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위가 무너지는 사회

권위가 먹히지 않고 있다

 

추기경이 계란 세례를 받았다. 아프가니스탄이나 이라크 같은 이슬람 국가에서가

아니라, 서울 공릉동에서였다.

학교 옆의 성당이 납골당을 짓는 것에 항의하는 주민들이 9일 성당을 방문한 정진석

추기경의 승용차에 계란과 물병을 던졌다는 것이다. 주민들은 학교 옆의 성당에 납골당을

설치하면 자녀의 교육권에 큰 지장이 있다며 2년 동안 시위를 벌였다고 한다.

한국 사회의 온갖 모순들이 고스란히 농축된 사례다. 주민들은 부정하겠지만,

필자는 이 사건에서 권위와 법, 합리적 대화가 실종된 한국사회의 본질이 비쳐져

울가망하기만 하다. 집단히스테리가 합리적 사고를 방해하는 일들이 계속 되풀이되고

있어 슬프기만 하다.

이 사건의 본질은 간단하다. 성당에 납골당이 들어서면 집값이 내려갈 소지가

크다. 다만 주민들이 이 이유로 납골당 설치에 반대하는 것을 무조건 비난해서는

안 된다.

서울 공릉동의 주민은 강남지역의 집값 상승을 먼발치서 바라보며 무의식적 피해의식을

가질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혹시 납골당 때문에 집값이 더 떨어진다면 당연히 낙담하게

될 것이다. 사람의 의식은 경제적 하부구조가 결정한다는 마르크스의 진단은, 그의

인간 본성을 무시한 처방을 떠나 유효할 수도 있다. 이를 무조건 황금만능주의로

몰아붙여서는 안 된다는 것이 필자의 생각이다.

그렇다 하더라도, 납골당을 이유로 자녀를 학교에 보내지 않고, 한 종교의 수장에게

모욕을 가하는 이런 형태의 의사 표현은 누가 뭐래도 비정상이다. ‘천민적 의사

표현’이 ‘악화가 양화를 쫓아내는’ 그래셤 법칙의 승자처럼 사회 전체로 번지고

있다.

선진국에서는 마을마다 공동묘지가 있고, 산 자와 죽은 자가 조화를 이루고 사는

모습을 쉽게 볼 수 있다. 게다가 납골당은 정부와 종교단체, 시민단체 등에서 좁은

땅을 효과적으로 사용하기 위해 장려하고 있는 시설이다. 서울 시민의 과반이 설문조사에서는

납골당을 이용하겠다고 답한다.  

필자는 화장장과 공동묘지로 유명한 경기도 벽제에서 7년을 살았는데, 아무 피해도

없었다. 오히려 아토피 피부염으로 고생하는 딸들이 좋은 공기 속에서 잘 컸다. 동네

이웃들도 너무나 순수했다. 집값이 오르지 않았지만 ‘사용가치’가 ‘재산가치’를

웃돌았다고 믿는다.

공릉동에서 납골당 때문에 재산 가치가 떨어질지는 아직 모르는 일이다. 화장장도

아니고, 성당의 납골당 때문에 집값이 떨어진다면, 국내 최고의 영안실이 있는 삼성서울병원

부근 수서와 개포동의 집값도 다 떨어져야 정상이다. 그러나 그곳의 집값은 국내

최고 수준이다.

그리고 아이들에게 권위의 부정을 가르치는 것은 무엇보다 비교육적이다. 남의

종교, 남의 가문, 남의 학교의 어른이라도 존경을 해야 한다. 예의는 사회 유지를

위한 최소한의 장치다. 남을 존경하는 힘은 자신의 인격에서 나온다. 필자는 싫어하는

정치인이 있어도 아이들에게 경칭을 빼고 이야기 한 적이 한 번도 없다. 누가 뭐래도

비교육적이라고 믿기 때문이다.

언론 보도에 따르면 성당에서 납골당을 지을 수 있는지 여부는 재판 계류 중이라고

한다. 그렇다면 재판 결과가 나오기를 기다려야 한다. 이런 식으로 재판 중인 사건에

대해 힘으로 무엇인가를 해결하려 하는 것이야 말로 ‘법치주의의 적’이다.

왜 시민들이 이렇게 됐을까? 권위와 질서를 무너뜨린 정치의 영향이 클 것이다.

스스로 권위를 부정해서 욕을 얻어먹고 있는 최근 집권층에 큰 책임이 있을 것이다.

그 밑에는 현대사의 급격한 변화에 따른 가치의 붕괴와 아노미 현상이 깔려 있을

것이다. 사회지도층이 지위에 걸맞은 권위를 발휘하지 못한 측면도 무시할 수 없다.

얼마 전 택시를 타서 심사평가원으로 가자고 했더니, 택시 기사가 “그런 데는

모른다”고 당연시해서 싫은 소리를 한 적이 있다.

“택시 기사가 그 정도는 아셔야 하지 않나요?” ⇒ “손님들 많이 가지도 않는

곳 어떻게 다 아나요?”

“택시에 네비게이션이 있는데 사용법 모르시나요?” ⇒ “젊은 사람이나 하는

거지….”

“제가 주위에 보니까 성공하는 사람은 다 자신부터 바꾸던데요?” ⇒ “성공하는

놈들 다 도둑질해서 성공한 것이지. 무엇보다 국회에 있는 XX부터 바꿔야지.”

“그렇지 않던데요. 선생님의 태도에 문제가 있는 것은 아닐까요?” ⇒ “나도

사업했는데 공무원들 룸살롱 접대하면서 치를 갈았어. 그런 것 잘해야 성공해. 대통령

후보 나온 ○○○도 똑같은 놈이야.”

더 말을 않고 내렸지만, 그 택시기사가 사업을 하면서 왜 실패했는지 더 이상

설명을 안 들어도 알 것 같았다.

문제는 많은 사람들이 노력의 부족으로 실패하고 나서, 그 실패를 딛고 일어서기보다는

자신을 합리화하며 사회를 저주하는 과정이 쌓이면서 사회 전체에 권위의 붕괴가

가속화된다는데 있다.

권위의 붕괴는 ‘집단 히스테리’와 동전의 양면처럼 맞물려 있다. 공릉동의 시위를

보면서 2003년 국립의료원에 ‘사스 격리병동’을 설치하려다가 주민 반대에 부딪혀

좌초한 기억이 오버랩 됐고 광화문의 온갖 시위들이 떠올랐다.

사회가 단단히 병들었다. 권위가 먹히지 않고 있다. 합리적인 설명, 긍정적 마인드보다는

단정과 저주, 고함이 점령하고 있다. 이들 병을 누가 고쳐야 할까? 정신의학을 하시는

분들은 이런 데에 좀더 관심을 가져야 하지 않을까? 하기야, 많은 의사들도 합리적

대화와 설득의 기술에 익숙하지 않으니….        

마침 오늘(9월 10일)은 매천 황현이 음독자살한 날이다. 매천은 1910년 경술국치의

소식을 듣고 식음을 전폐하다 ‘절명시’ 4수를 짓고 쓰디쓴 독약을 마셨다.

“나는 죽음으로써 지켜야할 의리는 없다. 다만 국가가 선비를 기른 지 500년이

되었는데도 나라가 망한 날에 한 사람도 국난에 죽는 자가 없다면 어찌 통탄할 노릇이

아니겠느냐? 나는 위로는 황천이 준 떳떳한 양심을 저버리지 않았고, 아래로는 평소에

읽은 글을 저버리지 않았다. 그러니 아득히 긴 잠을 잔다면 참으로 통쾌할 것이니,

너무 슬퍼하지 말라.”

그의 시신은 다음날 새벽 아우 황원(黃瑗)에 의해 발견되는데, 놀랍게도 그는

아직 숨이 붙어있는 상태였다. 남길 말이 있느냐는 아우의 말에 매천은 쓴웃음을

지으며 대답했다고 합니다.

“죽는 것도 쉽지 않네. 입에서 약그릇을 세 번이나 떼었네. 내가 이리도 어리석었던가.”

그의 절명시에서 ‘難作人間識字人’(난작인간식자인·세상에서 지식인

노릇하기 어렵기만 하구나)이라는 문장이 계속 머리를 맴돈다. 지식인의 권위가 무너진

사회에서 지식인 노릇하는 것이 힘든 것은 당연할 것이다.

의료인들도 마찬가지다. 스스로 하는 말들이 사회에 어떻게 반향을 일으키는지

고민에 고민을 거듭해야 할 것이다. 당연하다고 여기는 주장들이 권위가 붕괴 중인

사회에서 스스로의 권위를 해체하는 독약으로 번질 수도 있다. 난작인간식자인, 필자

같은 글쟁이 뿐 아니라 의료인에게도 지금 절실히 해당하는 말일게다.

    이성주 기자

    저작권ⓒ 건강을 위한 정직한 지식. 코메디닷컴 kormedi.com / 무단전재-재배포, AI학습 및 활용 금지

    댓글 0
    댓글 쓰기

    함께 볼 만한 콘텐츠

    관련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