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 돌보미 없어 간호사 사직한다는데…

1991년 3월 연세의료원 세브란스병원에 간호, 약제, 의무기록, 영양, 의공학 등 5개 진료지원부서를 담당하는 ‘진료지원 부원장’ 제도가 새로 생겼고, 필자가 임명됐다. 필자는 1982년 존스홉킨스대에서 박사학위를 마치고 귀국했는데, 이듬해에 병원 부원장 제안을 받았지만, 교육과 연구에 집중한다며

美 존스홉킨스대, 한국 의료보험 배우려고…

1977년 국민소득 1000달러, 수출 100억 달러의 제4차 5개년계획 목표가 조기 달성됐다. 1980년대는 비로소 농업국가에서 공업국가로 변모했으며, 북한과의 체제 경쟁에서도 경제적으로 앞서가기 시작했다. 우리나라 보건의료의 국제 활동도 활발해졌다. 해방 후 국제 보건 무대에 씨앗을 뿌린 선각자

70년대 화장지 없는 화장실은 어떻게 바뀌었나

1967년 미국의 세계 1위 제지회사 킴벌리-클라크 사의 임원이 주한 미국대사관을 방문, 한국 진출을 타진했다. 대사관 직원은 한국의 경제사정과 생활문화 등을 알려주면서 부정적 의견을 내비쳤다. 그러면서 “그래도 미래를 보고 투자한다면 유한양행이 그나마 파트너가 될 수는 있을 것”이라고 알려줬다.

은행은 어떻게 병원으로 들어갔나?

1970년대에만 해도 병원 안에 ATM은커녕, 은행 지점도 없었다. 서울 서대문구 신촌로타리에 유일하게 한일은행(현 우리은행) 신촌지점이 있었는데 연세대 교직원과 학생, 세브란스병원 직원, 그리고 병원 입원환자 또는 보호자가 은행을 이용하려면 신촌로타리까지 20~30분을 부지런히 걸어가야 했다. 필

한국이 ‘바퀴벌레 천국’에서 벗어나기 시작한 때는?

1986년 12월 말 미국 볼티모어의 존스홉킨스 보건대학원에 강의하러 갔다. 동료 교수들을 만나러 휴게실에 갔다가 우연히 경제잡지 《포브스(Forbes)》에 그해 10대 상품이 소개된 것을 봤다. 그 가운데 바퀴벌레 퇴치 약 ‘컴배트’가 있었기에 자세히 살펴보았다. 나중에 친구와 선후배들이 오자,

대학병원 청소를 총무과 직원이 돌아가며 했다?

1980년 즈음 정부가 병원시설을 확충하려고 재정차관 제도를 채택해 전국에서 50개 병원이 문을 열었다. 이 가운데 공업지역에 있던 마산 고려병원과 부산 인제백병원은 의료수요가 풍부해 잘 운영됐다. 그러나 나머지 병원들은 대부분 병원의 위치가 부적합하거나 병원경영 능력 없이 주먹구구로 운영했다. 환자도

의료서비스 품질 얘기하면 욕먹은 까닭

1977년에 국민소득 1000달러 목표가 달성됐고, 당연 적용 의료보험이 출범했다. 의료 서비스의 수요가 증가하기 시작했고, 공급도 따라서 증가했다. 의료서비스에 대한 국민 의식의 변화가 눈에 보이기 시작한 것이다. 이에 따라 1980년대에는 아프면 약국이나 약방을 드나들던 시대에서 병의원에 진료받

1980년대 강남 논밭에 대학병원 들어선 사연

서울특별시는 1970년 전후로 농촌 지역이었던, 한강 남쪽을 개발하기 시작했다. 1965년 제2한강교(현 양화대교)에 이어 1969년 제3한강교(현 한남대교)가 개통됐지만 이때만 해도 한강 다리들은 각각 공장지역인 영등포와 지방을 잇기 위한 수단으로 보였다. 지금의 ‘강남 시대’는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70년대에 휠체어 타고 장애인 치료한 여의사

한국은 장애인이 행복한 사회라고 말할 수는 없지만, 장애인 복지가 급속하게 발전한 나라라고 할 수 있다. 1980년대까지만 해도 장애인에 대한 정부 재정 지원이 별로 없었기에 기독교 등 종교단체와 일부 사회단체가 장애인을 돌보는 역할을 했다. 1990년대 후반에 소득 1만 달러 시대가 되면서 일부 지방자

의사 부족하니 의대 설립?...교수도 없는데

1950년대 의과대학은 서울 5개와 경북, 전남, 부산 각 1개로 총 8개였다. 1965년부터 3년 동안 4개가 신설됐으며 1970년대에 7개가 추가됐다. 1980년대에 12개가 새로 출범해 모두 31개가 됐다. 1990년대에는 10개 대학이 신설돼 의대가 총 41개다. 이후 현재까지 신설 의과대학은 없