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들에게 참의사 길 가르치고 떠난 장애 어머니

서울대 최인호 교수, 눈물 어린 장례식

한국전쟁의 상처를 안고 평생 절룩거리며 살던 어머니, 마침내 90년 삶을 정리하고

눈을 감았다. 1.4 후퇴 때 인민군 병사들에게 집단 구타당하던 고통의 순간, 등에

업은 큰아들을 잃고 피눈물을 흘리며 절룩절룩 하염없이 걷던 시간들, 전쟁 중 태어난

셋째 아들이 ‘어머니를 위해 의사가 되겠다’는 약속을 지키고 최고 의사로 성장하는

모습을 보며 기쁨의 눈물을 흘리던 순간들…, 모두 뒤로 하고 미소를 지으며 숨을

거둬들였다.

서울대의대 소아정형외과 최인호 교수(58)는 1일 자신을 의사로 만든 어머니를

하늘로 보냈다. 최 교수의 어머니 고(故) 허찬옥 씨는 자신은 역사의 희생양이 돼

장애인으로 살아야했지만 셋째 아들에게 사랑과 희생을 가르쳤다.

아들은 어머니처럼 다리가 불편한 사람들을 치료하기 위해 의사가 됐다. 누구나

인정하는 세계적 명의(名醫)의 반열에 올랐다. 대한정형외과학회 이사장, 세계소아정형외과학회

조직위원장 등을 맡아 의학의 발전에 크게 기여하는 대가(大家)가 됐다. 어머니는

자신의 아픔을 통해 아들을 세계적 의사로 만들고 세상을 떠난 것이다.

허 씨는 1951년 1.4 후퇴 때 먼저 월남한 남편을 찾아 피란길에 올랐다가 인민군

병사들에게 맞아 피범벅이 됐다. 강보에 싸여 등에 업힌 아들은 즉사했다. 성치

않은 몸으로 남으로, 남으로 절뚝거리며 걸어오면서 얼마나 울었는지 모른다. 피눈물도

말랐다. 허 씨는 인천에서 남편과 극적으로 재회했지만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눈물만 핑 돌았다. 그곳에서 새 터전을 잡고 새 삶을 펼쳤고 최 교수를 낳았다.

어머니는 다리가 불편했지만 마음이 불편한 사람은 아니었다. 아들에게 사랑과

희생을 가르쳤다.

“주말이면 빠지지 않고 엄마 손을 잡고 송월초등학교에서 제일교회까지 1㎞ 남짓한

거리를 걸었지요. 다리 아픈 엄마와 자유공원 맥아더 동상 앞에서 잠시 쉬며 얘기를

나누던 순간들이 마치 어제 같은데…”

허 씨는 아들에게 늘 자신보다 남을 생각하라고 가르쳤다. 최 교수는 “어머니는

항상 ‘세상에 도움이 되는 사람이 되라’고 말씀하셨다”며 “그래서 남에게 폐를

끼치지 않고 도움이 되는 길이 뭔가 살피며 살게 됐다”고 말했다.

허 씨는 최 교수가 초등학생이던 때 수술을 받았지만 다시 정상으로 돌아올 수

없었다. 오른쪽 다리가 짧아 다리를 저는 장애인으로 살았다. 남편은 지인에게 돈을

떼이고 화병(火病)과 싸우다 암으로 세상을 떠났다. 최 교수의 고1 때였다. 여자

혼자서 불편한 몸으로 타박타박 세상을 헤쳐 가며 두 아들을 키워야만 했다.

최 교수는 고교 때 맥아더 동상 아래에서 연안부두에 정착한 선박들을 내려다보며

공대에 들어가서 큰 배 만들 꿈에 젖기도 했지만 다리가 불편한 어머니를 보면서

다시 의사의 꿈으로 되돌아오곤 했다.

최 교수는 서울대 의대에 진학했고 박정희 전대통령과 육영수 여사의 이름을 따서

지은 서울대 기숙사 ‘정영사’에서 공부했다. 정영사는 가난한 수재들의 산실이었다.

최 교수는 ‘정영사’에서 즐겁게 남을 도왔다. 그는 그곳에서 월남전에 참전했다

다리를 잃은 호탕한 복학생 형의 ‘시다바리’를 자청했다. 그는 형의 다리가 돼줬으며

밤이면 다른 학생들이 없는 시간에 함께 목욕을 했다. 그 예비역은 우리나라 의족분야에서

일가를 이룬 박윤서 현 나사렛대 재활공학과 대우교수다. 최 교수는 본과4학년 때

굽은 다리를 펴게 하고, 앉은뱅이를 일으키는 정형외과에 매료돼 지원을 했다. 어쩌면

어머니를 치료할 수도 있다는 기대도 있었다.

최 교수는 전공의 2년차 때 6개월 동안 소록도에서의 한센병 환자들을 돌보며

한껏 성숙했다고 믿는다. 그는 어머니보다 훨씬 힘들게 지내는 환자들과 부대껴 살면서

‘제대로 실력을 갖추면 도울 수 있는 사람이 많을 것’이라는 깨달음을 가슴에 새겼다.

그는 이때 가톨릭으로 개종했다. 지금의 부인과 결혼하면서 “아내와 함께 성당에

가야겠다”고 했더니, 어머니는 기쁘게 허락했다.

‘환자’를 위해 의사가 됐기 때문일까? 최 교수는 환자들을 가족처럼 대하는

것으로 유명하다. 한 해 400여 명의 환자를 수술하면서 한 명, 한 명에게 어머니를

돌보듯, 가족을 보살피듯 정성을 쏟는다. 어머니가 앓았던 화농성 관절염에 걸린

아이를 비롯해서 엉덩이관절부위의 다리뼈가 썩거나 관절이 뒤틀린 아이, 목이 한쪽으로

기운 아이, 종아리나 허벅지가 발달하지 않은 아이에게 그는 ‘아버지’와도 같은

존재다. 그래서인지 서울대병원 홈페이지에는 최 교수에게 감사를 표하는 글들이

유독 많다.

최 교수는 “어머니처럼 다리가 불편한 사람들을 보면 가슴이 먹먹해지고 환자를

볼 때마다 어머니의 모습이 겹쳐 보인다”고 말했다.

그는 어머니가 제때 제대로 치료받았다면 평생 장애를 안고 살지 않았을지도 모른다고

믿는다. 그는 “모든 환자를 고칠 수는 없지만 대부분의 환자들은 조기진단에 적절한

치료가 더해지면 새로운 삶을 살 수 있다”며 “앞으로 어머니가 말씀하신 대로 세상에

도움이 되는 사람으로 살겠다”고 말했다.

1일 오전 최 교수는 어머니의 장례식을 치르며 눈물을 흘렸다. 그의 눈물 어린

눈동자엔 어머니의 얼굴이 눈부처로 비치고 있었다. 어릴 적 다리를 절룩이며 사랑을

얘기하던 어머니의 모습, 의사의 어머니로 함박웃음을 짓던 순간들, 풍상(風霜)의

후유증으로 뇌졸중, 심장병, 암 등 온갖 병으로 고생하던 말년의 모습…. 최 교수의

빰으로 눈물이 주르르 흘렀다.   

    손인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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