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사 부족하니 의대 설립?...교수도 없는데

1950년대 의과대학은 서울 5개와 경북, 전남, 부산 각 1개로 총 8개였다. 1965년부터 3년 동안 4개가 신설됐으며 1970년대에 7개가 추가됐다. 1980년대에 12개가 새로 출범해 모두 31개가 됐다. 1990년대에는 10개 대학이 신설돼 의대가 총 41개다. 이후 현재까지 신설 의과대학은 없

한국 의대 교수가 미국 담배회사의 협박을 받은 사연

1987년 연말 즈음에 미국 담배회사에서 제조하는 담배가 포장은 미국과 한국이 같은데, 타르와 니코틴 레벨은 한국에서 판매하는 제품이 미국 판매제품의 2배 수준이라는 사실을 알게 됐다. 필자는 담배를 전혀 피지 않으므로 왜 그런지 궁금해 동료들에게 문의했다. 니코틴 레벨이 높으면 흡연할 때 더 좋게

우리나라 병원들, 떼돈 번다고?

1977년 소득 1000 달러와 수출 100억 달러가 실현되면서 당연적용 의료보험이 시작했다. 이 해부터 펼쳐진 제4차 경제개발 5개년계획에서는 지향하는 범위가 경제발전에서 경제사회발전으로 넓혀져 우리나라 경제사회를 크게 변화시켰다. 특히 의료 분야에선 아프면 약국에서 약을 사 먹던 시절에서 병의원에 가

88올림픽 때 수입 美 응급차, 방치된 뜻밖 이유?

우리나라에서 1986년과 1988년 각각 아시안게임과 올림픽을 처음 개최하게 돼 조직위원회를 구성했다. 보건사회부(현 보건복지부)에서는 엄영진 과장이 파견됐다. 필자와 같은 또래이고, 종종 이야기를 나누는 엄 과장은 전혀 모르는 업무에 차출돼 걱정어린 얼굴이었다. 아무 것도 모르는데 파견되었으니 큰

콜레라 예방접종서 없으면 출국 못했던 까닭?

1980년 9월 연세대 의대 예방의학과 김일순 교수 연구실로 보건복지부 라도헌 차관으로부터 전화가 왔다. 김 교수가 외국 출장 중이라 전임강사인 필자가 전화를 받았는데 “왜 찾으시냐?”고 물었더니 콜레라 방역에 인력이 필요하다고 했다. 지금은 콜레라가 잊힌 병이 됐지만, 당시만 해도 콜레라가 발생하

봄가을 하루씩 교실에서 ‘구수한 냄새’ 진동한 까닭

1970, 80년대 생활의 큰 변화 중 하나가 기생충 감염이 사라지게 된 것이다. 농어촌 주민이 도시 인구보다 훨씬 많던 때에 대부분 국민이 기생충에 감염되므로 봄과 가을에 기생충 약을 복용하는 것이 상식이었다. 인분을 채소에 비료로 주었기에 기생충 알을 자연스럽게 음식과 함께 먹게 되었던 것이다

왜 집 대신 병원에서 장례를 치르게 됐을까?

옛날부터 집에서 숨을 거두는 것이 기본이었고, 집에서 숨지지 못하는 것을 객사(客死)라고 해 끔찍한 불운, 불행으로 여겼다. 상대방에게 객사하라고 퍼붓는 것은 최악의 저주이자 욕이었다. 객사를 피하려고, 병원 입원 중에 수명이 다 한 듯이 느껴지거나 주치의사가 가족에게 사망이 임박했음을 알리면 환자의 가

수필가와 사진작가로 발자취 남긴 의사들

현대사에서 문학과 사진에서 발자취를 남긴 의사가 적지 않으며 지금도 많은 의사들이 이 분야에서 활약하고 있다. 해방 이후 사진과 문학에서 직업인 못지않게 명성을 얻은 의사를 꼽으라면 수필 분야 최신해와 곤충사진의 이순흥을 들 수 있겠다. 삼락당(三樂堂) 최신해(1919~1991)는 부산에서 국어학자

의사들이 등잔·문화재 수집해 기부한 까닭?

영국박물관(대영박물관)은 1759년 내과의사 한스 슬론 경의 기증품을 바탕으로 세워졌고, 독일 젠켄베르크 자연사박물관은 1821년 내과의사 요한 크리스티앙 젠켄베르크 박사의 개인 수집품에서 비롯됐다. 서구의 귀족 의사처럼 거대한 부를 투자할 수는 없었지만, 우리나라 의사들도 자신의 모든 것을 바쳐

환자 진료하며 스포츠 진흥시킨 의사들

도쿄 올림픽에 이어서 패럴림픽이 감동의 여운을 전하고 있다. 스포츠는 승패 이상의 의미를 갖는, 세계 시민의 뜨거운 무대라는 것을 생생히 보여주며…. 그런데 우리나라 체육의 발전에 의사들이 선수들을 치료하는 조연뿐 아니라 스포츠 계를 이끈 주연으로서도 역할을 했다는 것을 아는 사람이 많지 않은 듯