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핫닥터] "부정맥 돌연사 막아라" 환자 가계까지 챙기는 의사

⑥고려대의료원 부정맥센터 최종일 교수

 

“열심히 공부해서 제 병 고쳐주세요.”

고려대 안암병원 순환기내과 최종일 교수(48)는 2013년 조교수 때 미국 듀크대 이온채널연구소의 제프리 핏 교수(현 코넬대 교수) 문하로 연수를 떠나며 50대 초반 환자의 당부를 가슴 깊이 새기고 몸이 힘들 때마다 떠올렸다.

최 교수는 당시 부정맥의 세계적 대가 김영훈 교수(현 고려대의료원장)가 국내 최초로 설립한 부정맥센터에서 전극도자절제술을 비롯한 다양한 방법으로 숱한 부정맥 환자들을 살리고 있었지만, 정확한 원인을 몰라 제대로 진단도, 치료도 할 수 없던 유전성 부정맥 환자들 때문에 가슴이 시렸다.

“유전성 부정맥은 평소 증세가 없다가 첫 증세가 실신 또는 심장마비입니다. 심장마비가 오면 10~20%만 회복되고 나머지 대부분은 세상을 떠나거나 뇌사에 빠져서 정확히 진단해서 급사를 예방해야 합니다. 그때에는 환자가 유전성 부정맥이 의심돼도 정확한 진단이 쉽지 않아서….”

최 교수는 스승 김영훈 교수가 길을 닦아놓은 하버드대에서 심방세동 연구의 깊이를 더 할 수도 있었지만, 황무지와도 같았던 듀크대로 향했다. 그러나 듀크대의 핏 교수는 기초부터 실전까지 다 배우려면 5년이 걸린다고 했다. 주어진 시간은 2년 밖에 없는데…. 최 교수는 듀크대가 미국 국립보건원(NIH)과 함께 개설한 임상연구대학원 의과학 석사(Master of Health Science. MHSc) 과정에도 등록했기 때문에 아침 7시 반에 출근해서 실험실과 강의실을 뛰어다니며 밤늦게까지 연구에 매달려야했다. 주말도 ‘가족과의 행복한 시간’을 꿈꿀 수조차 없었다. 최 교수는 결국 미국 의사라면 5년 이상 걸릴 공부를 2년 만에 마치고 귀국, 국내 최초로 유전성 심장질환 클리닉을 설립하고, 전국에서 몰려오는 유전성 부정맥 환자들을 치료하고 있다.

“미국 연수 전 응원해준 환자는 유전성 우심실 이형성증으로 확진하고, 환자뿐 아니라 자녀까지 건강을 관리하고 있습니다. 환자의 언니에게도 진단을 권했지만, 이를 거절하고 등산 갔다가 급사하고 말았어요. 보다 더 적극적으로 권했어야 하는데….”

최 교수는 국내 부정맥 분야에 씨를 뿌린 김성순 전 연세대 의대 교수, 꽃을 피운 스승 김영훈 교수에 이어 ‘3세대 선두주자’로 평가받고 있는 의사다. 고려대의료원 부정맥센터에서 다양한 부정맥 환자를 치료하며 특히 유전성 부정맥의 진료, 연구 성과에서 세계적으로 인정받고 있다.

최 교수는 고려대 의대 본과 2학년 때 ‘의학의 수학’이라고 불리는 순환기학에 대한 심완주 교수의 명쾌한 강의와 김영훈 교수의 열정적 지도에 매료돼 내과를 평생 전공으로 선택했다.

내과 전공의 때에는 쟁쟁한 교수들 아래 하드 트레이닝을 받으며 밤새 아침 브리핑을 준비해야만 했던 순환기내과에 도전욕구가 생겼다. 특히 전공의 1년차 때 극적 경험이 마음에 핀셋을 박았다.

“새벽 2시경 심혈관병동에서 살짝 선잠을 자고 있다가 ‘환자가 숨을 쉬지 않는다’는 간호사에 외침에 화들짝 깨서 후다닥 6인실 병실로 뛰어갔습니다.”

전공의 초년생은 불도 안 켜고 심장이 멈춘 ‘확장성 심근병증’ 환자에게 기관(氣管) 삽관을 했다. 정신없이 가슴을 팍팍 누르며 심폐소생술을 시행한 지 10여 분. 간호사가 외쳤다. “심장이 뛰어요, 숨이 되돌아왔어요.”

다음날 오전 8시 심혈관센터 회의실에서 교수 6명과 전공의 20여명이 참석하는 ‘아침 브리핑’에서 간밤의 상황을 보고했더니 국내 첫 여성 심장 전문의 심완주 교수가 고개를 끄덕였다. “환자가 돌아가실 뻔 했는데, 제대로 대처했네.”

최 교수는 전공의 3년차 때 신장내과 병실에서 한 보호자로부터 “선생님, 2년 전 새벽에 옆 침실의 환자 살리는 것 봤고 감동받았어요. 대단해요.”라고 인사를 듣고 속으로 되뇌었다. 심장 전공하기를 잘 했네.

최 교수는 그 무렵 김영훈 교수를 대학원 석사 지도교수로 모시면서 부정맥 분야에 본격적으로 발을 디뎠다. 밤낮을 모르며 새 영역을 개척하던 스승 아래에서 정상 귀가는 꿈도 못 꿀 일. 20여 년 동안 스승과 함께 아침부터 다음날 새벽까지 전국에서 몰려오는 환자들을 치료해 왔다. 전공의를 거쳐 강원도 정선과 태백에서 공중보건의사 근무를 마치고 모교 병원에 복귀하니 전임의 1년차는 혼자 뿐. 아침 6시부터 새벽 4시까지 근무하면서 심장병 환자를 보고, 진료·연구 자료를 정리했다.

2008년 김영훈 교수가 미국 하버드대 협력병원인 매사추세츠종합병원(MGH)의 교환교수로 떠나자 스승의 환자들을 책임지며 귀가를 포기했다. 2010년 3월 조교수가 되고 얼마 뒤에는 방사선 피해를 막으려 무거운 납옷을 입은 채 비후성 심근병증과 부정맥이 함께 온 환자를 꼬박 16시간 시술하다가 하혈해서 응급 수술을 받기도 했다. 예과 때 검도반에서 열심히 심신을 단련해 건강에 자신이 있었지만 몸이 무쇠는 아니었다. 그래도 전국에서 환자가 몰려오기 때문에 수술자국이 아물기도 전에 엉거주춤 수술방에 들어가야 했다.

최 교수는 한 달에 600~700명을 진료하고 40여 명에게 전극도자절제술, 심장박동기, 제세동기 등을 시술하고 있다. 초기에는 10시간 이상 걸리던 전극도자절제술이 지금은 3시간 남짓으로 줄었지만 전국에서 환자가 몰려오는데다가 연구와 장비 개발 때문에 지금도 밤 이슥할 때 퇴근할 수밖에 없다.

최 교수의 환자 세 명 가운데 한 명은 다른 의사가 보낸 환자다. 매달 5, 6번 의사들을 상대로 강의를 하기 때문에, 의사가 ‘혹시…’하고 보낸 환자 중에서 화급한 환자를 발견하기도 한다. 해외에서도 의뢰가 온다. 지난해에는 제주도에서 영어강사를 하던 20대 미국 여성 K씨가 일본에 여행 갔다가 실신했다. K씨는 어렸을 때 숨진 언니를 떠올리며, 유전성 부정맥이 의심된다고 진단했던 미국 하버드대 보스턴어린이병원의 주치의에게 연락했다. 이 의사는 호주 시드니대의 크리스토퍼 샘사리안 교수에게 연락했다가 “한국에는 닥터 최가 있잖아요?”라는 말을 듣고 최 교수에게 K씨를 부탁했다. 최 교수는 제주도 한라병원의 후배 장진근 박사에게 연락해서 응급조치를 취하게 한 뒤 환자를 진단, 돌연사 위험이 있는 ‘긴 QT 증후군’으로 확진하고 치료했다.

최 교수는 이렇게 환자를 살리면서 미국 듀크대 임상연구대학원에서 닦은 의학통계학을 바탕으로 굵직한 연구결과도 잇따라 내고 있다. 2017년 대한심장학회 추계학술대회에서는 우리나라 급성심장마비의 14.7%가 유전성 부정맥이어서 서구보다 월등히 많다는 것을 발표했다. 2019년에는 잦은 음주가 심방세동의 발생 위험을 높인다는 것을 밝혀내 《유럽심장학회지》에 발표했으며, 학회는 이 논문을 주요 기사로 선정해 배포했다. 2020년에는 5년 이상 고혈압 약을 복용한 환자는 부정맥 발생 위험이 2.34배 높아지며, 이 가운데 비만은 3배 이상 높아진다는 것을 입증해서 《미국심장학회지》에 발표했다. 이 논문은 학술지의 최고 논문으로 선정됐다.

최 교수는 의사의 능력에서 환자와의 공감능력이 가장 중요하고, 다음이 지식, 그 다음이 경험이라고 믿고 있다. 그러나 이 때문에 ‘행복한 고민’에 빠지기도 한다.

경북 포항시의 40대 환자는 심장 돌연사 위험이 있는 볼프파킨슨화이트(WPW) 증후군으로 병원에 왔다. 심한 빈맥 증상이 없으면 ‘조기흥분 증후군’으로 분류돼 경과만 관찰하는 것이 치료 원칙. 환자는 무리하면 급사 위험이 있지만 목숨을 걸고서라도 철인3종 경기를 하고 싶다고 졸랐다. 최 교수는 건강보험심사평가원의 보험료 삭감을 각오하고 전극도자절제술을 시행했고, 환자는 소원을 풀었다. 이후 매년 과메기를 보내오는데, 보내지 말라고 해도 환자는 요지부동이다.

3개월마다 배우자와 함께 찾아오는 70대 환자는 매번 커피와 간식을 사서 진료실에 들어온다. 가정형편이 어려운 것을 잘 알기 때문에, “앞으로 사오지 않으셔도 된다”고 신신당부하는데도 환자 부부가 고집을 꺾지 않아서 가슴이 아련하다.

전남 신안군 섬에서 배를 타고 육지로 나와 KTX로 갈아타고 서울에 도착, 하룻밤을 묵고 진료 오는 환자에겐 “서울까지 올 필요 없이 목포에서 진료 받으면 되고 조금이라도 문제가 생기면 챙겨드리겠다”고 했는데도, “선생님 꼭 보러 와야겠다.”며 6개월마다 찾아온다.

최 교수는 이 환자를 비롯해서 산골이나 섬에서 서울까지 오는 환자를 돕기 위해서 ‘부정맥 진단 손목시계’를 개발했다. 기존에는 부정맥을 정확히 진단하기 위해 1~2일 검사기기를 붙인 채 지내다가 병원에 와서 장비를 제거하거나 교체해야 했다. 특히 졸도하거나 심방세동이 있으면 고가의 ‘이식형 심전도 기록장치(Loop recoder)’를 삽입해야 했다. 기존 방식들은 환자 데이터 분석에만 최장 1개월 이상 걸렸다. 최 교수가 개발한 ‘손목시계형 심전도 측정기’ 는 정보통신기술(ICT) 분야 규제 샌드박스 1호로 선정됐고, 임상시험에서 효과가 입증되고 있다.

인터넷에서 ‘최종일 교수’를 검색하면, 꼼꼼하고 친절한 진료에 대한 평판으로 가득하다. 최 교수는 전문 간호사들과 함께 환자의 상태를 파악하고 생활요법까지 세심히 알려준다. 첫 환자에겐 10분 이상 진료 보며 온갖 이야기를 들으며, 급하다고 여기면 즉시 응급실이나 당일 시술센터로 보내서 밤늦게라도 시술한다. 병실에도 하루 두 번 회진하며 환자들에게 자신감을 심어준다.

그는 끊임없이 자신에게 묻는다. “의사는 신이 아니며 늘 잘못할 수 있다. 관성적으로 시술을 하지 않나? 지금 이 치료가 환자에게 가장 도움이 되는 것인가?”

    이성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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