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0년대에 휠체어 타고 장애인 치료한 여의사

[유승흠의 대한민국의료실록] (29)장애인 의료복지

1990년대 후반에 소득 1만 달러 시대가 되면서 일부 지방자치단체에서 장애인에 관심을 보이기 시작했다. [사진= 게티이미지뱅크]
한국은 장애인이 행복한 사회라고 말할 수는 없지만, 장애인 복지가 급속하게 발전한 나라라고 할 수 있다. 1980년대까지만 해도 장애인에 대한 정부 재정 지원이 별로 없었기에 기독교 등 종교단체와 일부 사회단체가 장애인을 돌보는 역할을 했다. 1990년대 후반에 소득 1만 달러 시대가 되면서 일부 지방자치단체에서 장애인에 관심을 보이기 시작했다. 이전에는 일부 선각자들이 편견과 싸우며 장애인을 돌봐야만 했다.

해방 정국에서부터 6.25 전쟁을 거치며 전투와 각종 사고로 인한 외상 부상자가 많이 생겼다. 소아마비를 비롯한 질병으로 인한 중증 장애인도 지속적으로 증가했다. 이런 와중에 1953년 4월 기독교세계봉사회(KCWS)가 세브란스병원에 의지부를, 대전의 절단자 직업보도원에 의수족부를 설치했다.

국내 첫 재활병원 세우다

문형남 교수는 당시로서는 드문, 휠체어를 탄 여의사였다. [사진=숙녀회보 웹진 제공]
1958년 미국연합장로교 선교사 에드워드 아담스의 노력으로 세브란스병원에 소아재활원이 세워졌고 안나 스콧이 초대 원장으로 취임했다. 이듬해 소아재활원 부속국민학교가 문을 열었다. 1964년 봄부터 연세의료원이 소아재활원과 부속국민학교를 운영했으며, 문교부는 소아재활원 부속국민학교를 인가했다. 그리고 대전에서 토리 선교사가 운영하던 의수족부를 연세의료원으로 이관했다. 이에 1980년대 말에는 소아재활원 및 부속국민학교를 포함하여 연세의료원 재활원이 본격 출범했다. 국내에서 통합적 재활 의료 시스템이 마련된 것이다.

1980년 독일 재건은행(KFW)이 차관사업을 제안했다. 연세의료원은 창립 100주년을 기념해 재활병원을 건립하는 계획을 세웠는데, 1983년 우리 정부가 독일 재정차관사업을 승인하여 연세의료원에 140병상 규모로 물리치료, 의수족부 제조 등을 아우르는 국내 최초의 재활병원이 건립됐다.

1971년 미국의 재활의학과 전문의 문형남이 연세대 의대 전임강사로 부임했다. 문 교수는 당시로서는 드문, 휠체어를 탄 여의사였다. 그는 1964년 연세대 의대를 졸업하고 미국에서 공부하다 교통사고를 당한 뒤 하반신 마비가 된 상태에서 자신이 치료받은 뉴욕 벨뷰병원에서 재활의학과 수련을 받고 전문의로 일하다 귀국했다. 그는 미국에서 직접 운전하던 장애인 전용 승용차를 가져왔지만, 관세가 엄청 나서 통관이 불가능했다. 이에 많은 사람들이 육영수 대통령 영부인에게 사정을 전해서 승용차를 들여올 수 있었다. 당시에 휠체어로 인도를 넘나들기가 무척 어려웠기 때문에 인도 턱을 넘나들 때에는 주변 사람들이 도와주곤 했다.

당시 대부분의 병원에서 장애인은 정형외과 의사들이 진료했다. 1953년 미국에서 정형외과 전문의로 활약하다가 귀국한 문병기 박사가 연세대 의대 교수로 재직했으며 1970년 이화여대가 부총장 제도를 만들었을 때 초대 부총장 겸 의료원장으로 임명됐다. 문 박사는 소아마비 환자 수술과 재활치료를 하면서 장애인을 돕는 활동을 열심히 했다. 1976년 신체장애자재활협회(현 한국장애인재활협회)를 창설해 장애인들을 열심히 도왔다.

1989년 문 박사는 출연을 주도해 사회복지법인 한국재활재단을 설립했다. 재단 이사진은 장기려 박사를 비롯하여 서울, 대구, 광주 등지의 원로 의사들로 이뤄졌는데 젊은 이사를 발탁하도록 해 40대인 필자가 설립이사가 돼 재활재단 상임이사로 4년을, 그리고 18년을 이사로서 장애인 지원을 위한 역할을 꾸준히 했다. 장애인에 관한 조사, 연구 홍보 및 교육을 실시하며, 각종 재활관계 사업과 활동이 원활히 수행될 수 있도록 지원하고 조정하여 장애인 복지 증진과 발전에 기여함을 목적으로 활발하게 활동했다.

재단은 출연 재산으로만 운영할 수 없었기에 수익사업이 불가피했다. 필자는 성탄카드와 연하장을 만들자고 제안했다. 당시에 1인당 200장은 보통이고, 중간 간부는 500장, 상급 간부는 1000~2000장을 우편 발송하던 때였기에 선배와 친구들에게 알려서 상당한 수입을 올렸다. 인쇄 회사도 매출이 늘어서 좋아하였다. 재활재단은 지금까지 꾸준하게 장애인을 위한 사업을 활발하게 펼치고 있다.

유한재단, 장애인 돕기 본보기 보이다

1970년대에 미국 존스홉킨스대에서 공부할 때 장애인이 휠체어를 타고 자연스럽게 인도로 오르고 내리는 것을 관찰했다. 자동차 유리창을 돌려서 여닫지 않고 보턴을 꾹 누르게 하는 것도 장애인을 위해 개발됐다는 것을 알고 가슴이 뭉클했다.

1981년 보건학 박사 학위를 받고 귀국해 3년 뒤 유한재단 이사로 선임됐다. 유한재단은 필자의 큰아버지인 유일한 박사가 1965년에 ‘유한 사회 및 교육 원조 신탁기금’을 기탁해 장학사업과 사회사업을 펼치다가 1970년에 법인인 유한재단을 설립했다.

필자는 이사회에 신체장애인을 위한 지원사업들을 제안했다. 유한재단은 장애인에 대한 깊은 관심을 갖고 이들이 정상적인 사회활동을 영위해 나갈 수 있도록 꾸준하게 지원했다. 한국장애자재활협회가 주관하는 ‘사랑의 손잡기 운동’을 지원했으며, 한국보이스카웃연맹의 장애인 청소년 돕기 행사인 ‘아구노리행사’를 후원하는 등 우리나라 기업으로선 선구적으로 장애인 지원을 이끌어왔다.

    유승흠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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