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핫닥터] 입 통해 갑상선암 로봇수술 ‘세계 의사들의 코치’
⑨흉터-목소리 걱정 없는 수술법 개발, 고려대 안암병원 김훈엽 교수
2019년 3월16일 오전8시 타이완 수도 타이베이의 대규모 군(軍)종합병원 삼군총의원의 수술실. 40대 여성 갑상선암 환자의 입속으로 가느다란 로봇 팔들이 들어갔다. 의사는 입 속에서 구멍 세 곳을 뚫고 장비들을 넣어 암 부위를 제거했다. 수술 장면은 인근 컨벤션센터의 대만내분비외과학회 학술대회장으로 생중계됐다.
2시간 만에 수술을 끝낸 고려대 안암병원 김훈엽 교수(48)는 학회장으로 자리를 옮겨 참석자 100여 명의 박수를 받으며 입장했다. 김 교수가 1시간의 특강을 마치자 학회에 초대받은 샐리 카르티 미국내분비외과학회 회장(피츠버그대 교수)은 상기된 표정으로 감탄사를 연발했다. “논문에서 봤던 수술을 마침내 눈으로 보고 놀랐다. 수술 부위가 너무 깨끗하고 출혈도 거의 없다. 완벽했다. 믿을 수 없을 정도다.”
김훈엽 교수는 3개월 뒤 스페인 세비야에서 열린 유럽내시경외과학회에도 참석, 로봇 수술법에 대해서 특강하고, ‘멘토링 프로그램’의 멘토 5명 중 갑상선 분야의 유일한 멘토로서 세계 각국의 의사들에게 의술을 전수하고 귀국했다.
김 교수는 세계 각국을 방문하며 신체에 흉터가 없고, 목소리를 안전하게 지키는 경구(經口)로봇갑상선수술(TORT·TransOral Robotic Thyroidectomy)을 보급하고 있는 의사다. 미국, 이탈리아, 프랑스 등 세계 10여 나라의 의사들이 수술법을 배우러 고려대 안암병원을 찾았고, 노벨생리의학상을 두 명 배출한, 미국 뉴올리언스의 툴레인 의대는 아예 김 교수를 겸임교수로 임명해서 의술을 전수받고 있다.
김 교수는 환자들 덕분에 세계에서 부작용이 가장 적다고 평가받는 로봇수술법을 개발할 수 있었다고 믿는다. 그는 환자들에게 노트에 그림을 그려가면서 암의 상태와 수술법, 수술 후 변화 등에 대해서 꼼꼼히 설명하고 회진 때 환자의 상태를 철저히 체크한다. 이 과정에서 환자의 불편함을 어떻게 하면 줄일 수 있을지 고민한 결과가 새 수술법으로 탄생했다는 것.
김 교수는 어릴 적부터 아버지의 영향을 받아서 의사가 돼야겠다고 생각했다. 아버지는 서울대 마취통증의학과 교수 출신으로 보라매병원장, 중앙대의료원장, 대한의학회장, 국가생명윤리심의위원회 위원장 등을 역임한 ‘의료계의 지성인’ 김성덕 현 남양주 현대병원 의료원장(75)이다.
서울대 의대에 입학한 김 교수가 전공에 대해 고민할 때 아버지는 “부자 관계 때문에 공정성을 해칠 수 있으니 가급적 마취과 외에 다른 전공을 삼았으면 한다”고 말했고, 아들은 기꺼이 따랐다. 김 교수는 사람의 목숨을 살리는 외과로 전공을 삼았고, 서울대병원 전공의 3년차 때 자신의 꼼꼼하고 차분한 성격에 맞는 내분비외과를 세부전공으로 선택했다.
김 교수는 부족한 잠과 싸우며 외과 전공의 생활을 마치고, 전임의 때 본격적으로 갑상선·부갑상선 ·부신 등에 병이 생긴 환자들을 치료하기 시작했다. 때마침 로봇수술 바람이 갑상선 분야에도 불어왔다. 2007년 세브란스병원 정웅윤 교수가 한쪽 겨드랑이로 수술 장비를 넣는 로봇수술을 시작했고, 이듬해 서울대병원의 윤여규 교수는 양쪽 겨드랑이와 젖꼭지 아래 젖꽃판으로 접근하는 수술을 도입했다.
김 교수는 윤 교수를 도와 열심히 로봇수술을 했지만, 스승으로부터 모교에는 김 교수를 위한 교수자리가 없다는 통보를 받았다. 삶의 계획이 흐트러지는 충격에 한때 낙담했지만, 현실을 받아들여야만 했다. 마침 고려대 의대에서 내분비외과 의사를 찾고 있었다. 고려대가 자신을 세계적 의사로 만드는 기회를 제공하게 될 줄은 나중에 알았다.
당시 고려대 안암병원은 이비인후과가 내시경으로 갑상선암을 치료하는 분야에서 국내 최고였지만, 내분비외과에서는 배정원, 우상욱 교수가 주로 유방암을 수술하고 있었다. 김 교수는 이곳에서 근무하게 되면 급증하고 있는 갑상선암을 최대한 수술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마침 고려대 안암병원에서는 외과 김선환, 비뇨기과 천준 교수 등이 로봇수술의 바람을 일으키고 있어서 로봇수술을 펼치는 데에도 최적이었다.
김 교수는 서울대병원에서 로봇수술을 하면서, 늘 의문을 품었었다. 양 겨드랑이와 젖꽃판으로 접근하는 바바(Bilateral Axillo-Breast Approach) 로봇수술은 전통적 수술법과 달리 목에 상처가 나지는 않지만 수술 범위가 넓고 시간이 길어서 부작용이 생길 여지가 컸다. 겨드랑이나 유방에 흔적이 나는 것도 피할 수 없는데….
바바 수술을 받은 환자들의 모습이 늘 눈에 밟혔던 김 교수는 인터넷 논문 검색을 통해 노츠(NOTES·Natural Orifice Translumenal Endoscopic Surgery)의 세계를 발견하고 가슴이 뛰었다. 노츠는 인체를 절개하지 않고 이미 열려있는 입, 항문, 코 등으로 수술도구를 넣어 수술하는 분야였다. 갑상선암 수술에서는 독일인 의사가 동물실험을 거쳐서 사람에게도 시도했지만 사람에서의 수술결과는 신통치 않았다. 김 교수는 ‘가짜 실패’를 이길 ‘진짜 수술법’을 찾아야겠다고 결심했다. 김 교수는 입을 통한 로봇 수술에서 길을 찾았다. 환자 진료와 수술에 온힘을 쏟으면서도 남는 시간에는 돼지 30여 마리를 대상으로 동물실험을 했고, 카데바(실험용 시신)와 씨름하며 수술법을 개발해나갔다.
김 교수는 각종 학회에서 TORT 수술법의 연구결과에 대해서 발표했다. 그가 동물·사체실험을 하고 있다는 것이 알려지자, 미국 존스홉킨스대, 스탠퍼드대, 루이지애나 대의 젊은 교수들이 수술로봇 ‘다빈치’를 개발한 세계 로봇수술 최대 회사 인튜이티브 서지컬에게 초청을 제안했다. 김 교수는 이들 젊은 의사와 캘리포니아 주 서니베일의 인튜이티브 서지컬 본사에서 공동 단기연구를 했고, 미국 의사들은 김 교수가 서울로 떠날 때 한목소리로 말했다. “닥터 김, 하루빨리 수술에 성공해서 우리를 이끌어줘.”
김 교수는 마침내 수술법을 완성, 2013년 말 병원 기관윤리심의위원회(IRB)의 승인을 받고 피부 특이체질 때문에 흉터가 남을까봐 걱정인 50대 갑상선암 환자에게 세계 최초로 TORT 수술을 시행했다. 수술에 잇따라 성공했고 수술결과는 2014년 《내시경수술》지에 논문을 발표해서 세계 의학자들의 주목을 받았다.
그러나 김 교수는 수술결과에 만족한다고 말하는 환자들에게 미안한 감정을 달랠 수가 없었다. 30여 구의 사체와 붙어살다시피 하며 준비해 자신 있게 수술을 시작했지만, 사체 대상의 수술과 사람 수술은 달랐다. 더러 수술 도중 딱딱한 사체의 입술과 달리 환자의 부드러운 입술이 찢어지곤 했고, 입과 턱의 마비가 지나치게 오래 지속되는 부작용도 나타났다. 한 달 안에 사라지는 부작용이라고 자위할 수도 있었지만, 환자의 고통을 외면할 수는 없었다.
김 교수는 어떻게 이 부작용을 줄일까 고민하다가 2015년 미국 존스홉킨스대에서 교환교수로 연구하던 중에 해답을 찾았다. 이전에는 턱 가까이에 작은 구멍을 세 개 냈는데, 좀 더 깊숙이 혀 아래에 구멍을 내서 수술하니 부작용이 크게 줄었다.
김 교수는 2016년 귀국해서 한 단계 업그레이드된 TORT 수술을 집도해나갔고, 수술 효과가 환자들 사이에서 소문이 나면서 전국에서 환자들이 몰려왔다. 특히 목소리를 온전하게 살린다는 점 때문에 수많은 가수, 성악가, 연기자 등이 연거푸 찾아왔다. 김 교수는 이들이 제2의 가수·연기 인생을 펼치는 것을 지켜보면서 육체의 피로감이 스르르 녹는 것을 느끼고 있다.
김 교수는 지금까지 갑상선암 환자 5000여 명을 수술했고, 이 가운데 1500명을 로봇으로 치료했다. 1000여명에겐 TORT로 '새 삶'을 선물했다. 환자가 밀려와서 월요일부터 금요일까지 매일 수술하고 있으며, 지난해에는 업무일 90일 동안 하루도 안 빠지고 수술하기도 했다.
김 교수의 수술법이 국제적으로 알려지면서 미국, 이탈리아, 프랑스, 브라질 등 10여개 나라 60여명의 의사가 TORT 수술을 배워갔다. 수술실에 1, 2명의 외국의사가 참관하는 것이 자연스러웠다. 미국 외과의사 가운데 갑상선 로봇수술을 가장 많이 하던, 툴레인 의대 내분비외과의 이매드 캔딜 과장은 몇 차례 방한, TORT에 대한 강의를 듣고 수술실에서 참관하다가 수술을 본격적으로 배우기 위해 김 교수를 겸임교수로 발령케 해달라고 대학을 졸랐다. 툴레인 의대는 김 교수의 미국 의사면허, 보험 등 문제를 해결하고 정식 교수로 초대했다. 김 교수는 국내 최초로 한·미 양국의 의대 교수를 겸임하며 매년 9차례 도미, 이틀 동안 강의와 함께 환자를 수술하기로 계약을 체결했다.
김 교수는 이토록 국내외에서 바쁜 생활을 하고 있지만, 자신의 치료법에 대해 과신하지 않도록 자신을 늘 다잡는다. 내분비내과, 이비인후과, 핵의학과, 영상의학과, 병리과, 방사선종양학과 등과의 협진 시스템을 통해서 다른 의사의 목소리에 경청한다.
김 교수는 환자에게 수술 전후 친절히 설명하면서 환자로부터 피드백을 받는 것도 놓치지 않는다. 인터넷의 환자 경험담을 검색하면 김훈엽 교수에 대한 감사, 칭찬, 추천 글들을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다. 정말 친절해요, 시원시원해요, 자신감을 심겨줘요, 가족처럼 돌봐줘요, 자신 있게 추천해요….
김 교수는 자신을 믿고 새 치료법에 기꺼이 몸을 맡긴 환자들, 스스로 홍보대사를 자처하고 수술법을 알리고 있는 환자들에게 빚을 지고 있으며, 부작용이 ‘0’에 수렴하는 치료법으로 개선시키는 것이 환자들의 은혜에 보답하는 길이라고 믿고 있다.
“의사는 질병의 완치뿐 아니라 환자의 통증과 부작용을 최소화하는 데에도 관심을 가져야합니다. 작은 흉터라도 환자에게는 '내가 질병을 앓았다'는 지워지지 않는 기억으로 남겠지요. 특히 목소리가 자산인 직업을 갖고 있는 환자에게 수술 후 음성이 변하면 삶에서 치명적이겠지요. 환자가 내 가족이라고 생각하면 치료법을 개선하는 것과 수술 후 관리에 최선을 다할 수밖에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