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병원 청소를 총무과 직원이 돌아가며 했다?

1980년 즈음 정부가 병원시설을 확충하려고 재정차관 제도를 채택해 전국에서 50개 병원이 문을 열었다. 이 가운데 공업지역에 있던 마산 고려병원과 부산 인제백병원은 의료수요가 풍부해 잘 운영됐다. 그러나 나머지 병원들은 대부분 병원의 위치가 부적합하거나 병원경영 능력 없이 주먹구구로 운영했다. 환자도

의료서비스 품질 얘기하면 욕먹은 까닭

1977년에 국민소득 1000달러 목표가 달성됐고, 당연 적용 의료보험이 출범했다. 의료 서비스의 수요가 증가하기 시작했고, 공급도 따라서 증가했다. 의료서비스에 대한 국민 의식의 변화가 눈에 보이기 시작한 것이다. 이에 따라 1980년대에는 아프면 약국이나 약방을 드나들던 시대에서 병의원에 진료받

1980년대 강남 논밭에 대학병원 들어선 사연

서울특별시는 1970년 전후로 농촌 지역이었던, 한강 남쪽을 개발하기 시작했다. 1965년 제2한강교(현 양화대교)에 이어 1969년 제3한강교(현 한남대교)가 개통됐지만 이때만 해도 한강 다리들은 각각 공장지역인 영등포와 지방을 잇기 위한 수단으로 보였다. 지금의 ‘강남 시대’는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70년대에 휠체어 타고 장애인 치료한 여의사

한국은 장애인이 행복한 사회라고 말할 수는 없지만, 장애인 복지가 급속하게 발전한 나라라고 할 수 있다. 1980년대까지만 해도 장애인에 대한 정부 재정 지원이 별로 없었기에 기독교 등 종교단체와 일부 사회단체가 장애인을 돌보는 역할을 했다. 1990년대 후반에 소득 1만 달러 시대가 되면서 일부 지방자

의사 부족하니 의대 설립?...교수도 없는데

1950년대 의과대학은 서울 5개와 경북, 전남, 부산 각 1개로 총 8개였다. 1965년부터 3년 동안 4개가 신설됐으며 1970년대에 7개가 추가됐다. 1980년대에 12개가 새로 출범해 모두 31개가 됐다. 1990년대에는 10개 대학이 신설돼 의대가 총 41개다. 이후 현재까지 신설 의과대학은 없

한국 의대 교수가 미국 담배회사의 협박을 받은 사연

1987년 연말 즈음에 미국 담배회사에서 제조하는 담배가 포장은 미국과 한국이 같은데, 타르와 니코틴 레벨은 한국에서 판매하는 제품이 미국 판매제품의 2배 수준이라는 사실을 알게 됐다. 필자는 담배를 전혀 피지 않으므로 왜 그런지 궁금해 동료들에게 문의했다. 니코틴 레벨이 높으면 흡연할 때 더 좋게

우리나라 병원들, 떼돈 번다고?

1977년 소득 1000 달러와 수출 100억 달러가 실현되면서 당연적용 의료보험이 시작했다. 이 해부터 펼쳐진 제4차 경제개발 5개년계획에서는 지향하는 범위가 경제발전에서 경제사회발전으로 넓혀져 우리나라 경제사회를 크게 변화시켰다. 특히 의료 분야에선 아프면 약국에서 약을 사 먹던 시절에서 병의원에 가

88올림픽 때 수입 美 응급차, 방치된 뜻밖 이유?

우리나라에서 1986년과 1988년 각각 아시안게임과 올림픽을 처음 개최하게 돼 조직위원회를 구성했다. 보건사회부(현 보건복지부)에서는 엄영진 과장이 파견됐다. 필자와 같은 또래이고, 종종 이야기를 나누는 엄 과장은 전혀 모르는 업무에 차출돼 걱정어린 얼굴이었다. 아무 것도 모르는데 파견되었으니 큰

콜레라 예방접종서 없으면 출국 못했던 까닭?

1980년 9월 연세대 의대 예방의학과 김일순 교수 연구실로 보건복지부 라도헌 차관으로부터 전화가 왔다. 김 교수가 외국 출장 중이라 전임강사인 필자가 전화를 받았는데 “왜 찾으시냐?”고 물었더니 콜레라 방역에 인력이 필요하다고 했다. 지금은 콜레라가 잊힌 병이 됐지만, 당시만 해도 콜레라가 발생하

봄가을 하루씩 교실에서 ‘구수한 냄새’ 진동한 까닭

1970, 80년대 생활의 큰 변화 중 하나가 기생충 감염이 사라지게 된 것이다. 농어촌 주민이 도시 인구보다 훨씬 많던 때에 대부분 국민이 기생충에 감염되므로 봄과 가을에 기생충 약을 복용하는 것이 상식이었다. 인분을 채소에 비료로 주었기에 기생충 알을 자연스럽게 음식과 함께 먹게 되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