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날, 산부인과에 남자 고등학생이 찾아왔다”

[난임 전문 세화병원 이상찬 병원장 인터뷰]

함께 온 어머니는 “우리 아이 정자를 냉동보관하고 싶다”고 했다. 무언가 사연이 있다 싶었지만, 세화병원 이상찬 병원장은 더 캐묻지 않았다.

그런데 고등학생이 가져온 정액을 검사해보니, 정자가 하나도 없었다. 무정자증. 이번엔 제대로 물었다. 그랬더니 “아들이 암이 생겨 그동안 항암치료를 받았다”고 했다. 아뿔사~.

그때 그는 “항암 치료 받기 전에 정자를 미리 냉동 보관해두었더라면 좋았을 텐데…”라며 한숨을 내쉬었다.

최근 들어 '젊은' 암 환자들이 많아졌다. 유방암, 혈액암, 고환암 등 종류를 가리지 않는다.

그런데 방사선이든, 항암약이든 항암치료를 받으면 우리 몸 생식세포를 만드는 곳에도 심각한 영향을 끼친다. 남자도, 여자도 가리지 않는다. 대표적인 후유증이 무정자증, 무난자증.

난임 부부에겐 축복 내려주는 전도사...전국은 물론 해외에서도 몰려들어

우리나라 출생률은 OECD 국가, 아니 전 세계에서도 최하위권이다. 그것도 매년 낮아지고 있다. 부부들이 아기를 갖지 않으려 해서다.

하지만 또 다른 한편에선 아기를 갖지 못해 매일 한숨으로 밤을 지새우는 부부도 많다. 이들에게 임신은 하늘이 내려준 엄청난 축복.

그는 바로 그런 축복을 전해주던 전도사였다. 산부인과 안에도 전문분야가 여럿이지만, 한번 꽂히면 거기에 진력하는 성품 탓에 30년 넘게 난임 시술에만 매달려왔다.

다른 곳에선 안된다던 임신까지 줄줄이 성공시키면서 전국에서 환자들이 몰려들었다. 멀리 해외에까지 소문이 퍼졌다. 그가 우스갯소리처럼 “러시아에도, 중국, 일본에도 내 손주들이 많다”고 하는 것은 그 때문.

한번은 러시아에 출장 갔을 때, 한 러시아 여성이 일곱 살쯤 돼 보이는 아이 손을 잡고 찾아왔다. “선생님 덕분에 이 아이가 태어날 수 있었다”며 아이에게 그를 설명해주려 애썼다. 그 아이는 이 병원장에게 피아노 연주도 들려주었다. 900km가 훨씬 넘는 이역만리까지 이어진, 참 특별한 인연이었다.

“그땐 난임 시술, 특히 시험관 시술이 중요한 시기였죠. 병원들끼리 시험관 아기 성공률을 서로 자랑하고 하던 때였으니···. 하지만 아무리 애써봐도 역시 임신과 탄생은 ‘신(神)의 영역’이었어요. 시험관 수정을 위해 수년간 온갖 노력을 다했는데도 안돼서 결국 포기했는데, 그러고 1, 2년 후에 오히려 자연임신이 된 부부도 있고요. 다른 아이를 입양하고 잘 키우고 있는데 어느 날 덜컥 임신이 된 부부도 있더군요.”

[사진=클립아트코리아]
결국, 인간의 과학이 많은 일을 하지만, 또 다른 키(key)는 역시 마음이 가진 건가 싶었다. 그의 눈길도 차츰 몸과 마음의 문제로 바뀌어갔다.

신에 맞서기엔 인간의 능력이 너무나 부족하다는 걸 받아들였기 때문. “시험관 시술 능력을 계속 키워나갔지만, 그 이상으로 난임 여성들 마음을 다독여주는 ‘심신(心身) 상담치료’도 중요하다는 걸 절감했다”고 했다.

애초 시험관 아기 임신율을 어떻게 더 높일 수 있을까 하며 시작(1997년)했던 ‘세화심포지아’에 2014년부터 인문학이 등장하는 계기도 됐다.

이질적인 둘 사이를 보는 시각도 변해갔다

‘과학과 인문학의 충돌: 창조적 파괴’에서 ‘과학과 인문학의 융합: 혁신(끝없는 나그넷길)'로, 그러다 다시 '과학과 인문학의 화해: 비움(내려놓음)'으로 바뀌었다. 마치 신에게 대들다, 방황하고, 그러다 결국 꼬리 내렸던 그의 궤적과 닮아있다.

그래서 올해 세화아카데미 주제는 '과학과 인문학의 교류: 소통(희망)'.  "세상사 모두 팔자소관"이란 말도 있지만, 그래도 다시 희망이라도 품어보는 건 사람이어서다.

반면, '과학' 영역에서의 이번 주제는 아주 명쾌하다. "아직 결혼 전이라면 항암치료를 받기 전에 반드시 난자나 정자를 냉동 보관해두라"는 것. 그래야 나중에 자기 아이를 가질 수 있다는 희망이라도 있기 때문.

또 "늦은 결혼을 생각하는 미혼 여성이라면 한 살이라도 더 젊었을 때 난자를 냉동 보관해두라"는 것도 비슷한 맥락이다. 지금은 '독신'을 당당히 외치지만, 사람 일 나중에 어떻게 될지 알 수 없다. 나이 들어 좋은 배우자를 만난다면, 냉동 보관해둔 자신의 난자가 그때 더 큰 축복으로 다가올 수도 있다는 얘기다.

"냉동 보관하려면 여자 나이 30대 중반, 즉 35세 이전이 가장 좋습니다. 그땐 난소가 건강해 난자가 잘 생깁니다. 그래서 시험관 아기 시술의 임신율도 높아지고요. 30대 후반이나 40대 이후부턴 건강한 난자를 빼기도 쉽지 않아요."

여기서 여자 나이는 생물학적 나이라기보단 '난소'의 나이다. 건강검진의 혈액검사 받을 때 옵션으로 선택하는 '가임력 검사'로 알 수 있다. 난소에서 나오는 호르몬의 양으로 측정한다.

이상찬 세화병원 병원장. [사진=코메디닷컴]
난자, 정자 냉동보관, 항암치료 받기 전엔 중요한 이슈

세화병원이 난자를 냉동 보관하기 시작한 건 꽤 오래됐다. 지금까지 182명 여성의 난자들을 ’보호‘하고 있다. 이를 다시 해동해 임신에 성공시킨 사례도 많이 나왔다. 최근 급속냉동 및 해동 기술이 발전하며 냉동해도 건강한 상태로 보존하는 기술이 좋아진 덕분이다.

또 세화엔 정자은행도 있다. 정자와 난자는 극도의 미세(微細)세계지만, 거기엔 생명 탄생과 인간 존재의 온갖 신비로움이 두루 농축돼 있다. 사람의 손길로 다 담아내기엔 아직 너무 먼 세계.

그래서 이상찬 병원장은 그걸 놓지 못한다. 어쩌면 "신의 영역을 넘보는 불손한 사나이"(김성종 추리소설작가)라는 여정이 이번 생(生)엔 어쩔 수 없는 모양이다.

    윤성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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