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은 왜 그렇게 홍차에 열광할까?

[차 권하는 의사 유영현의 1+1 이야기] ⑭ 늦게 배운 도둑질

영국인들은 하루에 여러 잔의 홍차를 마신다. 마시는 시점에 따라 이를 다음 일곱 가지로 분류한다. 이름만 들어도 차가 영국인의 일상에 아주 밀착하였음을 알 수 있다.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마시는 ’얼리모닝티‘(Early Morning Tea), 아침 식사와 함께 마시는 ’브렉퍼스트티‘(Breakfast Tea), 오전 11시경 마시는 ’일레븐지스‘ (Elevenses), 오후 3~4시경 ’애프터눈티‘(Afternoon Tea), 스콘과 클로티드 크림, 잼과 함께 마시는 ’크림티‘(Cream Tea), 저녁 식사를 대신할 따뜻한 음식과 함께 마시는 ’하이티‘(High tea), 잠자기 전에 마시는 ’베드타임티‘(Bedtime Tea).

[사진=클립아트코리아]
영국은 유럽 다른 나라에 비하여 수십 년 늦게 차를 접하였다. 하지만 “늦게 배운 도둑질에 날 새는 줄 모른다”더니, 영국은 다른 나라보다 압도적으로 차를 탐닉하게 된다.

영국인이 처음 만난 차는 녹차 혹은 청차였고 이후 홍차였다. 홍차는 영국 사회 전반에 걸쳐 깊숙이 뿌리내렸고, 영국의 국가 정체성과 생활 방식에 큰 영향을 미쳤다. 다양한 사회적, 경제적, 정치적, 문화적 요인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결과다.

영국의 홍차 유행은 아시아 무역과 항행을 놓고 다투던 네덜란드와의 경쟁에서 승리한 것과 관계가 깊다. 처음 네덜란드를 통해 차를 수입하던 영국은 1689년 중국과의 직접 무역에 나섰다.

영국에게 차는 네델란드에 이긴 승리의 상징

네덜란드는 1610년 이후 유럽 각국에 차를 공급하면서 차 무역을 지배하였다. 하지만 그들은 차 수요와 차 무역의 잠재력을 제대로 읽지 못하였다. 네덜란드 동인도회사의 거점인 자바섬으로 수출된 중국차로 만족하다가 영국이 중국과 직거래에 나서면서 당황한다.

영국은 1715년에는 홍콩 인근 광동성(廣東省) 광저우에 상관(商館)을 설치한다. 이로써 네덜란드를 따돌리고 우위에 서게 된다. 네덜란드는 광저우에 뒤늦게 접근하였지만 이미 이곳을 차지한 영국을 제쳐내지 못하였다.

18세기 중반에는 청나라가 외국과의 무역을 광동으로 제한하였고 영국은 중국 무역을 사실상 독점하면서 황금기를 열었다. 홍차는 영국인에겐 승리의 기쁨이고 자부심이 되었다.

차 무역은 대영제국 식민지 건설과도 밀접히 관련되었다. 영국은 특히 차를 거래하는 데 필요한 식민지와 무역로를 확보하면서 중국과의 차 거래에서 주도권을 유지할 수 있었다.

나중에는 식민지 인도와 스리랑카 등지에서 차가 대량으로 재배되면서 차 생산가격을 낮출 수 있었다. 반면, 먼저 차를 접했던 유럽의 다른 국가들은 이와 같은 광범위한 해외 무역망을 보유하지 않았기 때문에 차 공급에서 영국만큼 유리한 위치에 있지 못했다.

그렇게 대영제국은 차 생산의 중심지로 자리 잡게 되었다. 식민지에서의 경제적 영향력을 통해 얻은 결과물인 차는 대영제국 수립의 핵심 요소도 되었다.

차 무역에는 당시 세계 최강의 조직이었던 동인도회사가 관계하였다. 광저우 상관을 통하여 동인도회사가 직접 차를 수입하기 시작한 이래 18세기 내내 동인도회사는 차의 독점적 수입권을 가졌다. 차를 영국으로 들여오는 것뿐만 아니라, 서방 다른 나라들과 대영제국 내에서 차의 대중화를 위해 적극적으로 홍보하고 유통망을 확장했다.

도입 초기, 차는 왕실과 귀족사회에서 먼저 유행하여 고급스러운 생활양식의 상징으로 여겨졌다. 영국 귀족들은 차를 사교적인 모임의 중심에 두었고, 차 마시는 시간이 점차 사회적 이벤트로 자리 잡았다. 왕실과 귀족들의 차 생활은 평민들의 차 문화 확산에도 유리한 조건이 되었다.

높은 세금 탓에 밀수까지 성행

영국 정부는 대체로 차에 높은 세금을 부과했는데, 이로 인해 차는 사치품이 되었다. 비싼 가격은 차에 대한 높은 수요의 장벽이 되었지만, 광범위한 밀수 네트워크를 탄생시켰다. 밀수된 차는 정식으로 수입된 차보다 훨씬 저렴했기 때문에, 서민들도 차를 즐길 수 있었다. 차는 영국 사회 전반에 빠르게 퍼졌다.

19세기에는 차에 대한 세금이 크게 낮아졌다. 차 가격 하락은 모든 계층이 차를 쉽게 구매할 수 있게 하였다. 이로 인해 차는 영국 전역에서 더 널리 많이 소비되었다. 세금이 높으면 높은 대로, 낮으면 낮은 대로 차는 넓게 퍼져나갔다.

영국은 산업혁명의 나라다. 산업혁명 또한 차 소비를 증가시키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산업혁명 기간 도시화가 진행되면서 많은 노동자가 공장에 고용되었고, 이들은 긴 노동 시간 피로를 풀기 위해 자극제 역할을 하는 차를 즐겨 마시게 되었다. 차는 상대적으로 저렴하고 준비가 간편했기 때문에 대중 음료로 자리 잡았다.

산업혁명 거치며 차는 귀족들 사치품에서 전국민 대중음료로

차는 단순한 음료를 넘어 영국 사회에서 중요한 상징으로 자리 잡았다. '차 시간(tea time)'이라는 개념은 영국의 일상생활이 차 중심으로 흘러가는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차는 하루 일정의 중심이 되었다. 사람들 사이 유대감을 강화하는 데도 이바지했다. 차 마시는 시간은 가족과의 소통, 친구와의 만남 등 다양한 사회적 활동의 중심이 되었다. 차는 영국 문화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게 되었다.

그중에서도 애프터눈 티타임은 특별하였다. 베드포드 공작부인은 낮에 친구들을 초대하여 차와 간단한 다과를 먹었다. 스펀지 케이크가 주요 메뉴였다. 낮 시간대의 허기를 메워주는 이 차모임은 영국 전체로 퍼져나가 고유한 문화가 되었다.

영국화가 해리 브루커의 애프터눈 티. [사진=유영현 제공]
이후 영국의 식민지 캐나다, 호주, 뉴질랜드, 남아프리카 등으로 번져나갔다. 요즘은 한국에서도 호텔이나 전문 카페에서 애프터눈 티를 제공한다.

차는 유럽 전래 초기부터 건강에 좋은 음료로 인식되었다. 차를 약(藥)으로 보는 경향도 있었다. 특히 소화에 좋다는 인식이 강했다. 수질이 나쁜 영국에서는 이런 점이 특히 두드러졌다.

차를 마시는 습관은 공중보건에도 긍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직접적인 증거가 많지는 않으나, 여러 학자는 홍차 소비가 공중보건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쳤을 가능성을 추적하였다.

19세기 중반, 한 학자는 차가 끓인 물로 만들어지므로 오염된 물을 통해 전파되는 이질과 콜레라를 예방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고 해석하고 이러한 전염병의 감소가 홍차 소비 증가에 의한다고 주장하였다. 21세기 들어서서 간행된 책들에서도 홍차 소비의 증가가 공중보건 개선과 관련이 있다는 가능성이 본격적으로 제기되었다. 다만 당시 행하여진 역학 연구에 의한 증거가 부족하여 학자들의 추론 정도로 해석된다.

영국에서 차의 유행은 알코올 소비를 줄이고, 건강증진에 이바지했다. 홍차에 의한 알코올 소비 감소는 공중보건 개선보다는 명확한 근거를 가진다. 홍차 유행 이전에 영국인들은 나쁜 물 대신 맥주를 많이 섭취하였는데, 네덜란드에서 수입한 진(Gin)은 값싸게 제조할 수 있어 영국인들에게 널리 퍼져나갔다. 당시 영국은 “아침상에 술이 올랐고”, “모든 국민이 일상적으로 취해 살았다”.

술에 찌들어 살던 영국을 구한, 건강 수호신 역할도

알코올 남용을 우려하여 금주운동이 퍼지며 차는 알코올에 비해 더 건강한 대안으로 여겨졌다. 금주운동 모임에서는 차가 대량으로 제공되었다. 중산층과 노동 계층 사이에서 차 소비를 장려하는 문화적 전환을 촉발했다.

당대의 한 학자는 자신의 저서에서 ’진 열풍’(Gin Craze)으로 알려진 18세기 초반의 알코올 남용 문제가 점차 완화된 데는 홍차 소비가 아주 중요한 역할을 했다고 분석했다. 현대의 연구자들도 차가 알코올 소비를 줄이고 알코올 중독의 위험을 감소시키는 대안이 되었다는데 의견이 일치한다. 차 소비 증가가 알코올 소비를 완전히 대체하지는 못하였지만, 사회적 건강을 개선하는 데 일부 이바지하였음은 분명하다.

“영국 사람들은 왜 그렇게 홍차에 열광합니까? 아편전쟁까지 벌였잖아요.” 자주 받는 질문이다. 적절한 답이 많겠지만 나의 답은 항상 다음과 같다. “영국에서 차의 유행은 단순히 음료의 소비를 넘어 영국인의 정체성에 깊이 뿌리내린 문화적 현상입니다.”

유영현 엘앤더슨병원 진료원장

    유영현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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