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찰스 2세, 영국을 ‘홍차의 나라’로 진입시키다”

[차 권하는 의사 유영현의 1+1 이야기] ⑬ 찰스 왕과 차(茶)

지난 2022년 9월 8일, 찰스3세가 뒤늦게 영국 왕으로 즉위하자 ‘홍차의 나라’ 영국답게 대관식(Coronation) 기념행사에 맞춰 포트넘&매이슨과 트와이닝스 등 홍차 회사들이 대관식 특집 홍차를 출시하였다.

영국 동인도회사도 오랜 차 역사를 강조하면서 ‘코로네이션’ 기념 홍차를 내놨다. 그들은 찰스3세 아버지 필립공이 엘리자베스 여왕 대관식을 기념하여 스리랑카의 페드로 다원(茶園)에 손수 심었던 차 나무로 기념 홍차를 만들었다.

왼쪽은 2022년 영국 찰스3세 대관식 홍차, 오른쪽은 360년 전 챨스2세 대관식 연주 음반. [사진=유영현 제공]
영국 역사상 최고령인 73세 나이로 즉위했으나 찰스3세는 영국인 대다수의 축하를 받지는 못했다. 전 왕비 다이애나와의 불화, 아들 해리 왕자의 왕실과의 결별 선언 등으로 영국인들 인심을 완전히 잃은 찰스3세는 "왕실을 폐지하자"는 여론의 역풍을 초라하게 견뎌내어야 했다.

찰스3세 이전, 영국엔 두 명의 찰스 왕들이 있었다. 공교롭게도 그들이 재위하던 시절은 모두 영국 왕실이 통치 권력을 잃어가던 때였다.

의회와 갈등하던 찰스1세는 청교도혁명 후 1649년 처형되었다. 이후 약 10년간 크롬웰의 철권통치가 이어졌지만, 크롬웰 사후 이른바 ‘왕정복고’가 이루어졌다.

그렇게 찰스2세는 영국민의 열렬한 환영을 받으며 망명지에서 영국으로 돌아왔다. 대관식은 1661년 열렸다. 찰스2세 대관식은 홍차 대신 음악을 남겼다. 화려하고 권위 있는 대관식 음악은 지금도 음반이나 온라인 스트리밍으로 들을 수 있다.

그는 동생인 제임스 2세에게 왕위를 넘길 때까지 25년간 재위하였다. 하지만 그의 사후 3년째 영국은 명예혁명을 통하여 입헌군주국이 되었다.

유럽 '차의 역사'에서 영국이 네덜란드보다 늦은 이유

그에 앞서 찰스2세는 즉위 직후 1662년, 포르투갈 브라간사 왕가의 공주 카타리나(Catarina, 영국명 Catherine)와 미뤄뒀던 결혼식을 거행한다. 카타리나의 아버지와 찰스1세가 맺은 정략결혼 약속이 뒤늦게 지켜지게 되었다.

이 정략결혼을 위해 카타리나가 영국에 도착했을 때 그녀는 뒤에 제임스2세가 되는 시동생에게 "차를 마시게 해달라"고 요구한다. 이 한 마디는 영국인들에게 널리 퍼졌다.

영국이 아시아 경영에 가장 먼저 나서고도 차를 늦게 알게 된 이유 중 하나는 그들의 초기 아시아 경영이 인도에 집중되었기 때문이다. 이것도 역사적 산물이다.

인도는 아삼 지방에 대규모의 자생차 생산지를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19세기 이전 인도인들 대부분은 차를 마시지 않았기 때문에 영국인들은 인도 내 차나무의 존재를 알지 못하였다. 반면, 인도네시아와 일본으로 간 네덜란드인들은 중국차와 일본차를 접하게 되어 이들 차를 유럽으로 이미 수입하고 있었다.

또 다른 이유는 영국이 차 수입국 네덜란드와 무역 경쟁을 벌여 양국의 관계가 좋지 않았기 때문이다. 크롬웰은 생전에 네덜란드 배를 통한 수입을 금하였다.

크롬웰이 죽은 1658년에야 영국은 네덜란드로부터 차를 수입하기 시작하였다. 담배상이자 커피하우스를 운영하던 토마스 가웨이(Thomas Garway)가 영국 배를 이용하여 네덜란드가 가져온 차를 수입하였다. 이때부터 소수의 영국인들이 차를 마시기 시작한다.

브라간사 왕비 카타리나의 차 이야기 소문은 영국인의 차에 관한 관심을 한껏 고조시켰다. 망명지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차를 이미 접하였던 찰스2세도 왕비와 차를 즐길 준비가 되어 있었다.

왕비 카타리나의 차 취미가 불러온 대유행

그로부터 수년 후, 영국의 동인도회사가 네덜란드를 통하여 수입한 첫 번째 차가 영국에 도착하였다. 이중 상당량은 찰스2세와 왕비에게 바쳐졌지만, 영국민들에게도 차가 퍼져 나갔다. 찰스2세 재위 동안 차 무역의 초석이 놓인 셈이다.

그러나 찰스2세는 통치 기간 내내 중대한 위기를 계속 겪었다. 네덜란드와는 2차 및 3차 영란전쟁을 벌였다. 전쟁으로 해양강국으로 나가는 입지는 얻었으나, 전쟁에서 눈에 띄게 승리하지는 못하였다.

1664년에서 2년간 지속한 런던 페스트 대유행은 런던 인구 약 1/4을 앗아 갔다. 그 책임을 놓고 흉흉한 소문이 퍼졌다.

1666년에는 런던 대화재가 일어나 런던 시내 대부분이 전소되는 큰 재앙을 맞았다. 런던 대화재가 쥐와 벼룩을 태워 페스트를 잠재웠다는 해석도 있으나, 민심은 흉흉하였다. 찰스2세는 자신의 통치력에 불똥이 튈까 전전긍긍하며 특정 종교인들이나 특정 외국인에게 책임이 떠넘겨지는 상황을 내버려 두며 가까스로 위기를 넘겼다.

그러나 1675년. 찰스2세는 페스트나 런던 대화재에 비하면 사소해 보였지만 ‘커피하우스 폐쇄’라는 더 폭발력 있는 위험에 처하게 된다. 이땐 중동에서 시작된 커피하우스가 영국에서도 빠르게 퍼지던 시기였다.

17세기 영국의 문화 팬텀이 된 ‘커피하우스’

1650년께 옥스퍼드에 상륙한 커피하우스는 초기에는 커피를 마시는 곳이었지만 후에는 주로 차를 마시는 곳으로 바뀌었다. 그러면서 사회활동과 의사소통의 중심지가 되어갔다. 페스트 유행과 런던 대화재에 의한 인구 감소에도 불구하고 17세기 말에 런던의 커피하우스는 500개에 이를 정도로 확산하며 일종의 ‘문화 팬덤’이 되어갔다.

영국 커피하우스는 ‘1페니대학교’(One penny university)로도 불렸다. 1페니만 내고 커피 한 잔을 사서는 온종일 여기 앉아 고등교육 받은 신흥 지식인 계급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는 장소였다. 당시 커피하우스는 자연스럽게 정치·경제에 관한 토론과 함께 통치자에 대한 비판 장소가 되었다.

1675년 12월 29일, 찰스 2세는 “다수의 태만하고 게으른 불평분자들이 모여 악의와 중상모략이 혼재하는 커피하우스를 영원히 전면 폐쇄한다”라는 금지령을 발포한다. 한해가 끝나가는 세모(歲暮)에 떨어진 이 금지령에 영국인들은 강력히 저항하였다.

많은 시민이 거리로 나와 시위를 벌였으며, 다른 곳에 모여 정치적 논의를 이어갔다. 청원서도 작성되었다. 커피하우스 폐쇄가 의외로 강한 반발을 불러오자 찰스2세는 새해 벽두인 1676년 1월 8일, 폐쇄령을 서둘러 거두어들인다.

런던왕립학회, 그리니치천문대, 그리고 ‘홍차의 나라’

그에겐 다른 면모도 있다. 1662년 ‘런던왕립학회’를 공식 출범시켰다. 2년 전, 십여 명의 대표적인 학자들이 유용한 지식 축적을 장려하기 위하여 발족한 학회를 공식 승인한 것이다. 학회의 신조는 “누구의 말도 곧이곧대로 듣지 말라”(Nullius in Verve)였다. “실험으로 결정된 사실만 믿겠다”는 결의를 반영한다.

실험 관찰로 자연의 법칙을 알아내는 ‘귀납법’(歸納法)을 정립한 경험주의 철학자, 프랜시스 베이컨의 철학으로 무장한 런던왕립학회는 과학혁명기에 큰 역할을 하였다. 밴팅, 홉킨스, 세링턴, 데일, 호지킨, 버넷 등 수많은 노벨생리의학상 수상자를 배출하였다. 영국 의학 발전에도 크게 이바지한 셈이다.

또 1675년에는 그리니치 천문대를 설립하였다. 그가 과학에 큰 관심을 두게 된 이유를 할아버지 제임스1세 시절, 왕실 의사였던 윌리엄 하비(William Harvey, 1578~1657) 영향으로 보는 시각도 있다.

윌리엄 하비는 혈액순환의 원리를 밝혀내었던 대학자였다. 그가 왕실 의사였을 때 손자인 찰스2세를 가르쳤고, 찰스2세는 그 영향을 받아 과학에 관심이 높았다는 얘기다. 그래서 찰스2세는 연금술에도 관심이 많았다.

영국 역사에서 찰스2세는 영국이 왕정을 떠나 민주주의 국가로 나아가는 ‘전환 시대’의 왕이었다. 그의 사후, 영국은 왕이 더는 통치하지 않는 나라로 바뀌었다.

그러나, 스스로 의도했든 아니든 그의 재위 기간에 일어난 일들은 영국민들에게 의회민주주의와 강력한 과학기술문명을 선사하였다. 그는 또한, 영국인의 영혼에 깊숙하게 들어와 지금도 함께하는 홍차를 선사한 주인공도 되었다.

유영현 부산 엘앤더슨병원 진료원장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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