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서 옵트아웃 제도 가능할까?
장기기증 100만 명당 스페인 35명, 한국 3명
지난 1월 2일 숨진 프로복싱 선수 최요삼 씨가 6개의 장기를 떼어 6명의 생명을
살리고 떠났다. 그 후 장기기증 희망자가 늘어 1월에 6112명이 신규 등록, 지난해
같은 달 4529명에 비해 35% 가량 증가했다. 국립장기이식센터(KONOS)에 따르면 2007년
12월말 현재 장기이식을 기다리는 사람은 총 2만47명인데 12월에 뇌사해 장기를 기증한
사람은 148명으로 기증자가 턱없이 부족한 실정이다.
영국 고든 브라운 총리는 1월 13일 ‘옵트아웃(opt-out)’제도를 지지한다고 발표해
논란이 일었다. 장기기증자가 많은 유럽에서도 장기기증 활성화 문제는 총리가 나서야
할 만큼의 핫이슈인 셈이다.
장기 기증은 생명을 살리는 일이다. 장기기증으로 모든 병이 완쾌되는 것은 아니지만,
이 순간에도 장기를 이식받으면 살 수 있는 환자들이 병상에 누워 있다.
장기기증을 신청하려면 국립장기이식센터나 장기이식등록기관 등을 찾으면 된다.
장기등록기관은 전국에 병원이나 보건소, 구청, 시민단체 등 161개다.
관련 전문가들은 장기기증을 활성화하기 위해 국민에게 호소만 할 것이 아니라
제도를 정비해야 한다고 말한다. 장기기증자가 많아 장기이식이 원활히 이뤄지는
스페인, 미국의 사례를 통해 우리가 나아가야 할 방향에 대해 알아보자.
▽옵트아웃과 옵트인 제도
옵트아웃(opt-out)은 장기기증 ‘거부’ 의사를 밝히지 않았다면 기증 여부를
밝히지 않은 사람까지 잠재적 기증자로 추정해 죽은 후에 장기 적출이 가능하게 하는
제도다. 반대로 옵트인(opt-in)은 죽기 전에 기증 의사를 밝힌 사람만을 대상으로
장기 적출을 하는 제도다.
장기기증이 활성화된 오스트리아, 프랑스, 아르헨티나, 스페인, 벨기에 등은 ‘장기기증을
절대 거부한다’는 의사 표시가 없으면 장기기증 의사를 가진 것으로 보는 묵시적
동의의 옵트인 방식을 택하고 있다. 네덜란드의 경우 18세 이상 모든 국민에게 장기기증
동의 여부를 확인하고 있다. 물론 본인이 동의했더라도 가족이 반대한다면 장기를
적출할 수 없지만 유럽 국가에서 그런 일은 거의 없다.
이화여대 생명윤리법정책연구소 김명희 교수는 “우리나라는 중요한 결정에
가족이 많이 관여하지만 유럽 국가에서는 개인이 중심이 돼 가족이 개인의 의사에
반대하는 일이 좀처럼 없다”며 “나눔을 미덕으로 삼는 기부 문화가 정착돼 장기
기증률이 높다”고 설명했다.
김명희 교수는 “우리나라는 옵트인을 표방하고 있지만 실제로 옵트아웃이기도
하다”고 말했다. 죽기 전에 기증 의사를 밝혔더라도 가족이 반대해 무산되는 경우가
많고, 죽기 전에 의사 표시를 하지 않았음에도 가족이 원해 장기 기증을 하는 일도
있다는 것이다.
옵트아웃제를 바라보는 시각은 다양하다. 유럽 국가처럼 옵트아웃제를 도입해야
장기기증자가 늘어난다는 주장도 있지만 옵트아웃제는 무리라는 의견도 있다.
울산대 의대 서울아산병원 흉부외과 정철현 교수는 “국내 정서상 옵트아웃제를
실시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말했다.
‘신체발부 수지부모(身體髮膚受之父母)’로 대표되는 유교 문화의 전통 때문에
사람들이 장기 적출을 꺼려 기증 신청자가 적은데다 장기기증을 신청하더라도 막상
가족이 반대해 장기기증이 이뤄지지 않는 경우가 많다.
유럽 국가에서도 일부 환자 단체들은 옵트아웃제를 반대하고 있다. 영국의 일간지
가디언에 따르면 브라운 총리가 옵트아웃제를 지지한 후 영국의 한 국회의원은 "정부
당국이 '잠재적 기증자' 명단에서 기증 거부자를 제외하는 과정에 오류가 발생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한 환자 단체도 ‘환자들이 자신의 몸에 대해 가질 권리를
박탈하는 처사’라며 옵트아웃제 도입을 반대했다.
▽장기기증 관리와 적출기관
세계에서 장기이식이 가장 성공적으로 이뤄진다는 스페인은 국립장기이식관리센터에서
장기 기증과 이식을 권장하는 역할을 하고 있다. 뇌사자 발생 시 스페인의 장기기증률은
인구 100만 명당 35명으로, 미국의 25.5명, 프랑스의 22.2명, 이탈리아의 21명, 독일의
14.8명보다 많다. 한국의 경우 3.1명으로 이들 국가보다 매우
낮다.
‘장기구득관리제’는 스페인 장기이식에 핵심적인 역할을 하고 있다. 장기구득관리자는
중환자실에 뇌사자가 발생하면 기증이 가능한지를 확인한다. 의사가 뇌사를 진단할
때 장기구득관리자는 가족 면담을 통해 기증을 이끌어내고 이후에도 장기를 적출하고
이식하는 전반적인 관리를 한다.
미국은 민간기관인 UNOS(United Network for Organ Sharing)가 전국적인 장기이식망을
구성하고 각 지역단위 이식망이 정보를 교환하는데 도움을 준다. 장기적출은 OPO(Organ
Procurement Organization)란 비영리 민간단체가 담당한다. 뇌사자 발굴, 장기적출과
장기분배, 장기기증 홍보 등 장기이식 제반 업무를 수행한다. OPO는 운영형태에 따라
독립형 장기적출관리기관(IOPO)과 병원형 장기적출관리기관(HOPO)으로 구분한다.
우리나라 국립장기이식센터(KONOS)는 미국의 UNOS를 모델로 해 2000년 2월 설립됐다.
장기적출을 맡는 별도 기구는 없으나 전국을 3개 권역으로 나눠 장기적출의료기관을
선정해 병원형 장기적출관리기관(HOPO)의 업무를 수행하고 있다.
전문가들은 뇌사자를 전문적으로 관리할 수 있는 독립적인 장기적출관리기관을
만들 필요가 있다고 말한다.
한국보건사회연구원 한영자 연구위원은 “미국도 처음에는 병원형 장기적출기관에서
시작해 점차 발전하며 독립형 장기적출기관으로 발전했다”며 “당장은 어렵겠지만
뇌사자 수가 늘면 우리나라도 각 구역별로 나눠 독립형 장기적출기관을 설립해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관련 전문가들은 장기기증자 수를 늘리기 위해 작년 7월부터 시행하고 있는 운전면허증
장기기증 의사 표시제를 적극적으로 홍보하는 것도 필요하고 말한다. 운전면허증
장기기증 의사표시제는 운전면허증을 발급받을 때 장기기증 의사를 운전면허증에
표시하는 방법이다. 장기기증등록기관에 등록하는 방식보다 편리하고 나중에 장기기증여부를
확인하기도 쉬워 미국, 호주 등에서 많이 활용되고 있다. 우리나라의 경우 운전면허증에
장기 기증 표시를 하려면 절차가 복잡하고 까다로워 제대로 이용되지 않고 있다.
김명희 교수는 “미국에서는 운전면허증을 발급받을 때 적극적으로 홍보하는 것은
물론 반드시 장기기증 여부를 물어 보고 있다”며 “운전면허증 표시제만 잘 이용해도
장기기증을 하고 싶어도 절차가 까다로워 하지 못하는 이들을 이끌어낼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