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베닥] 선친 뜻 따라 ‘과학’으로 심장기형 아기 살리는 의사

⑪소아심장수술 윤태진 교수

울산대 서울아산병원 소아심장외과 윤태진 교수(56)는 초등학교 저학년 때 서울대 의대 교수인 아버지가 일하는 곳에 따라갔다가 혼란에 빠졌다. 그곳은 실험실도, 진료실도 아니라 철공소와도 비슷한 작업장이었다.

아버지는 비지땀을 흘리며 고철 미니잠수함 닮은 것을 만드는 작업을 진두지휘했다. 한 해 평균 70여만 명을 중독시켜 3,000여 명의 목숨을 앗아갔고, 수많은 사람을 장애인으로 만들던 연탄가스와 싸울 무기를 개발하고 있었던 것.

연탄가스에 취하면 김칫국물 이나 식초를 마시는 ‘민간요법’에 의존하던 때 아버지가 ‘과학’으로 개발한 고압산소치료기는 전국의 의료기관에 보급되면서 수 천, 수 만 명을 살렸다.

선친 윤덕로 교수는 자녀에게 “의사는 사회적으로 뜻있는 일을 해야 한다”고 가르쳤고, 두 아들은 그 길을 갔다. 장남 익진(58)은 건국대병원에서 장기이식의 권위자로, 차남 태진은 소아심장외과 권위자로, 숱한 생명을 살리면서 연구와 사회봉사에서도 굵직한 발자국들을 남기고 있다.

윤태진 교수는 서울대병원 인턴 때에 ‘사회적으로 의미 있는 일’을 위해 힘든 길을 선택했다. 당시 인턴들은 서울대병원 협력 수련기관인 부천 세종병원에서 2개월 근무했고, 흉부외과에서 첫 한 달 생고생을 하면, 다음 달은 자신이 원하는 곳에서 지낼 수 있었다. 흉부외과에는 송명근, 박표원, 서동만 등 기라성 같은 ‘칼잡이들’이 포진하고 있었다. 수많은 사람들이 생사의 갈림길에서 살아나갔지만, 속절없이 떠나는 이도 목도해야만 했다. 수술실에서 조금만 방심해도 불호령이 떨어졌고, 폭언은 ‘일상 언어’였다. 상당수 인턴들에게 한 달 무사히 끝나면 1초라도 더 빨리 떠나고 싶은 곳이었다.

윤 교수는 이 ‘무시무시한 곳’ 한 달 근무 뒤 “한 달 더 있겠다”고 자청해서 주위 사람이 혀를 내두르게 했다. 서울대병원에서도 2개월 흉부외과에서 고생했고, 전공의도 순탄한 길 대신 울퉁불퉁한 흉부외과의 길로 들어섰다. 전공의 4년차 때에는 이 험한 길 중에서도 가파르기로 소문난 소아흉부외과에서 8개월 근무하고, 지금까지 쭉 그 길을 걸어오고 있다.

윤 교수는 “인생은 짧고, 예술은 길다(Life is short and art long)”는 히포크라테스의 명언은 두 번 수정돼야 한다고 믿는 의사다. 원문의 문맥을 보면 ‘Art’가 일반적 예술보다는 의술을 가리킨다는 것은 시나브로 상식이 돼가고 있다. 윤 교수는 이에 더해 “의학은 예술이나 의술 보다는 과학이 돼야 한다”고 강조한다. 한 사람의 명의가 멋진 술기로 환자를 살리기 보다는 과학적 시스템에 의해서 환자를 살려야 한다는 것.

윤 교수는 군의관을 거쳐서 서울아산병원에 스카우트됐다. 조교수 때 캐나다 토론토 대학교 협력병원인 아픈어린이병원(The Hospital for Sick Children)에 전임의로 ‘계급’을 낮춰서 연수를 갔다. 병원은 ‘Sick Kids’의 별칭을 갖고 있으며, 세계 최대인 7만㎡ 면적에 21층 규모의 어린이 질병 연구소 ‘피터 길간 연구학습센터’를 산하에 두고 있다.

윤 교수는 전공의처럼 응급환자의 침대를 끌고 가기도, 미국 곳곳으로 경비행기를 타고가서 이식수술을 위해 기증된 심장을 공수하기도 했다. 그곳에 왔던 국내 한 대학교수 부부는 “왜 의대 교수가 이런 일을 하면서 생고생하느냐?”고 묻기까지 했다. 윤 교수는 “의술이 아니라 과학을 배우러왔고, 기초부터 하나하나 배우는 중”이라고 대답했다.

그는 수술에 빠지지 않고 참가하면서, 수술뿐 아니라 진료 협력 시스템까지 철저히 메모했다. 연구와 논문 작성도 본격적으로 시작해서 글렌 반 아스델 박사(현 UCLA병원 소아심장외과 과장), 크리스토퍼 칼데론 박사(현 텍사스소아병원 소아심장외과 과장) 등과 미국흉부외과학회(AATS) 학술대회에서 발표하고, 학회 학술지 《JTCVS》에 논문을 발표했다. ITCVS 논문 발표는 국내 소아흉부외과 의사로서는 처음이었다.

윤 교수는 귀국해서 조금씩, 조금씩 흉부외과에서 ‘명의’가 아니라 ‘과학적 프로그램’에 따라 환자를 살리는 시스템을 구축해나갔다. 이전에는 ‘명의의 판단’이 곧 치료법이었다. 교수가 혼자 결정해서 새 치료법을 도입했다가, 결과가 안 좋으면 내팽개치는 경우도 있었다. 일부 명의에겐 잘되면 본인의 성과이고 잘못되면 주변의 잘못이었다. 관련 과 의사들과의 협의는 난망했고, 전공의들은 환자가 아니라 교수만 바라봤다.

윤 교수는 다른 교수들과 함께 △전문가들이 모두 모인 합의체에서 치료방법을 결정하고 △새 치료법은 충분히 검증해서 도입하며 △교수별 치료법 대산 표준화된 치료법에 따라 전공의들이 환자를 볼 수 있게 하고 △연구와 진료에서 역할과 책임을 명확히 하면서 교육과 토론이 가능한 시스템을 만들어나갔다. 전공의에게 폭언을 하는 교수는 사직하도록 유도해서, 자유로운 토론 분위기를 조성했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의료진의 아이디어를 모아 △선천성 심장기형 태아를 임신한 임부에게 소아심장외과 의사들이 미리 상담하는 시스템 △아기 출산 후 수술 전까지 스마트폰 앱으로 관리해주는 ‘홈 모니터링 시스템’ △3D 프린터로 심장모형을 제작해서 아기 수술 전략을 세우고 보호자들에게 보여주면서 설명하는 시스템 등을 도입해, 보호자들 가슴에 달린 추의 무게를 덜어주었다.

과학의 나무가 뿌리내리고 자라는 과정에서 ‘놀랄만한 치료결과’들이 속속 열매맺었다. 2005년에는 몸무게 40㎏인 뇌사자의 심장을 10㎏ 아기에게 이식하는 고난도 심장이식 수술에 성공했다. 이듬해에는 심첨판폐쇄와 대혈관전위를 함께 갖고 2.1㎏로 태어난 미숙아를 내과적 시술과 수술을 병행하는 ‘하이브리드 수술’로 살려냈다. 생존 가능성이 10% 이하였지만 숫자는 숫자에 불과하다는 것을 보여줬다.

2008년에는 확장성 심근병증을 갖고 있는 모자를 이틀 연거푸 수술해서 살려내는, 영화에서 나올 법한 이야기를 만들기도 했다. 2012년에는 1.180㎏으로 태어난 극소 저체중 미숙아의 복합 심장기형을 수술로 치유하기도 했다.

특히 하이브리드 수술은 미국에서 먼저 시작했지만, 서울아산병원에서 한 단계 업그레이드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특히 활로4징을 갖고 태어난 신생아는 수술 뒤 작은 크기의 폐동맥 판막을 제거한다는 것이 정설일 때, 윤 교수팀은 70%에게서 판막을 살릴 수 있다는 논문을 발표해서 국제학계에 화두를 던졌다. 미국 의사들은 대체로 의심쩍어 했지만, 신시내티 병원의 제임스 트웨델 박사가 내한해서 수술 장면을 보고 실상을 알린 뒤 생각을 바꾸기 시작했다. 과학적 연구와 과감한 실행으로 학계의 기존관념을 바꾼 것이다.

서울아산병원 소아심장수술팀은 한 해 750여명을 수술하면서 가장 복잡한 심장기형을 수술하고 1% 미만의 가장 낮은 사망률을 기록하는 세계적 진료 팀으로 자리매김했다.

윤 교수는 “아산병원의 협진 시스템 덕분에 이런 일들이 가능해졌다”고 말한다. ‘태아 초음파의 귀재’로 불리는 산부인과 원혜성 교수가 정확히 진단하면, 신생아중환자실에서 아기를 잘 돌보면서 적절한 수술시기를 잡고, 소아청소년심장과와 협력해서 치료함으로써 99%의 아기들을 살릴 수 있게 됐다는 것.

특히 소아청소년심장과 김영휘 교수와의 협력은 국내를 넘어서 해외에까지 닿고 있다. 김 교수가 서울아산병원 해외의료봉사팀의 일원으로 필리핀, 캄보디아, 네팔 등에서 중증 심장기형 환자를 발견하면, 윤 교수는 화상으로 협의한 뒤 서울로 데려와 수술해 숱한 생명을 살렸다. 지난 2월에는 네팔에서 대혈관전위로 사흘 밖에 살 수 없다는 진단을 받고도 한 달 남짓 얼굴이 파랗게 변한 채 숨을 몰아쉬며 연명하고 있는 아기를 급히 서울로 데리고 와 살리는 기적을 연출하기도 했다.

윤태진 교수가 수술 후 건강을 회복 중인 네팔 아기를 살펴보고 있다. 사진=서울아산병원 제공

윤 교수는 2006년 아산교향악단을 만들어 단장 겸 악장으로 매년 연주회를 펼치고 있다. 음악을 사랑한 선친이 권유한 바이올린을 통해 선친의 봉사정신을 실현하고 있는 것.

윤 교수는 “흉부외과 의사는 자칫 삭막해지기 쉽고 아기 엄마에게도 투박하게 대할 수 있어서 ‘못된 내 자신’이 조금이라도 착하고 부드러워지기 위해 음악활동을 한다”고 말했지만, 병원 측을 취재한 결과, 수익금 모두를 선천성 심장병 환자 가족 모임에 기부하는 것으로 드러났다.

    이성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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