성은 매주 한번씩 3주 동안 페니실린 주사를
맞을 예정이다. 더 중요한 것은 후기 매독, 즉 3기 매독과 신경매독으로의 전이를
막기 위해 뇌척수액검사, 심혈관초음파검사, 안과검사, 신경검사 등과 정기적인 상담을
해야 한다. 그에게 더 많은 애정과 관심을 가져야 한다.
외음부에 궤양, 즉 헐어내리는 증상이 있는 질병 중 가장 흔한 것이 ‘헤르페스
바이러스 감염증’이다. 성적 접촉에 의해 생기는 감염증이지만 궤양 생김새나 통증
정도가 다르다.
헤르페스성 궤양은 처음에는 작은 물집이 생겼다가 심해지면 궤양이 생긴다. 통증이
아주 심하고 주변에 이차 세균감염을 일으키기도 한다. 항바이러스제로 약 일주일
정도 치료하면 쉽게 호전된다. 다만 자주 재발한다.
하지만 똑같이 성적 접촉에 의해 생기는 질병인 매독은 처음 외음부, 성기에 궤양이
생겨도 그다지 통증이 없다. 사타구니 임파선이 붓거나 압통도 나타나지 않는다.
그래서 상당수의 환자가 초기, 1기 매독을 모르고 지나친다.
초기 매독은 약 6주가 지나면 피부에 증상이 나타나는 2기 매독으로 진행한다.
증상이 광범위하게 퍼지는 경우도 있지만 외음부에 생기는 경우에는 헤르페스처럼
보이기도 한다.
1, 2기 매독을 제대로 치료하지 못하고 3~12주 이상 지나면 잠복기간을 거쳐 지연성
매독이 된다. 지연성 매독은 잠복기가 1년 이내인 경우 초기지연성 매독(early latent
syphilis), 1년 이상인 경우 후기 지연성 매독(late latent syphilis)으로 나눈다.
후기 지연성 매독은 3기 매독(late 또는 Tertiary syphilis)으로 진행할 가능성이
매우 높다.
3기 매독은 치료받지 않은 환자의 20~30%가 긴 잠복기를 거쳐 후기 합병증을 나타낸다.
약 10%가 심혈관매독, 즉 대동맥염 등의 증상을 보인다. 뇌수막염, 신경마비 등 합병증도
약 7%가 된다.
아직도 사라지지 않고 있는 인류의 적. 성병하면 가장 먼저 ‘매독’을 떠올리는
사람이 많다. 성경에도 나온다. 최근에는 생활이 풍요롭고 위생이 발달한데다 강력한
치료제 페니실린이 나오면서 서서히 ‘성병의 제왕’ 자리를 다른 균들에게 물려주는가
싶었다. 나도 의사 생활 내내 매독의 전형적인 초기 병변을 이전에는 본 적이 없다.
혈액검사 상 매독 반응을 띠고 태아에게서는 선천성 매독이 의심되었던 한 임신부의
분만을 돕다가 바늘에 손을 찔려 페니실린 주사를 예방적으로 맞았던 적이 있다.
그래서 최근 매독 환자를 잇따라 보면서 그 아픈 주사를 맞아야 하는 여인들의 고통이 더
크게 떠올랐다.
이들을 보면서 생각나는 말은 “꺼진 불도 다시 보자”였다. 특히 40대
여자 환자의 경우 초기 치료의 중요성과 정기적인 추적검사, 검진의 중요함을 깨닫는다.
행여 성병이라는 것이 알려질까 두려워 숨기는 것은 옳지 못하다. 소중한 건 자기
몸과 건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