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I 이용해 환자에 정교한 치료를”… ‘세계 백혈병 대가’의 도전

[김동욱 의정부을지대병원 혈액암센터 교수 인터뷰]

의정부을지대병원 스튜디오에서 인터뷰를 가진 김동욱 교수는 향후 백혈병 치료에서 ‘단약’은 중요한 이슈가 될 수 있다고 말했다. 사진=황태원 피디

보통 한 분야에서 일가를 이룬 대가, 60대 이상 유명인들과의 인터뷰에서 가장 많은 무게를 차지하는 시간은 ‘과거’다. 눈부신 성취의 무게를 되짚어 보고, 현재에 대한 평가나 미래에 대한 제안을 듣는 흐름이 일반적이다.

‘세계적 백혈병 대가’ 김동욱 교수(을지대학교병원 혈액내과)와의 인터뷰는 달랐다. 예정된 시간을 훌쩍 넘기며 이어진 대화 속에서 방점이 찍힌 시간은 ‘미래’였다. 질문이 어떤 시간을 파고들어도, 김 교수의 답변은 미래를 담고 돌아왔다.

일반인들에겐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지난 20여년 만성골수성백혈병(CML) 연구와 치료 분야의 변화는 그야말로 경천동지'(驚天動地)’다. 한때 난치병 취급을 받던 CML은 이제 인류가 통제 가능한 질환이 됐다. 생존율은 86%에 달한다.

2001년 ‘마법의 탄환’으로 불린 글리벡의 등장으로 패러다임을 바꾼 뒤 관련 연구는 빠르게 진보하며 놀라운 이정표들을 세우고 있다. 이 이정표마다 어김없이 등장하는 대표적 인물 중 한 명이 바로 김 교수다.

지난 8월 의정부을지대 병원에서 만난 김 교수는 빠듯한 시간에 쫓기고 있었다. 매주 3개 병원(서울, 대전, 의정부) 순회 진료, 각종 세미나, 교육 및 연구 등 듣기만 해도 숨돌릴 틈 없는 일정을 소화하고 있는 탓이다. 덩달아 마음이 바빠졌다. 그러나 일단 인터뷰를 시작하자 신약개발부터 완치를 위한 노력까지, 역동적인 현장의 이야기가 쏟아져나왔다. CML 치료의 역사를 훑으며 이어진 90분의 인터뷰. 인공지능이 만들 진료 변화가 언급된 말미에는 잠시 미래를 엿보고 온 기분마저 들었다.

‘기적의 신약’을 이을 또다른 혁신, 새 도약을 앞둔 CML

올해 7월 건강보험 급여가 적용된 4세대(CML) 치료제 환자 치료가 시작됐다. 셈블릭스(성분명 애시미닙)는 이전 치료제의 가장 큰 문제였던 ‘내성’을 해결하는 대안이라는 극찬을 받는다. 지난해 6월 허가 이후 약 1년이 지난 올해 7월에 급여까지 빠르게 진입한 드문 사례다. 최초의 임상시험을 이끌었던 김 교수는 이번 신약이 글리벡에 견줄만한 진보라고 평가했다. 또 한번의 ‘패러다임의 전환’이라는 설명이다.

Q. 앞선 인터뷰들에서 셈블릭스를 ‘기적의 신약’ 글리벡에 견줄만한 혁신이라고 평가했는데, 이유는?

글리벡은 암세포가 만드는 특정 단백질을 억제해 병을 치료한다. 골수이식 치료가 주류였던 판도를 완전히 바꾼 것이다. 글리벡 개발 뒤 백혈병뿐만 아니라, 고형암까지 몇 백개 표적항암제가 같은 메커니즘으로 수없이 개발이 됐다.

글리벡이 사용되기 시작한지 얼마 되지 않아 ‘내성’이 발생함이 보고되었다. 다행히 독일 연구진에 의해 이유가 밝혀졌다. 약이 달라붙는 결합부위의 돌연변이가 문제였다. 이후 화학구조를 바꾼 2세대, 3세대 약들이 개발됐다. 이들 차세대 표적항암제들은 치료 효과는 좋아졌지만, 간기능이상, 고지혈증, 혈당상승, 흉수, 혈관장애, 혈압상승, 췌장염 등 부작용이 만만치 않았다.

이런 시점에서 나온 게 4세대 신약 셈블릭스(성분 애시미닙)다. 1~3세대와는 다른 결합부위를 타깃으로 했지만, 효과는 뛰어났다. ATP 결합부위의 점돌연변이에 의한 내성 문제를 해결하고, 병은 고칠 수 있게 된 셈이다.

과거 글리벡이 그랬던 것처럼 이제 셈블릭스도 새로운 메커니즘을 만들어낸 약이라고 할 수 있다. 불과 몇 년 사이에 (셈블릭스와) 유사한 방식으로 암 세포를 억제하는 또 다른 신약들의 개발도 본격적으로 시작됐다.

Q. 현재 건강보험 적용은 일부 환자만 되던데, 모든 환자가 4세대 신약을 쓰면 좋지 않나?

많은 이들이 신약이 가장 좋은 게 아니냐고 오해한다. 그러나 CML에서는 이야기가 다르다. 물론 2, 3세대 약이 출시된 2010년대에 1세대 약을 왜 쓰냐는 이야기가 나오기도 했다. 그러나 10~15년 흐르면서 장기 사용 부작용이 축적되는 경우가 나왔다. 대표적인게 뇌, 심장의 혈관 부작용이었다. 70세 이상 고령환자에게 치명적이다. 이들은 그냥 1세대 약부터 쓰는 게 더 안전하다.

결국 연령, 성별, 동반질환, 임신 희망여부 등 개인의 조건을 이용해서 적절한 처방이 이뤄져야 한다. 건강보험 적용 범위도 마찬가지다. 가성비와 효과를 고려해 4세대 신약이 가장 효과적으로 적용될 수 있는 환자군을 선별하는게 중요하며 지난 9년간의 임상시험 결과를 바탕으로 만들어진 현재의 의료급여 적용 범위가 현재로서는 합리적이라고 본다.

Q. 환자마다 적합한 처방이 천차만별이라는 말인가?

최근 개별맞춤치료가 화두지만, CML이야말로 개개인별로 치료법이 달라야 하는 대표적 질병이다. 환자마다 특정유전자 발현율이 차이가 굉장히 크다. 같은 약이라도, 환자마다 치료 효과는 물론 부작용도 다르다는 의미다. 인터넷에 수없이 떠도는 ‘어떤 약이 좋더라’를 완전히 신뢰해선 안되는 이유다. 용량 조절도 마찬가지다. 고용량은 초기 반응이 좋을 수 있지만, 부작용이 많아 오래 사용할 때 여러 장기에 심한 합병증을 불러올 수 있다. 효과가 좋더라도 부작용이 심하면 이것 역시 실패로 본다.

CML 치료에서 의사의 역할은 체형에 맞게 옷을 재단하는 재단사와 비슷하다고 보면 된다. 맞춤형 옷을 만들 듯, 정교한 처방이 중요한 것이다. 이게 성공하면 치료 효과가 좋아지는 것은 물론 부작용도 축소할 수 있다. 이번에도 새롭게 마련하는 국제 치료지침 역시 특정 약을 추천하지 않는다.

만성골수성백혈병(CML) 치료제 연구는 빠른 발전을 이어가고 있다. [사진=게티이미지뱅크]
“3년 사이에도 엄청난 변화…약 끊는 환자 늘어날 수도”

유럽백혈병네트워크(이하 ELN, European Leukemia Net)가 올해 말 4차 가이드라인을 발표한다. ELN은 백혈병의 진료와 연구 가이드라인을 전 세계에 제공하는 곳이다. 현재 전 세계 80% 이상의 병원과 의료진이 ELN의 국제표준지침을 참고한다.

첫 ELN 국제표준지침은 글리벡이 등장한 뒤 5년 뒤인 2006년에 만들어졌다. 김동욱 교수는 2011년 아시아인으로는 처음으로 패널 위원으로 선정되면서, 진료지침 개정 작업에 참여해왔다.

Q. 국제 치료지침이 바뀐다고 이야기했는데, 2020년에 비해 변화가 큰가?

지난 3년 사이에도 굉장히 많은 기초연구나 신약 임상연구 결과가 발표됐다. 이런 부분을 반영할 예정이다. 핵심 중 하나가 ‘단약(斷藥)‘이다. 최근 치료 반응이 정말 좋은 환자들까지 평생 약을 먹어야 하느냐에 대한 논쟁이 거세다. 약을 너무 오래 먹으면 부작용이 축적된다. 경제적 부담도 상당하다. 그러나 약을 못끊는 이들이 많다. 의사도 불안하고 환자도 불안한 탓이다. 이들을 돕기 위해 이번 개정에서는 약을 끊는 시기 혹은 용량 등에 대한 지침 변경이 보다 구체적으로 제시될 것이다.

또 하나는 CML의 만성기, 가속기, 급성기의 정의가 바뀔 수 있다는 것이다. 매우 큰 변화다. 환자 분류 기준이 바뀌면 약의 용량을 포함한 전반적인 치료 패턴도 바뀔 수 있다. 부작용을 최소화하고 생존율을 높이기 위해서 과연 적절한 용량은 얼마인가? 그리고 치료중단은 어떤 기준으로 해야 하나?를 다루는 논문도 준비하고 있다. 올해 12월 발표 예정이다.

슈퍼컴퓨터와 인공지능이 바꿀 세상, 상상 그 이상 

김 교수는 세부전공분야로 CML을 ‘스스로가 선택한 병’으로 부른다. 염색체에 이상이 생긴 병이니 유전자만 잘 연구하면 치료법을 알 수 있겠다는 생각에 본인이 스스로 1994년부터 본격적인 연구에 뛰어들었다. 이후 수십 년, 김 교수가 품었던 호기심과 직관의 씨앗은 21세기 기술과 만나 놀라운 미래를 열어가고 있다.

Q. CML 연구 분야에서 가장 혁신적으로 일어나고 있는 변화는 무엇인가?

백혈병이라고 통칭해서 부르지만, 만성백혈병과 급성백혈병은 완전히 다른 병이다. 만성백혈병은 천천히 진행되다 어느 순간 급성으로 빠르게 넘어가 버린다. 그런데 이때 관찰되는 유전자는 급성백혈병의 유전자와도 다르다. 유전자로 분류해서 보면 백혈병의 종류가 500가지가 넘는다. 유전자 정보를 바코드화하고, 이를 분류하는 슈퍼컴퓨터 덕분에 이런 분석이 가능해졌다. 차세대유전자시퀀싱 기술의 발전으로 발병, 치료, 혹은 재발시 유전자 변화도 비교 연구할 수 있게 됐다. 여기에 인공지능을 접목할 경우 더욱 정교한 치료가 가능해지리라 생각한다. 실제 이와 관련한 연구가 이미 진행중이다.

Q. 환자를 돌보면서 연구까지 하는 것은 쉽지 않았을텐데 여러 프로젝트를 진행해왔다

CML이라는 한 가지 병에만 집중할 수 있었던 것이 운이 좋았다. 여러 종류의 백혈병 환자를 한꺼번에 돌보면서 연구에 매진하기란 쉽지 않다. 한 가지 병에만 집중할 수 있는 연구, 진료환경이 주어질 경우 나오는 결과도 질이 달라질 것이라고 생각한다.

동시에 생물정보학, 생명과학, 컴퓨터공학, 나노공학 등 다른 분야와 공동 연구를 할 수 있는 기회가 마련돼야 한다. 이렇게 될 경우 전세계와 경쟁이 가능하다고 본다. 이미 우리와도 30명 이상 기초과학자들이 함께하고 있다. 연세대, 고려대, 서울대, 경희대를 비롯 유니스트(UNIST), 카이스트(KAIST) 등과 협업을 이어가면서 논문을 계속 발표하고 있다.

물론 이같은 다양한 분야간의 공동연구 협업을 지속가능하게 하려면 정부, 기업, 대학을 비롯해 모든 이해관계 당사자들이 함께 노력해야 한다. 발표되는 논문들의 성과가 가시화할 경우 이를 산업화하기 위한 기업체들의 참여도 활발해질 것이라고 본다. 일본의 경우 기초의학이 상당히 발달한 것 역시, 과학자들이 집요하게 한가지 분야만을 파고들수 있는 좋은 연구환경이 마련됐기 때문이라고 본다. 연구비 지원과 연구인프라 투자에 인색한 국내 의과대학교들의 현 상황이 획기적으로 개선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한국에서 시작된 CML데이는 이제 20개가 넘는 나라에서 각자의 방식으로 기념하고 있다. [사진=월드CML데이]

환자를 위해, 도전은 계속… “CML데이는 연구의 동력” 

4세대 신약이 소개된 지 얼마되지 않았지만, 이미 김 교수는 국산 4세대 신약 개발 참여도 진행하고 있다. 국내 기업들과 기초연구를 마치고 내년에 임상시험에 들어간다. 성공할 경우 국내 환자들은 지금보다 더 싼 가격으로 약을 제공받을 수 있다.

이미 김 교수는 국내 표적항암제 가격을 미국, 유럽의 3분의 1 수준으로 내리는 데 성공한 바 있다. 일양약품의 제2세대 표적항암제 개발 임상시험을 주도해 이 약의 저렴한 가격을 무기로 다국적 제약회사들이 어쩔 수 없이 가격을 내리도록 만든 것이다. 백혈병에 쓰이는 항암치료제는 워낙 고가가 많다. 이런 상황에서 국산화는 암 환자는 물론 국가의 의료보험 재정 부담을 크게 낮추기 위해 필수적이라고 김 교수는 강조했다.

비교적 저렴한 신약 보급과 더불어 김 교수가 또다른 목표로 삼고 있는 것이 진료 기술 평준화다. 인공지능을 활용해 CML 환자에게 최상의 치료법을 제공하는 것이다. 현실화한다면 국내는 물론 세계 어느 곳에서도 환자는 최고 수준의 개별맞춤치료를 받을 수 있게 된다. 꿈은 이미 한발 한발 현실화하고 있다.

연구와 진료 성과로도 명성을 떨쳤지만, 김 교수는 환자와의 긴밀한 소통으로도 이름이 높다. 2005년부터 18년간 지속해 온 CML 캠프와 2011년부터 시작된 CML 데이 행사는 소통의 상징과도 같다. 올해 9월 14일에는 코로나19 이후 3년만에 첫 오프라인 모임이 의정부 을지대병원에서 열린다.

“표적항암제가 CML 치료에 주류로 떠오르면서 환자 교육이 정말 중요해졌다. 병에 대해 제대로 알고, 약을 정확하게 먹는 것이 치료의 50% 이상을 결정한다. 환우들과의 소통과 효과적인 교육을 위해 CML 데이 행사를 만들었다. 10년 넘는 시간이 흐르면서 CML 데이는 교육의 장을 넘어선 소통이 장이다. 환자, 의료진, 그리고 연구진은 이를 통해 가족이 됐다. 연구와 진료과정에서 가끔 개인적으로 느끼는 스트레스와 절망을 감싸는 위로도 받는다. 우리 환자들에게 도움을 주려고 만든 행사였는데, 거꾸로 우리도 얻는 게 굉장히 많다. 환자들과의 만남은 우리를 다시 나아가게 하는 큰 동력이다.”

    윤은숙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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