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료사고 원인규명 더 큰 고통

피해자 늘지만 병원정보 공개 꺼려 구제도 힘들어

예상치 못한 의료사고로 가족을 잃은 사람들이 사인이라도 알고 싶어 병원과 의사에게

협조를 구하지만 진료정보 공개를 꺼리는 의료계의 폐쇄성 때문에 사인 규명을 포기하는

사례가 적지 않다.

억울한 마음에 병원을 상대로 소송을 내더라도 증거나 증인확보가 어렵기 때문에

중간에 포기하기도 하고 좀처럼 끝이 보이지 않는 소송에 매달려 생업에 어려움을

겪기도 한다.

의료소비자시민연대(이하 의시연)가 지난해 5~12월까지 의료사고 당사자와 그

가족을 대상으로 설문조사를 실시한 결과 병원과 의사의 협조 부족으로 의무기록

확보에 어려움을 겪은 환자가 41.1%나 됐다. 의무기록을 확보하더라도 기록을 신뢰할

수 없거나 영어로 알아보기 힘들게 흘려 쓴 의료전문용어를 번안하기도 어려워 피해자들은

사고 후 대응에 어려움을 겪고 있는 것으로 드러났다.

의시연 강태언 사무총장은 “의료사고로 매년 1만∼2만7000명이 사망하는 것으로

추산된다”며 “많은 사람들이 의료사고를 당하고도 진료 정보 공개를 꺼리는 의료계의

폐쇄성 때문에 증거 확보가 힘들어 대응할 방법을 찾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라고

말했다.

의시연은 지난달 ‘의료사고 의료상담에 대한 실태조사’ 발표에서 인터넷과 전화를

통해 접수한 의료사고 상담건수는 2003년부터 작년까지 5년간 총 7,977건인 것으로

집계됐다고 밝혔다.

상담이 진행된 2600건의 실태조사를 분석한 결과 의료사고 유형은

부작용이 발생하거나 병이 더 악화된 경우가 64.7%(1,163건)으로 가장 많았으며 사망한

사례도 14.5%(261건)나 됐다. 장애 및 추정장애로 진단받은 경우는 15.5%(278건)였다.

▽의료분쟁 사례

△ 사례1. 2007년 3월 아빠가 될 꿈에 젖어 있던 이학권(39ㆍ대구 달서구) 씨는

손꼽아 기다리던 아이를 품에 한번 안아보지도 못한 채 떠나보내야 했다. 이 씨의

부인은 진료 받아온 병원에서 받아야 한다는 산전검사는 꼬박꼬박 날짜 한번 어기지

않고 다 받았고 그 결과 아무 이상 없다기에 안심하고 있었다. 하지만 출산을 하러

병원에 간 날 부인은 제대로 된 진료도 받지 못한 채 방치됐고 뱃속에서 있던 아기가

갑자기 숨을 쉬지 못해 사망해 버린 것이다. 수술실 한 구석 허름한 라면상자 안에

죽은 채 버려져 있는 자신의 아기를 본 이 씨는 세상이 무너져 내리는 심정을 느꼈다.

이 씨는 “죽은 아기라 해도 상자에 버려 둔 것을 보고 지울 수 없는 상처를 입었고

증거로 남기기 위해 사진을 찍어뒀다”며 “병원에서 태아와 산모에 대한 체크를

제대로 해 문제를 빨리 발견했다면 아기가 살 수 있었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사례2. 이곤우(48ㆍ경기도 평택시) 씨의 아버지는 2006년 5월 한 대학병원에서

간이식 수술 후 무균실에서 회복치료를 받다가 1주일 만에 원인모를 과다출혈로 사망했다.

KBS1TV의 ‘사랑의 리퀘스트’에 사연을 보냈다가 채택돼 얻은 기회로 간이식수술

권위자를 찾아가 받은 수술이었기에 이 씨의 안타까움은 더했다. 게다가 출혈이 일어났을

때 해당 병원 의료진들이 가족의 동의 없이 출혈이 일어난 비장을 제거하는 수술을

한 것이 나중에 밝혀져 이 씨는 증거를 인멸하기 위해 없애버린 것 아닌가 하는 의구심이

들었다. 가족들은 사망 원인을 밝히기 위해 부검을 의뢰하고 일손을 놓은 채 결과가

나오길 기다렸다. 하지만 결과가 나오는데 1년 8개월이 걸렸고 정확한 이유도 밝혀지지

않았다.

△사례3. 윤여옥(39ㆍ대전 유성구) 씨의 어머니는 2006년 1월 한 대학병원에서

허리디스크수술을 받고 난 3일 후 갑자기 사망했다. 불편한 허리 외에는 건강에 이상이

없던 어머니가 디스크수술 때문에 사망한 것은 의료진이 잘못한 것이라고 판단한

윤 씨는 간호사가 들고 있던 의료기록차트를 빼앗아 집에 숨겨뒀다. 현재 형사소송을

진행 중이지만 1심에선 무죄 판결이 나왔다. 의료진의 잘못을 증명하기 힘들었고

의시연의 도움으로 알게 돼 의무기록을 번안해준 증인도 바쁘다는 이유로 법원에

오지 못했다. 오는 26일 나올 2심 결과를 기다리고 있다.

▽증거와 증인확보

의료사고 피해자들은 증거와 증인 확보, 의무기록 번안의 문제 등으로 사고의

원인을 밝히는 데 큰 어려움을 겪고 있다고 호소한다.

이학권 씨는 출산 직전 영아가 사망하는 경우가 많고 그 원인을 밝히기 힘들다는

사실을 알고 병원을 상대로 소송을 진행하려다 포기했다.

이 씨는 “의무기록을 우리가 봐서 뭘 알 수 있겠냐”며 “인터넷으로 나와 같은

사연이 있는지 검색해봤더니 산부인과에서 출산을 기다리다 원인 모르게 죽은 아기

때문에 억울해하는 사람들이 너무 많아 답답했다”고 말했다.

형사소송을 진행 중인 윤여옥 씨도 “의료사고를 일으킨 의사도 바쁘다는 이유로

아무리 기다려도 법원에 출두하지 않았다”며 “의료지식이 없는 일반 사람들은 소송을

하는 데 어려움이 너무 많다”고 했다.

병원을 상대로 소송을 준비 중인 이곤우 씨는 “의료법에 대해 제대로 물어볼

곳도, 도움을 요청할 곳도 없었다”며 “진료 정보를 알고 싶어도 그럴 수 없어 피해자를

지치게 만드는 우리나라의 현실이 원망스럽다”고 목소리 높였다.

▽ 의료사고 구제 정책과 기관  

의시연의 조사에 따르면 의료사고 피해자들은 의료사고를 줄이기 위해 우선돼야

할 사항으로 ‘의료안전사고 예방을 위한 관련 법제도 정비’를 꼽았으며 그 중에서도

‘피해구제를 위한 법제화’가 가장 절실하다고 답했다.

이와 관련, 보건의료 시민단체들은 이달 임시국회에서 20여 년 동안 입법이 추진돼

온 ‘의료사고피해구제법안’이 하루빨리 통과돼야한다고 주장한다. 이 법안은 현재

의료사고 발생 시 사고 원인을 피해자가 입증해야 하는 것을 의사가 입증책임 지도록

하는 것을 뼈대로 한다.

의료계에서는 의료인에게 과실이 없음을 입증하도록 할 경우 소송에 휘말리지

않기 위한 방어 진료 현상이 일어날 우려가 있다고 주장하고 있어 의료소비자와 의료계

간 입장차를 좁히지 못하고 있다.

서울의 한 대학병원의 정형외과 교수는 “의술은 사람이 사람을 치료하는 것이기

때문에 생각지 못한 변수가 많을 수밖에 없어 의료사고에 대해 정확히 규정하는 것은

힘들다”며 “의료사고의 과실을 의사가 입증하게 되면 의사는 소송 때문에 다른

환자들의 수술도, 치료도 못 하게 된다”고 밝혔다.   

의료소비자시민연대 이인재 자문위원장(변호사)은 “증거불충분, 입증의 어려움

등을 이유로 소송이 기각되거나 소송 중 포기하는 경우가 점점 늘고 있다”며 “의료지식이

부족한 피해자들을 도울 수 있는 정책이나 강제력 있는 기관이 설치돼야 한다”고

주장했다.

 

 

 

    안세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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