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뜸 욕설 고함...‘진상 환자’ 어떻게 대처할까
한미영의 의사와 환자 사이
‘목소리 큰 사람이 이긴다’는 말은 병원에서 확실히 적용되는 말이다. 자신이 원하는 치료가 되지 않았다고 환불을 요구하며 조용한 대기실을 고성과 욕설로 진료 분위기를 흐리는 사람을 우리는 흔히 진상환자라고 부른다. 이들이 바로 블랙컨슈머다.
제품이나 서비스에 대해 고의적으로 악성민원을 제기해 보상금을 타내는 소비자를 업계에서는 ‘블랙컨슈머’로 부른다. 자신의 피해를 부풀리거나 음식물에 이물질을 넣어 보상금을 타내고, 판매된 상품이 하자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일부러 망가트려 새로운 물건으로 보상받는 등 블랙컨슈머의 행태는 범죄 수준에 가깝다. 마찬가지로 소비자의 권리를 악용한다는 점에서 진상환자는 블랙컨슈머와 일맥상통한다. 진상환자는 진단이나 처방이 잘못되었다거나 적절치 못한 시술과 수술로 인해 피해를 봤다는 식으로 과정이나 절차에 대해 문제를 제기한다. 심한 경우 의료사고 쪽으로 몰고 가는 경향도 있다.
블랙컨슈머는 보상을 목적으로 하기 때문에 자신이 적절히 보상받지 못했다고 생각하면 사실을 과하게 부풀려 의사를 협박하고 교묘하게 진료를 방해한다. 블랙컨슈머는 조용한 대기실에서 고성과 폭언으로 일관한다. 그래야 더 의사가 긴장하고 집중한다는 것을 이들은 잘 알고 있다. 때로는 병원에 수시로 전화를 걸어 클레임 수준이 아니라 영업방해까지 일삼는다. 또한 직접 보건소나 심평원에 민원을 넣어 병원을 곤란에 빠뜨리기도 한다. 뿐만 아니라 병원에 탈세혐의가 있다고 주장하며 국세청에 신고하겠다는 협박 아닌 협박을 하는 경우도 종종 있다.
더 큰 문제는 우리가 모르는 사이 인터넷이나 SNS상에까지 악성루머를 퍼트리는 것이다. 다수의 공분을 사고자 불만을 부풀리고 이야기를 과장한다는 점에서 사이버 공간은 블랙컨슈머가 소기의 목적을 달성하기에 충분히 활용가치가 높다.
누구나가 잠재적인 블랙컨슈머
골치 아픈 블랙컨슈머의 행동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손해를 인식하는 인간의 소비심리를 먼저 파악해야 한다. 심리경제학을 개척한 미국의 데니얼카너먼과 아모스트베르스키가 주창한 ‘전망이론’에서는 이익과 손실이 동시에 발생했을 때 사람들은 손실에 더 민감해 한다고 한다. 예를 들어 과일가게에서 사과 8개에 1만원을 주고 샀는데 덤으로 사과 2개를 더 받았다. 집에 와서 사과봉지를 열어보니 사과 하나가 썩어 먹을 수 없다는 사실이 과일가게 사장에 대한 불신과 분노로 바뀌게 되었다. 결과적으로 2개를 덤으로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하나의 손실을 더 크다고 받아들이는 것이다.
전망이론은 ‘손실혐오’ 이론으로도 쉽게 표현된다. 100원의 손해를 봤든 5만원을 손해 봤든 소비자에겐 손해를 봤다는 사실이 중요하지 금액은 별로 중요하지 않다. 때문에 병원 데스크에서 얼마 되지 않은 돈으로 직원과 다툼이 있는 환자를 쉽게 볼 수 있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환자가 치료받은 서비스에 비해 과잉지불 한 느낌이 든다면 손해를 본 것으로 인식해 예민하게 받아들인다. 또한 의사가 진료 중 설명한 치료와 수술이 결과와 다를 경우 마땅히 받아야 할 서비스를 못 받은 것으로 인식해 민감하게 행동할 수 있다. 자신의 권리를 찾기 위해 거침없는 행동도 마다하지 않게 된다.
보통은 까칠한 사람이 쉽게 클레임을 제기하고 소란을 피울 가능성이 높다고 판단한다. 이러한 손실혐오 이론은 개인의 성향과는 상관없이 모든 환자가 잠재적인 블랙컨슈머가 될 수 있음을 설명한다. 그렇다고 모든 환자를 예의 주시하고 경계할 수는 없다. 손해를 부풀려 보상을 받으려는 환자를 경계해야 한다는 데 초점이 맞춰진다. 진료실에서 관심을 갖고 주의를 기울여야 하는 환자부류는 따로 있다.
진료실에서 관심을 갖아야 할 환자
모든 치료가 그렇겠지만 처방에 성실히 응한 환자와 그렇지 못한 환자는 결과부터가 다르다. 처방 후 재방문의 요구에도 응하지 않고 뜬금없이 찾아와 부작용을 논하며 잘못된 처방을 문제 삼는 경우가 있다. 이럴 경우를 대비해서라도 평소 설명하는 데 소홀해서는 안 된다. 또한 재방문 오더와 관련된 부작용을 강력히 언급했음을 의무기록으로 남기는 습관을 가져야 한다. 블랙컨슈머가 의사에게 의료사고를 운운하면서 보상을 요구할 때 적절하게 대응하기 위한 방법이기 때문이다.
평소에 환자가 치료에 대한 불만을 이야기 할 때 의사가 초기에 어떻게 응대하느냐에 따라 상황이 호전될 수도, 크게 악화될 수도 있다. 이렇듯 블랙컨슈머를 예방하는 데에도 초기대응에 필요한 골든타임이 있다. 의사의 권위적이고 거친 태도는 불만환자를 블랙컨슈머로 만드는 기폭제 역할을 한다.
의사는 운이 좋든 나쁘든 자신의 잘못과는 상관없이 병원에서 환자가 느끼는 불쾌한 감정에 대해 도의적인 사과를 해야 한다. 그 다음 불만이 무엇인지에 대한 경청 자세를 가져야 한다. 서비스업계에서는 불만에 집중하는 경청태도를 업무의 기본으로 본다. 초기진화에 큰 효과가 있기 때문이다. 환자는 자신의 불만을 의사가 들어주기만 해도 문제 해결의사가 있다는 것으로 해석한다. 환자들이 병원에서 고성을 지르며 진상을 부리는 이유 중에 하나는 자신이 처한 문제에 좀 더 집중해 달라는 뜻이기도 하다. 그래서 관심을 끌기 위해서라도 더 큰 소리로, 더 큰 액션으로 진상을 부린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환자가 무엇을 원하는지를 파악하라
‘말 한마디로 천냥빚을 갚는다’는 속담이 있다. 환자와 말이 통하지 않는다고 무시하고 비난해서는 안 된다. 무례한 의사의 태도에 가만히 있을 환자는 없다. 최대한의 예의를 갖추고 충분히 환자가 느끼는 감정에 대해 공감을 표하는 것이 좋다. 그래야 의사와 환자가 대화와 설득을 오가며 원하는 대안을 함께 찾을 수 있다. 그렇다고 큰 소리 내는 환자가 거북해 섣불리 금전적 협상에 임해서도 안 된다. 왜냐하면 그게 블랙컨슈머가 노리는 절대적인 답이기 때문이다.
최선을 다한 응대에도 불구하고 대화로 풀 생각을 하지 않고 고성과 욕설로 무장한 진상환자는 지체 없이 경찰의 도움을 받아 우선 이들을 병원 내에서 철수시키도록 해야 한다. 시시비비를 가리는 일은 차후에 문제이다. 경찰까지 부르는 일은 없어야 하겠지만 행여나 문제를 병원 내에서 풀려고 하다가 더 큰 화를 가져올 수 있는 만큼 공권력의 도움을 받는 게 빠른 진화에 도움이 된다.
블랙컨슈머는 병원 밖에서 의사를 괴롭히기도 한다. 금전적 보상을 노리는 지능적인 블랙컨슈머의 경우 인터넷과 SNS를 노린다. 인터넷 비방글은 발견즉시 사실여부를 확인하고 사이버수사대에 신고해야 한다. 지체하는 순간 소문은 사실이 되고 의사의 명성과 신뢰에 치명적인 영향을 준다. 블랙컨슈머의 목적은 병원을 흔들고 의사의 불안을 가중시켜 보상의 범위를 키우는 데 있다는 것을 잠시도 잊어서는 안 된다.
의사가 보기엔 단순한 문제들이 환자들에게는 의료사고처럼 여겨지는 때가 있다. 이때는 전문기관의 공정한 평가를 받는 것이 현명하다. 한국소비자원이나 한국의료분쟁조정중재원에 중재를 신청해 전문 감정단의 의견으로 환자의 주관적인 주장에 맞설 수 있다. 문제 해결에 시간이 걸릴 지라도 의사의 명예와 권위를 지킬 수 있는 확실한 방법이다. 블랙컨슈머는 불만이나 문제가 발생했을 때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 모르는 불안감에서 거친 행동을 하는 경향이 있다고 한다. 그래서 문제의 해결절차나 연락가능 담당자 등을 알려주면 환자 자신이 처한 상황을 좀 더 객관적으로 볼 수 있게 된다. 환자 스스로 필요이상 과도한 행동을 했다는 것을 스스로 알게 되면 문제의 해결이 좀 더 수월해질 수 있다.
평소 사소한 행동 주시해야 큰 사고 막는다
만약 환자가 협박과 진료방해를 일삼는다면 적절한 법적 조치도 강구해야 한다. 이런 경우는 명예훼손과 모욕죄, 공갈죄와 협박죄로 민형사상의 책임을 물어야 한다. 비록 빈도가 그리 많지 않다고 해서 블랙컨슈머와 같은 문제를 그냥 덮고 넘어가서는 안 된다. 병원에서의 잡음이 싫다고 해서 시시비비도 가리기 전에 쉽게 금전적 보상에 나서는 경우 오히려 다른 블랙컨슈머를 불러들이는 일임을 명심해야 한다.
블랙컨슈머에 대한 예방법으로 하인리히법칙이 많이 응용된다. 이 법칙은 미국의 보험사에서 일했던 하인리히가 발견한 것으로 1건의 대형사고가 나기 전에는 29건의 크고 작은 사고가 나고 300건의 이상 징후가 보인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하인리히법칙은 평소 나타난 문제의 징후를 찾아내고 관리함으로써 대형사고를 예방하는 것이 가장 효율적인 일임을 강조한다.
날이 갈수록 점점 더 의사를 불신하는 풍토가 아쉽기는 하다. 그렇다고 세태만을 비난할 수는 없는 일이다. 의사 스스로의 점검이 필요한 시점으로 평소 반복되는 환자들의 불만을 되새김질 해볼 필요가 있다. 분명 진료기록 부재, 설명의 부족, 응대소홀 등과 같이 블랙컨슈머에게 빌미를 제공하는 요소가 있기 마련이다. 평소 진료습관을 점검하고 예방메커니즘을 만드는 일은 블랙컨슈머의 출입을 막는 수단이 될 수 있다.
※이번 칼럼은 대한이비인후과개원의사회보 56호 HEAD MIRROR(ILLUMINATING THE WELL-BEING OF OUR PATIENTS)에도 실린 내용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