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내 눈치 보는 퇴직 남편… “평생 벌었는데..”

[김용의 헬스앤]

중년 부부는 남은 30년을 어떻게 보낼까? 결혼식 때 다짐했던 ’반려자‘ ’동반자‘라는 말을 다시 떠올리면 해결책이 나올 수 있다. [사진=게티이미지뱅크]

사례 1) “연금이라도 아내에게 직접 주는 건데…”

중년의 한 고교 동기 모임에서 ‘월급 봉투’가 화제가 됐다. 예전에는 회사에서 월급을 줄 때 현금을 봉투에 넣어주곤 했다. 남편은 아내에게 월급 봉투를 내밀면서 뿌듯함을 느꼈다. 아내의 얼굴에선 ‘고마움’이 피어 올랐다고 한다. 하지만 통장으로 계좌 이체를 해주면서 이런 풍경이 사라졌다. 밖에서 돈을 버는 남편의 ‘권위’가 사라졌다. 공무원 퇴직 후 꽤 많은 연금을 받는 A씨는 “요즘 아내의 눈치를 본다. 집에 같이 있기 부담스럽다”고 했다. 그러자 친구들이 “연금은 통장 입금 말고 현금으로 직접 주지 그랬냐”며 아쉬워 했다.

사례 2) “싱크대가 싫어졌어요. 요리에서 해방되니 너무 놓아요”

70대 초반의 여성 B씨는 나이 드니 싱크대가 싫어졌다. 평생 남편-자녀들을 위해 온갖 음식을 만든 공간이지만 남편 퇴직 후 요리하는 게 지겨워 졌다. B씨는 요즘 남편과 함께 한 실버타운에서 거주하고 있다. 식사-청소-세탁 등을 모두 해주니 가사에서 해방된 셈이다. 계약에 따라 식사는 끼니 별로 정산하고 있다. 아침 등 간단한 것은 자신의 룸에서 직접 하지만 대부분은 실버타운에서 제공하는 식사를 한다. 청소도 매일, 3일, 일주일 단위로 계약하고 있다.

여성의 요리-청소-육아 등 등 집안일 부담이 84세까지 계속된다는 통계 분석 결과가 나왔다. 최근 나온 여성의 기대수명이 86.6세임을 감안하면, 여성은 죽을 때까지 가사 부담에서 벗어나지 못한다는 의미다. 통계청이 지난달 발표한 가사노동 관련 분석에 따르면 남녀가 가사 노동을 가장 많이 하는 나이는 38세인데, 이때도 여성의 가사 부담은 남성의 7배나 됐다.

요즘 맞벌이가 크게 늘면서 남편의 가사 참여가 증가했지만 아내는 영 만족스럽지 않다는 표정이다. 이는 저출산 관련 각종 조사에서도 나타난다. 남편이 청소 등 집안일을 도와주고 있지만 아내의 노동량에 비해선 턱없이 부족하다는 것이다. 지금처럼 도와주는 시늉만 해선 둘째 아이 갖기가 부담스럽다고 토로한다. 회사 일로 몸이 파김치가 됐는데 일찍 퇴근한 남편이 TV만 보고 있으면 속에서 열불이 난다고 했다. 아내는 가사는 도와주는 게 아니라 분담을 해야 한다는 주장이다.

위에서 언급한 사례 1, 2는 중년 남편, 아내의 심경을 대변한 것일지도 모른다. “아내의 눈치를 본다”는 말에 친구들 모두가 안타까움과 함께 공감을 표시했다. 평생 가족을 위해 희생하며 돈을 벌었는데 퇴직하니 ‘찬밥’ 신세라는 중년 남자들의 서글픔이 서려 있다. “연금이라도 직접 봉투로 주지 그랬냐”는 친구들의 타박은 월급으로 가장의 권위와 체면을 세우던 과거의 습성이 담겨 있다. 월급이 사라지는 순간 (어느 정도 예상했지만) 가장의 권위는 여지 없이 무너져 내렸다는 절망감도 있다.

요즘 의사라는 직업이 ‘상한가’를 치는 것은 70세, 80세까지 일할 수 있는 것도 큰 요인이다. 한 중년 남편은 “나 때는 몇몇 의대 입학은 식은 죽 먹기였는데, 괜히 명문대 공대에 갔다가 50세에 명퇴를 했다”며 후회한다. 고교 때 자기보다 공부를 못했던 의사 동창을 만나고 온 날에는 “나는 집에서 노는데…” 스스로 자조하며 밤잠을 못 이룬다. 그는 공부 잘하던 아들이 공대를 선호하자 극구 반대하며 기어이 의대에 보냈다.

회사 퇴직 후 부부가 20~30년을 집에서 부대끼며 지내야 하는 시대다. 자녀가 결혼하면 부부만 남는다. 노후의 경제 생활이 중요하지만 ‘부부가 30년을 어떻에 지낼 것인가’도 살펴야 한다. 부부는 ’반려(伴侶)‘라는 표현에 익숙하다. 생각이나 행동을 함께 하는 짝을 의미한다. ’동반자(同伴者)‘는 짝이 되어 여러 가지 일을 함께 하는 사람을 말한다.

나이 든 부부가 가사를 서로 분담해서 오순도순 사는 모습을 보면 행복이 묻어난다. 여성 혼자서 84세까지 가사를 전담하는 것은 곧 과거의 일이 될 것이다. ’삼식이‘라는 표현은 더욱 좋지 않다. 하루 세끼를 집에서 해결하는 남편을 비하하는 뜻도 있기 때문이다. 식사 준비, 설거지, 청소 등 가사를 부부가 나눠서 하면 굳이 비싼 돈 들여 실버타운에 들어갈 필요가 없다.

세계보건기구(WHO)는 집 청소 등 가사도 훌륭한 신체활동이라며 질병 예방에 좋다고 했다. 노후에 너무 편하면 없던 병이 생긴다. 몸을 끊임없이 움직여야 한다. 94세의 노인은 매일 집 청소를 하면서 운동 효과를 얻는다. 그 나이에 걷기 외 다른 운동은 몸에 무리가 간다. 이 노인은 “청소를 하니까 아내가 좋아하니 더욱 신이난다”고 했다.

아내에게도 부탁하고 싶다. 30년 전쟁터(직장)에서 돌아온 풀 죽은 남편을 너무 눈치주지 말았으면 한다. 스스로 매일 청소하는 94세 노인처럼 남편이 신바람나게 집안 일을 할 수 있도록 배려했으면 한다. “아내를 사랑하지만 같이 있으면 왠지 불편하다…” 한 중년 남편의 넋두리에 옆에 있던 친구들이 모두 고개를 끄덕였다. 아내가 ’삼식이‘ 남편을 불편해 하는 것과 비슷한 의미다. 남은 30년을 부부 둘이서 어떻게 보낼까? 유난히 ’반려자‘ ’동반자‘라는 말이 가슴에 와 닿는 시기이다.

    김용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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