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전자 편집으로 난치성 백혈병 치료 첫 성공
DNA의 문자인 염기를 바꾸는 ‘염기 편집’을 암치료에 첫 적용
난치성 혈액암에 걸린 10대 소녀에게 유전자 편집기술의 하나인 ‘염기 편집(Base Editing)’을 세계 최초로 적용해 치료에 성공했다고 영국 BBC가 11일(현지시간) 보도했다.
올해 13세인 영국 레스터의 소녀 앨리사는 지난해 5월 ‘T세포 급성 림프구성 백혈병(ALL)’ 진단을 받았다. ALL은 림프구계 백혈구가 암세포로 변해 골수에서 증식해 말초 혈액을 타고 간, 비장, 림프계, 대뇌, 소뇌, 척수 등을 침범하는 질병이다. 백혈구에는 B세포와 T세포가 있는데 몸 밖에서 침투한 병원체를 죽이는 역할을 수행하는 T세포가 악성종양이 되는 병이 T세포 ALL이다.
앨리사는 이를 치료하기 위해 화학요법과 골수이식을 받았지만 소용이 없었다. 모든 치료가 실패로 돌아가자 앨리사는 “결국 나는 죽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녀의 어머니는 키오나는 작년 크라스마스가 딸과 함께 보내는 마지막 크리스마스라 생각했고 올해 1월 앨리사의 생일에는 하염없이 울기만 했다고 밝혔다. 앨리사는 어차피 머리카락을 잃게 될 것이란 생각에 머리카락도 기증하기로 했다.
바로 그때 영국 런던에 있는 그레이트 스트리트 오먼드 어린이병원(GOSH) 의료진이 6년 전 처음 개발된 신기술인 염기 편집 치료법을 제안했다. 의료진의 설명을 들은 키오나는 반신반의했으나 앨리사의 결단으로 올해 5월 치료에 착수했다.
염기(鹽基‧base)는 생명의 언어다. 모든 생명체의 DNA는 A(아데닌), C(시토신), G(구아닌), T(티민)라는 4개의 염기로 구성된 암호문이기 때문이다. 알파벳이 의미를 전달하는 단어를 구성하듯 우리의 DNA에 있는 수십억 개의 염기들은 우리 몸을 위한 사용 설명서를 구성한다. 염기 편집은 유전자 코드의 정확한 부분을 확대한 다음 특정 염기의 분자구조를 다른 염기로 변환해 사용 설명서를 바꾸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의사와 과학자로 이뤄진 대규모 의료진은 암에 걸린 앨리사의 T세포를 추적해 죽일 수 있는 새로운 유형의 T세포를 개발하기 위해 염기편집 기술을 사용했다. 먼저 기증받은 골수에 있는 수백만 개의 건강한 T세포에 대해 4번의 염기 편집을 시행했다.
먼저 이들 T세포가 앨리사의 몸을 공격하지 않도록 표적화 메커니즘을 무력화시켰다. 두 번째로 모든 T세포에 있는 CD7이라고 불리는 화학적 표시를 제거했다. 세 번째로 새로 디자인된 T세포가 화학 요법 약물의 공격에 살아남도록 투명 망토를 달아줬다. 마지막으로 새로운 T세포에게 앨리사 몸에 있는 모든 T세포(암세포 포함)를 파괴할 수 있도록 CD7 표시가 있는 것을 제거하라는 명령을 입력했다. 새로운 T세포에는 이 표시가 지워졌기 때문에 상호 공격을 피할 수 있다.
앨리사는 이 치료를 받고 한동안 격리 생활을 해야 했다. 새로 디자인된 T세포가 암세포가 된 세포 외의 다른 정상적 T세포를 공격하기 때문에 T세포가 완전 대체되기 전까지 감염에 취약해지기 때문이다. 한 달 뒤 차도를 보이자 앨리사의 면역체계를 다시 키우기 위해 두 번째 골수이식이 이뤄졌다. 앨리사는 그렇게 16주 동안 격리된 채 입원생활을 했다. 이후 퇴원해 정상생활을 하면서 암에 걸린 후 두 번째 크리스마스를 맞게 됐다. 6개월이 지난 시점까지 암세포는 발견되지 않은 앨리사는 “이런 기회를 가질 수 있었다는 것이 놀랍고, 매우 감사하다”며 “이 치료법이 미래에 다른 아이들에게도 도움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GOSH의 의사이자 유니버시티칼리지런던(UCL)의 와심 카짐 교수는 “그녀는 이 기술로 치료를 받은 첫 번째 환자”라고 밝혔다. 그는 이 유전자 조작이 다양한 질병에 걸쳐 "엄청난 잠재력"을 가진 "매우 빠르게 움직이는 과학 분야"라고 말했다. 그는 6년 전 염기편집 치료법을 개발한 데이비드 류 미국 하버드대와 매사추세츠공대(MIT)가 공동설립한 브로드연구소 교수 연구진의 일원이었다. 현재까지 이 기술로 치료를 받고 있는 환자는 앨리사를 포함해 10명으로 현재의 기술로는 연간 12명이 이 치료의 혜택을 받을 수 있다고 그는 덧붙였다.
앨리사에게 적용된 염기 편집 기술은 현재 개발되고 있는 유전자 편집 기술의 빙산의 일각에 불과하다. 데이비드 류 교수는 이 기술이 개발되고 불과 6년 만에 임상에 적용돼 효과를 발휘하는 것이 “약간 초현실적으로 느껴진다”면서도 “"염기 편집의 치료적 응용은 이제 막 시작되고 있다”고 밝혔다.
그는 염기 편집 기술을 더 정교하게 발전시킨 프라임 편집기술도 개발했다. 널리 알려진 크리스퍼 유전자 가위가 문제 있는 유전자를 제거하는 3세대 유전자 편집기술이라면 염기편집과 프라임 편집은 DNA의 염기서열을 바꿔 쓰는 방법으로 결함이 발생한 유전 명령을 수정한다는 점에서 4세대 유전자 편집기술로 불린다. 류 교수는 유전자 이상으로 발생하는 겸상적혈구빈혈과 고콜레스테롤 가족력, 베타 지중해성빈혈 같은 유전질환의 임상치료에도 이 기술이 적용되고 있다면서 “치료를 위한 인간 유전자 편집의 시대에 이제 막 접어든 것”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