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식 전쟁멜로 님은 먼곳에



퀴즈!
* 애타게 찾던 남자 친구(혹은 남편이나 아이)를 혀에 단내가 나도록 고생한 끝에 찾았다! 어떻게 하실 것인가?
첫째: 반가움에 달려들어 포옹하거나 끌어안는다
둘째: 반가움과 찾기까지의 분노감으로 따귀나 종아리를 때린다.
셋째: 바라보고 울거나 반가움이 섞인 욕을 한다!

<님은 먼곳에>에서 제시한 답은 두 번째다. 한국인의 정서를 꿰뚫은 탁월한 묘사다. 어려서 친구들과 망우리 공동묘지를 싸돌아다니다 해가 떨어진 뒤 집으로 돌아오니 경찰 아저씨가 턱하니 있는 것이 아닌가?

친구 무리에서 나를 발견한 어머니는 냅다 내 종아리를 팬다. 주변에 있던 친구들도 각자의 어머니로부터 치도곤을 당했다. 미국에서는 아동학대죄로 처벌을 받을 상황이지만 세월이 흘러 그것이 혈육의 정을 담은 한 가지 표현법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다시 <님은 먼곳에> 라스트 신. 우여곡절 끝에 찾은 남편을 잠시 바라본 순이. 냅다 남편의 따귀를 갈린다. 계속 갈긴다. 세어보니 6번이다. 남편은 그녀 앞에 무릎을 꿇고 운다. 순이는 남편을 발 밑 아래로 내려다보면서 소리 죽여 운다.

화면은 칼라에서 흑백으로 전환되면서 로우 앵글(low angle)이 된다. 그 사이 비스듬한 언덕 위에 있는 순이 부부 사이로 긴박하게 병사들이 뛰어 다닌다.

한국정서 담긴 전쟁영화의 본보기 제시

이 장면 하나로 감독 이준익은 한국의 스티븐 스필버그라고 불려도 전혀 공치사가 아닌 영상 테크닉을 발휘했다. 재기발랄한 신세대 감독들에게서는 찾을 수 없는 인생의 농염(濃艶)함이 묻어 있다. 1,230만 관객을 돌파한 <왕의 남자>는 잊어라! 이 감독의 대표작은 이제 <님은 먼곳에>다.

스필버그는 특수효과를 100% 활용한 공상과학 영화로 세계 영화시장을 석권해 나가고 있다. 이준익은 이제 한국인의 정서가 깃든 멜로물로 월드 시네마 마켓을 공략한다면 반드시 성공할 수 있다.

‘며느리를 집안의 씨받이로만 대하는 시어머니’, ‘갓 결혼한 아내를 두고 바람 피우는 남편’, ‘동네 아낙들 앞에서 노래 부르는 것으로 시집살이의 고단함을 달래는 며느리’, ‘니 내 사랑하나!라는 뜬금없는 말을 남기도 홀연히 월남으로 파병된 남편’, ‘지아비를 찾겠다는 일념 하나로 물설고 낯설은 베트남을 찾은 아내 순이’….

<님은 먼곳에>의 뼈대를 이루고 있는 중요한 얼개는 바로 한국인들만의 정서와 감정 그리고 역사가 오롯이 담겨 있다.

“사랑한다고 말할 걸 그랬지
님이 아니면 못 산다 할 것을
사랑한다고 말할 걸 그랬지
망설이다가 가버린 사람
마음주고 눈물주고 꿈도 주고
멀어져 갔네, 님은 먼곳에
영원히 먼 곳에 망설이다가
님은 먼 곳에“


멤버들의 돈을 빼돌려 원성을 듣고 있지만 왠지 밉지 않은 인정을 갖고 있는 밴드 마스터 정만(정진영). 남편을 찾기 위해 베트남 인력송출 회사를 찾은 순이는 정만을 만난다. 그의 권유로 써니로 개명돼 졸지에 베트남 파병 군부대 위문가수가 된다.

남편이 있는 호이안 지역으로 출동하는 헬기를 타고 이동할 때 조종간을 잡고 있는 병사가 ‘써니’의 명성을 알고 ‘노래 하나 불러 주십시요!’라고 부탁한다. 헬기 안에서 낙하산 이동 보조 줄을 마이크 삼아 써니가 사부곡(思夫曲)으로 불러 주는 노래가 60년대 가요계를 평정했던 신중현 작곡, 김추자 노래의 ‘님은 먼곳에’다.

고즈녁한 저녁 노을과 전쟁중이지만 평화스런 베트남의 시골 전경 그리고 하늘을 오가는 헬기 편대들의 모습을 교차로 해서 들려 오는 ‘님은 먼곳에’. 수애의 보이시한(boyish)한 육성은 김추자 원곡과는 또다른 맛깔스런 정취를 풍겨준다. 2000년대 들어 한국 영화음악 사상 최고의 선곡 장면이다.

베트콩에게 체포된 뒤 목숨을 위협 받자 ‘우리는 노래하는 밴드들이고 저 여자는 가수입니다’라고 항변하는 정만의 말을 입증하기 위해 써니가 현지 주민들 앞에서 노래하는 장면, 그리고 남편을 찾아 조용히 눈물짓는 순이의 모습을 보여주는 라스트 엔딩에서 다시 흘러 나온다.

수애가 부른 ‘님은 먼곳에’, 영화주제 압축

<님은 먼곳에>에서 배경음악은 영화에 대한 감흥을 증폭시켜 주는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해내고 있다.

써니가 정만의 부추김으로 베트남 파병용사 위문 공연장에서 불러주는 노래는 ‘울릉도 트위스트’, ‘월남에서 돌아온 김상사’, 김정미의 ‘간다고 하지 마오’다. 돈을 더 벌기 위한 정만의 꼬임으로 미군 병사들 앞에서 공연할 때 레퍼토리로 채택한 곡은 <지옥의 묵시록>에서 바니걸스 공연단이 미군 병사들을 광란의 도가니로 휘몰아 갔던 ‘Suzie Q’이다.

‘써니‘는 목숨이 경각에 달린 전쟁터에서 공포와 외로움에 떨고 있는 수컷들의 생존 본능을 달래주고 있는 모성애의 표상이 되고 있다.

베트콩 부대에 사로 잡혀 죽음이 경각에 달려 있을 때 운 좋게 미군들의 공습이 가해진다. 이 틈을 노려 극적으로 탈출하지만 미군 병사들은 한국인들을 베트콩 협조자로 경계의 총구를 들이댄다.

이때 정만과 일행은 미국 국가인 ‘성조기여 영원하라 Stars and Stripes Forever’와 독립전쟁터에서 목숨을 잃은 아들, 남편, 친구들의 영혼을 위로하는 기원을 담은 19세기 아일랜드 민요 ‘Danny Boy’를 열창한다. 이 노래 덕분에 정만 일행은 베트콩 첩자라는 오해를 풀고 석방되며 마침내 순이의 남편을 찾게 될 수 있는 행운을 얻게 된다.

‘나는 지금 내 모든 것을 걸고 당신에게 가고 있습니다. 이것이 당신이 사랑이 뭔지 아느냐고 물었던 것에 대한 나의 대답입니다’-1971년 베트남에서 순이.

남편을 찾기 위해 맘보 바지를 벗어 버리고 핫팬티 차림으로 변신한 써니. 그녀가 ‘울릉도 트위스트’와 ‘간다고 하지 마오‘를 열창하면서 군 부대원들에게 ’여성 팬티를 뿌려댄다‘.

‘여자 팬티를 몸에 걸치면 전쟁터에서 살아남을 수 있다는 속설’을 담은 그녀의 깜짝 선물에 혈기왕성한 병사들은 미친 듯 환호한다. 이 장면은 베트남 위문가수로 현지를 방문했던 가수 현미 씨의 육성 증언을 참고로 해서 삽입했다고 한다.

허스키한 목소리, 얄밉도록 수더분한 연기 돋보여

<아버지 왜 젊었을 때 굶으셨어요? 컵 라면이라도 드시지요?’ 오호통제라! 젊은이! 지금 시각으로 과거를 재단하지 말게! 컵라면은 80년대 후반 생겨난 생필품이네>

혈기방자한 아해들이여! ‘아버지는 미국의 용병(用兵)으로 베트남 끌려 간 거잖아요? 뭐가 자랑스러워요!’라고 뼈 깎는 소리 하지 말라! 당신들은 천년만년 20대인 줄 아는가?

아버지 세대들은 후방에 있는 가족들의 먹거리를 위해 자신의 20대 시절 목숨을 담보로 이국 멀리 베트남까지 찾아갔다.

극중 배경 시대인 1971년은 바로 37년 전. 먹을 것이 없어 산에 있는 소나무 줄기를 빨아 먹었던 아버지, 어머니 세대들의 헌신이 2008년 지금 우리가 아파트 15평짜리 살면서도 자동차를 몰 수 있는 호사를 누리고 있고, 기절할 만큼 흥청망청 먹어댈 수 있는 밑바탕이 된 것이다.

신촌 근처 나이트 클럽. 21세기 20대는 ‘애국심과 가족의 생계를 책임진다!’는 것은 사치가 됐다. 필이 통하면 ‘하룻밤 섹스를 나눌 수 있다는 one night stand’를 즐기는 청춘들이여! 그대들이 지금 모텔에서 찰나적인 쾌락을 즐기고 있을 나이에 아버지 세대들은 여성 팬티 한 장에 목숨을 의존하면서 밤하늘 별을 바라보면서 마스터베이션을 했고, 어머니 세대 순이는 사랑한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홀연히 베트남을 찾아가는 순정(純情)’을 갖고 있었다.

전쟁, 사람 그리고 사랑, 오래도록 기억될 감동

원래 본인은 광고 선전물은 99% 믿지 않고 있다. 하지만 <님은 먼곳에>가 내걸고 있는 메인 광고문구(main advertizing copy)는 이 영화가 어느 때보다 팍팍한 2008년을 살아가는 장년층들에게는 ‘지나온 세월에 대한 아련한 향수와 미치도록 그리운 그 시절 추억의 편린(片鱗)’을 떠올려 줄 것이다.

상영시간 126분. 초반에 고부간의 갈등을 묘사하는 부분이 다소 늘어지는 것만 빼놓고는 전혀 지루하지 않다. 15세 관람가. 고등학생 조카, 침대에서 등을 돌리고 자거나 각방을 쓰고 있는 위기 상황의 부부들, 그리고 베트남에서 청춘을 불태웠던 흔적을 갖고 있는 장년층들이여! 티켓을 끓으시라! 순이의 사연은 7월 24일 시작된다.


<추신>

1. 라스트에서 매몰차게 남편 상길(엄태웅)의 따귀를 때리는 순이의 모습. 서서히 흘러내리는 눈물. 여자 복이 지지리도 없는 처지와 연출자의 내공은 나로 하여금 그 장면에서 눈물짓게 만들었다.

2. 뉴요커 우디 알렌. 미아 페로우, 다이안 레인 등을 거치는 그의 바람기를 잠재운 것도 한국 입양아 순이다. 온갖 구박에도 묵묵히 지어미 역할을 해내고 목숨이 경각에 달려 있는 베트남 현지에서 여자에 굶주려 있는 수컷 병사들을 달래 주는 순이. 남편에 대한 절대 복종을 뜻했던 순이는 이제 어머니 세대와 함께 영원히 우리 곁에서 사라질 것이다.

3. 땡땡이 브라우스에 통큰 반바지 차림의 순이. 써니로 변신한 그녀는 파월 한국군 장병위문단 공연장에서는 두줄 끈으로 묶은 붉은 망사 핫 슈트를 착용하고 ‘울릉도 트위스트’, ‘월남에서 돌아온 김상사’, ‘간다고 하지 마오’를 열창한다. 이어 미군 장병들을 대상으로 공연장에서는 코미디언 이주일 선생을 떠올려주는 명곡 ‘Suzie Q’를 육감적으로 열창한다. 섹시함이 철철 묻어 나는 배우 수애. 여자의 변신은 무죄라는 속설을 반추시켜주고 있다.

4. 미군장병 위문공연을 통해 알게 된 중대장을 찾아간 써니. 행방불명된 남편을 찾아달라고 통사정을 한다. 그리고 위스키를 따른다. 두 사람만 있는 방. 미군 중대장이 마른 침을 삼킨다. 써니와 동행한 용득(정경호). 그는 밖에 놓여 있는 의자에 머리를 묻고 괴로워하고 있다. 써니가 남편을 찾기 위해 군부대 중간 장교에게 성적 향응을 제공했다는 암시를 보여주는 장면. 전쟁영화 속에서 이토록 간접적으로, 그렇지만 처연(悽然)한 심정을 불러일으킨 ‘남녀상열지사를 묘사한 장면’은 보기 드물다. 이준익 센스쟁이!.

5. ‘아카데미상은 미국의 문화 제국주의를 팽창시키고 유지시키기 위한 수단이다. 칸 영화제 역시 프랑스 문화 제국주의를 지탱하는 수단이다. 우리가 왜 거기에 가서 줄을 서야 하는지 모르겠고 또 자존심 상하는 문제다’. 2006년 10월 17일. <왕의 남자>가 아카데미 한국대표로 출품된다는 것에 대해 당사자 이준익은 부산국제영화제에에서 젊은 관객과 가진 대화 중 일부이다.

본인은 1994년 동양인 기자로는 최초로 2,500페이지짜리 ‘아카데미 어워드 65년사’를 출간했다. 당시 이 뉴스를 접하고 이준익에게 ‘아카데미에 대해 좀 알고 떠들어라!, 철부지 젊은이들에게 아부성 발언을 하지 말라!’는 취지의 장문의 기사를 쓴 적이 있다. 하지만 <님은 먼곳에>를 관람하고 이런 앙금을 흔쾌히 털어냈다. 그는 상업영화의 속성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기 때문에 앞으로의 행보에 대해서도 아낌없는 응원의 메시지를 보낼 것이다.

6. 미군에게 포로로 잡힌 뒤 ‘성조기여 영원하라’는 열창하고 콩글리쉬로 써니와 밴드 멤버를 이끌어 나가는 정진영. 출연작 편수는 많았지만 별다른 개성을 보여주지 못했다. 그는 이번 영화로 확실한 자기 칼라를 찾았다고 본다. 적절한 소금기를 드러내 준 주연급 조역은 이 영화에 대한 감흥을 증폭시켜준 최고의 어시스트이며, 극한 상황 속에서 팝송 한 두곡은 타인에 대한 경계심을 단번에 풀어 버릴 수 있는 효과적인 수단이라는 처세술을 일깨워 주었다.

7. 라스트 엔딩곡 ‘님은 먼곳에’는 ‘수애 버전’이다. 영화를 위해 특별히 편곡시켜 취입했다는 거미 버전은 2008년 불황 가요계에 단비가 내릴 히트곡이 될 듯 싶다. 조관우와 중국 가수 장육항, 고병희, 임희숙, 임주리, 박정현(영어 버전), 김난영(트로트 버전) 것 모두 좋다. Nicole Fleig가 영어로 번안한 ‘You So Far Away’도 역시 good이다.

8. 7월 8일 시사장인 서울극장을 나와 종로 3가역 지하철로 향하는데 등 뒤로 따라 오던 젊은 커플기자가 ‘기대 만큼 재미없다!’라는 시큰둥한 소리가 귀청을 때린다. ‘세상은 내가 아는 만큼만 보이는 법이네’라는 말을 해주고 싶었지만 자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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