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병원 청소를 총무과 직원이 돌아가며 했다?

[유승흠의 대한민국의료실록] (32)1980년대 병원 경영

[사진=게티이미지뱅크]
1980년 즈음 정부가 병원시설을 확충하려고 재정차관 제도를 채택해 전국에서 50개 병원이 문을 열었다. 이 가운데 공업지역에 있던 마산 고려병원과 부산 인제백병원은 의료수요가 풍부해 잘 운영됐다. 그러나 나머지 병원들은 대부분 병원의 위치가 부적합하거나 병원경영 능력 없이 주먹구구로 운영했다. 환자도 적고, 대중교통도 원활하지 않기에 결국 자본잠식이 됐다.

이와 함께 대형 병원들이 속속 생기면서 중소 규모의 병원에서 경력을 가진 인력이 스카웃되는 경우가 흔하여 수많은 지방 병원은 존립이 위태위태하였다.

이에 앞서 1976년 미국의 의료정책이 바뀌어서 미국으로 수련을 받으러 갈 수 없게 됐다. 이에 따라 우리나라 의사가 미국에서 전공의 수련을 받고 귀국해 국 복무를 할 수 있는 제도(Kim’s Plan)가 중단됐다. 의사들의 인턴 수련에 문제가 생겼고, 사회 문제로도 부각돼 국회(의장 정일권) 본회의에서 거론될 정도였다. 미국에서 수련을 받고 정착하는 ‘의사 이민’에도 제동이 걸렸다.

의과대학이 신, 증설해서 의사들이 늘어나고 의사의 미국 이민이 막히다보니 군의관 인력 과잉 문제도 대두됐다. 공군본부 의무과장으로 근무하던 필자는 국방부 의무국과 보건사회부 의정국 국장, 과장들과 군의관 인력 과잉 대책을 건의하였지만 담당 공무원들은 당면 과제에 집중할 뿐이었다.

1979년 실시된 ‘농어촌지역보건의료특별법(농특법)’의 공중보건의사 제도는 이런 여러 문제를 한꺼번에 해결한 묘수였다. 1981년부터 전국에 배치된 공중보건의는 병역 의무 대신에 3년 동안 보건의료 취약지구에서 근무했는데, 의사를 구하기 힘든 지방병원과 공공병원은 공중보건의를 배정받게 되어 한숨을 돌리게 되었다.

그러나 취약한 병원경영으로 인한 병원경영 문제를 막을 수는 없었다. 병원은 규모가 작을 때에는 원장이 병원관리를 관장하지만, 여기까지다. 1980년대 초에는 지방 별로 유명한 병원들이 200병상 전후였는데, 경영이 원만했다. 그런데 의료수요가 증가되고 병원 규모가 커지면서 경영이 어려워지고, 문제가 발생하기 시작해 병원 경영자들이 고민하게 되었다.

필자는 미국에서 공부한 병원경영을 참고해서 기회가 있을 때마다 병원장들에게 인사 및 조직관리, 업무 전산화, 청소와 세탁의 외주, 주차관리, 간병 문화 개선 등 다양한 영역에서 개선을 제안하였다.

당시 병원에서 청소를 전담하는 부서에 전문 인력이 없으므로 총무과 소속 직원이 청소를 담당했다. 병원 감염에 대비해 소독도 해야 할 터인데, 빗자루로 먼지를 쓸어 담는 수준이었다. 필자는 청소를 전문화하는 회사를 만들자는 제안을 병원협회에 했다. 보건사회부 의정국장을 거쳐 1981년부터 3년 간 국립중앙의료원 원장을 맡았던 장경식 원장은 청소업무를 외주제로 전환하였기에 국립중앙의료원 노조활동으로 인한 경영 어려움을 극복하는데 도움이 되었다.

세탁도 문제였다. 각종 세탁물을 세탁기를 돌려서 했는데 세탁물 말리기가 쉽지 않았다. 아울러 세탁물을 분리해 위생적으로 보관하는 것도 문제였다. 병원들이 투자하여 세탁회사를 만들면 어떻겠느냐는 제안도 하였다.

1984년에 세브란스병원 외래환자 접수업무와 관련하여 초보적인 전산화를 제안했다. 당시에 외래환자가 병원에 와서 접수등록을 하면, 직원들이 환자 등록 사항을 외래진료실들로 보냈다. 진료실 직원들은 각각 의무기록실에 가서 기다리다가 담당진료실 환자의 의무기록을 받아서 진료실에 가지고 돌아온다. 외래진료실마다 보조원들이 배치됐기에 30여명이 이 일을 수행했다.

이에 필자는 원무과장, 의무기록실장과 같이 외래환자가 진료 접수할 때, 접수담당자가 직접 의무기록실에 환자 등록사항을 통보하고, 의무기록실 직원이 의무기록을 찾아서 해당 외래진료실에 배송하도록 제안했다.

외래진료실 업무는 간호사가 담당하는데, 보조원이 불필요하게 되었다. 이에 의무기록을 해당 진료실에 전달하는, 업무량이 증가된 의무기록실에 5명을 근무하게 하였고, 25명은 보조인력이 부족한 부서로 옮겼다.

필자는 86아시안게임과 88올림픽 의무지원시스템 담당 프로젝트 책임자로서 전자의무기록(EMR)을 개발한 바 있다. 1992년에 세브란스병원 진료지원부서를 담당하는 부원장이 되었는데, 전자의무기록 시스템 설치를 제안하였다. 그러나 이를 위해 전자의무기록 담당 직원을 외래진료실과 병실마다 배치하여야 한다는 의견들이 있었다. 그래서 일단 필자의 동기와 후배들이 ‘주력 의사’였던 심장혈관병원에서 먼저 실시했는데, 이 병원에서는 의무기록을 필기하지 않고 컴퓨터로 하니까 편리하다고 좋아했다. 시행 2개월 지나니까 편리하다고 소문이 나서 병원 전체로 확산하였다. 국내에서 최초로 전자의무기록제도를 도입 운영한 것이다.

서울아산병원의 자문위원을 맡았던 필자가 민병철 원장에게 전자의무기록에 대해 알렸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세브란스병원과 비슷한 시기에 EMR 시스템을 채택, 운영했다.

    유승흠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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