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옥같은 참호전투...전쟁 부산물 예술로 부활
●이재태의 종 이야기(10)
제1차 세계대전 참호전투
2014년 7월28일은 세계 제1차 대전이 발발한 지 100주년이 되는 날이다. 1914년 6월 28일 사라예보에서 19세 청년 가브릴로 프린치프가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왕위 후계자 프란츠 페르디난트 대공 부부를 암살하자, 1개월 뒤 오스트리아가 세르비아를 전격적으로 침공하여 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였다. 오스트리아 황태자 암살 사건은 대부분의 유럽 국가들과 직접적인 이해관계가 없었으나, 강대국들은 기존의 동맹조약과 복수감정이 얽히면서 전쟁에 끌려들어가게 된다. 이 전쟁은 두 개의 대치되는 거대한 동맹의 강대국을 끌어당겼는데, 하나는 영국, 프랑스, 러시아 제국의 삼국 협상 기반의 나라와 러시아와 슬라브 민족국가 간의 연합국이고 다른 하나는 독일과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이 속한 동맹국이다. 이탈리아 왕국은 독일,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과 삼국 동맹에 가입되어 있었지만 동맹국으로 전쟁에 참여하지는 않았고 나중에는 오히려 연합국으로 참전하였다. 이러한 국가들 간의 복잡한 동맹관계에 따라 결국 일본, 미국이 연합국에 가입했으며 오스만 제국, 불가리아 왕국은 동맹국에 가담함으로써 6천만 명의 유럽인을 포함한 전 세계 7천만 명의 군인이 참전한 ‘거대한 전쟁(Great War)’이 되었다. 4년 4개월이나 지속된 이 전쟁에서는 사망자만 1500만 명이 넘었는데. 독일군 170만 명, 러시아군 170만 명, 프랑스군 140만 명, 영국군 90만 명 등 수없이 많은 전사자가 발생하였다.
1914년 여름, 유럽 각국이 전쟁에 뛰어들면서 수백만 명이 대중 집회를 열어 전쟁선포를 환영하였고, 조국을 수호하겠다는 애국심과 승리에 대한 자신감이 넘쳤다. 개전 초기 독일은 러시아와 상대하기 전에 먼저 프랑스를 치는 ‘슐리펜 계획’에 따라 병력을 이동시켰다. 그러나 독일군은 파리에 가까워지면서 보급난을 겪고 더구나 러시아와의 동부전선에 대비한 2개 군단 병력의 이동으로 전투 병력도 충분치 않았다. 결국 독일군은 파리 인근의 마른 강 유역 전투에서 프랑스와 영국군의 강력한 저항에 부딪히며 패배하였고 4년에 걸친 악몽 같은 ‘참호전(trench warfare)’이 이어진다.
기관총이 새로 등장한 이 전쟁에서 연합군은 나폴레옹 시절의 ‘돌격 앞으로’ 전술을 쓰다가 막대한 희생을 치렀다. 기관총의 위력으로 방어진영이 유리해지자, 연합군과 독일군은 프랑스와 독일 사이의 ‘서부전선’에 구덩이를 파고 그 속에서 공격해오는 적을 막는 데 주력하게 된다. 10월에 독일군은 벨기에의 항구도시 앤트워프를 점령하지만 엄청난 손실도 입었다. 투입된 약 36,000명의 학도예비군 중 온전하게 살아남은 자는 6,000명에 불과했으며 그 중 한명이 히틀러였다. 이후 서부전선에는 1914년 12월. 스위스에서 영국해협까지 거의 1000㎞에 달하는 철통같은 참호방어선이 구축되었고 전쟁은 인적 물적 자원을 동원한 총력 소모전 양상으로 흘렀다. 진지는 시간이 흐를수록 철조망과 콘크리트로 점점 단단해졌고, 참호전을 중심으로 뚜렷한 승리나 패배가 없는 전투상황이 지속되는 가운데 사상자 숫자만 엄청나게 늘었다. 프랑스군은 1915년 2-3월 샹파뉴에서 폭 1.5 km도 되지 않는 지역을 탈환하느라 24만 명 이상의 병력을 잃었다. 프랑스 동북부 알자스로렌 지방의 베르당 계곡의 전투에서는 프랑스와 독일군이 야산 한 개를 점령하려고 10개월간 싸워 양측에서 100만 명의 사상자가 발생하기도 했다. 이어진 솜강 전투, 아라스 전투에서도 지겨운 참호전이 계속되었고, 막대한 인적 피해가 발생하였다. 한편 제1차 세계대전에서는 기관총, 곡사포, 전투기, 잠수함, 탱크 등의 무기가 처음 도입되었고, 독일군은 참호전의 승리를 위해 독가스를 사용하는 잔인한 전쟁을 벌였다.
동부 전선에서는 러시아군이 오스트리아-헝가리로 진격하는데 성공했지만, 동프로이센 침공은 독일군의 반격으로 실패하게 된다. 1914년 11월에 오스만 제국, 1915년 이탈리아와 불가리아, 1916년 루마니아 왕국이 참전하여 전선이 확대되어갔다. 1917년 독일의 잠수함 공격으로 여객선이 피습되자 미국이 독일에 선전포고를 하였고, 이후 연합국은 반격에 들어갔다. 1918년 들어 연합국은 독일군의 참호를 점령하고 결국 동맹국의 군대가 차례대로 투항했다. 불가리아, 오스만 제국 그리고 1918년 11월 4일 오스트리아의 순서로 항복했다. 오스트리아가 항복하던 날, 독일의 킬(Kiel) 군항에서는 오래 지속된 전쟁과 낮은 처우에 항의한 독일 해군 수병들의 폭동이 일어나고, 독일 각지에서는 노동자들이 연이어 파업을 하며 군경과 충돌하자 독일황제는 퇴위하고 네덜란드로 망명했다. 독일은 11월 혁명으로 군주제에서 공화정으로 전환되었고, 마침내 1918년 11월 11일 연합국과 휴전을 맺고 항복하며 1차 세계대전은 끝이 났다.
전쟁 이후, 독일 제국,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러시아 제국, 오스만 제국 등 4개 주요 제국은 해체되고 많은 영토와 인구를 잃었다. 러시아는 공산국가가 되었고, 발칸 반도와 중동 지방에서 많은 신생 독립국들이 생겨났다. 1919년 6월. 승전국이 된 프랑스는 베르사유 궁전에서 독일에 200억 마르크를 요구하는 베르사이유 강화조약을 맺었다. 앞서 1871년 보불전쟁에서 승리한 프로이센 왕 빌헬름 1세가 프랑스 나폴레옹 3세에게 굴욕적인 항복을 받던 바로 그 자리였다. 미국은 전쟁이후 세계 최강국으로 떠올랐고, 윌슨 대통령의 ‘민족자결주의’는 제3세계 약소국들의 독립운동을 촉진하였다.
참호 속에서 비는 무서운 적이었다. 프랑스 북부의 플랑드르 전선에는 비도 잦았지만 지표면이 바다보다 낮아 땅을 파기만 하면 물이 솟아올랐다. 이 지역을 맡은 영국군에게 가장 큰 적은 물과 진흙이었다. 참호는 늘 진흙탕으로 발목까지 빠졌고, 더 깊이 빠지는 경우도 많았다. 병사들은 때로 허리·겨드랑이까지 차오르는 차가운 물속에서 며칠씩 계속 근무를 서야 했다. 1914년 10월 25일부터 이듬해 3월 10일 사이에, 비가 오지 않은 날은 18일뿐이었다. 이 가운데 11일은 기온이 영하로 내려갔다. 1916년 3월에 내린 비는 35년 만에 최고 수준이었다. 전쟁 중 작성된 대대 보고서에는 진흙탕으로 인한 고통을 언급하는 내용이 가득하다. 때로 병사들은 수렁에 빠지지 않기 위해 체중을 골고루 분산시키려고 길게 누워야만 했다. 1916년 솜 전선의 참호에서 한 대대는 진흙 속에서의 탈진과 익사로 16명의 병사를 잃었다. 포탄이 터진 자리에 생긴 구멍도 위험했는데, 전투 중 부상으로 정신이 혼미해진 병사에게 물이 찬 포탄 구멍은 죽음의 구덩이였다. 소총이 진흙에 빠지면 작동이 안 됐기에 병사들은 사격을 하기 위해 총에 오줌을 갈겼다고 한다.
1917년 프랑스의 병사들은 돌격 명령을 받은 후, 양떼처럼 ‘음매∼’ 소리를 내며 전진하는 저항을 했다. 도살장에 끌려가는 양처럼 그들을 죽음으로 몰아넣는 정치인·지휘관들에 대한 애처로운 저항이었다.
잦은 비로 물이 흥건하게 고이는 참호 안에서 생활하는 병사들은 추운 날씨에도 장시간 발이 물에 젖어있는 채로 돌아다녀야 했다. 발이 마를 새가 없는데다 꽉 끼는 군화를 신고 있었으므로 참호족(trench foot)이라는 질병을 앓았다. 특히 참호 진지가 독일군 보다 낮은 쪽에 위치했던 연합군 쪽 병사들이 더 많이 고통을 받았다. 물이 들어찬 참호에 발이 오랫동안 잠기게 되면 모세혈관이 수축해 피부에 붉은 홍반과 청색증이 나타나며 점차 감각이 없어진다. 더 진행되면 연조직이 괴사되고 부패되어 발에서 썩는 냄새가 난다. 물집과 상처가 생기기도 하는데 여기에 진균류가 감염되어 궤양을 일으킨다. 치료를 하지 않으면 괴저로 진행되어 절단수술을 하거나 목숨을 잃을 수 있다. 1차 세계대전 중, 무려 10만 명의 병사가 참호족으로 목숨을 잃었다.
전쟁은 역사를 바꾸고, 예술과 유행을 창조한다. 이 전쟁 중에 여성용 생리대가 처음 사용되었는데 이후 여성들의 사회진출이 쉬워졌다고 한다. 또한 전투에서 난무한 포탄과 총알들은 수거되어 장식품, 꽃병, 식기, 탁상종 등으로 재탄생 되었는데 이런 물품들은 ‘참호 예술(trench art)’이라 하며, 수집가들에게 인기가 있다.
오늘날 남성들이 즐겨 입는 트렌치코트(trench coat)는 겨울 참호 속의 혹독한 날씨로부터 영국군과 연합군을 지켜주기 위해 만들어진 옷이었다. 트렌치코트는 통기성·내구성·방수성이 뛰어나고 가슴 쪽의 비바람을 차단하기 위한 나폴레옹칼라, 허리 벨트, 바람이나 추위를 막을 수 있게 만들어진 손목의 조임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뒷부분에 주름이 잡힌 헐렁한 옷이다. 1914년 제1차 세계대전 기간 중 토머스 버버리가 영국 육군성의 요청을 받고 레인코트로 이 코트를 개발하였다하여 일명 버버리(Burberry)코트라고도 한다. 영화 ‘애수’에서 로버트 테일러(Robert Taylor)가 버버리를 입고, 연인 비비언 리와 비가 내리는 워털루 브릿지에서 포옹하는 명장면을 기억할 것이다. 20세기 중반 이후 버버리 코트는 남성들의 로망이 되었고, 당연히 버버리는 부자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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⑤ 딸의 작전에 넘어가 맞은 ‘그녀’... 종도 20개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