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망률 3.8%가 말이 돼?” 세계 권위지 어깃장
2012년 가을 연세대 세브란스병원 신경과 허지회 교수(55)는 뇌졸중 분야의 최고 권위지 ‘뇌졸중(Stroke)’ 지의 논문 심사위원으로부터 이메일을 받았다. 얼마 전 제출한 논문에 대해 “귀 병원의 사망률이 너무 낮아 믿을 수가 없다”고 물음표를 던지는 내용이었다. 세계에서 뇌졸중 치료를 가장 잘 한다고 알려진 독일 병원들의 치료 후 한 달 내 사망률이 4~5%인데, 한국의 병원이 어찌 3.8%밖에 안 되냐는 어깃장이었다.
허 교수는 “한국 주요병원의 뇌졸중 치료성적이 좋고 특히 우리 병원은 BEST와 NICE 등의 프로그램으로 사망률을 낮추고 있다”고 설명하고 온갖 자료를 보완, ‘당연한 사실’을 ‘어렵게’ 설명해 이 학술지에 논문을 발표할 수 있었다.
허 교수가 언급한 BEST와 NICE는 우리나라 뇌졸중 치료의 수준을 한 단계 업그레이드시킨 방법으로 평가 받는다.
BEST는 ‘Brain salvage through Emergent Stroke Treatment(응급 뇌졸중 치료를 통한 뇌 지키기)’의 준말로 2004년부터 뇌경색 환자가 최대한 빨리 치료를 받기 위해 도입됐다.
뇌혈관이 막힌 뇌경색 환자가 병원에 도착하면 전자의무기록에 주황색으로 ‘BEST’ 마크가 뜨며 최우선 환자로 분류돼 관련 진료과 의료진들이 뇌혈관을 막고 있는 피떡(혈전)을 녹이는 시술을 하는 준비에 동시다발적으로 들어가게 된다.
허 교수는 “예전엔 응급실의 의사가 일일이 각과에 전화해서 컴퓨터단층촬영(CT)을 예약하고 신경과 의사에게 연락하고 필요하면 수술방도 알아봐야 했다”면서 “이 때문에 시간이 지체돼 살 수 있는 환자가 숨지는 경우도 있었다”고 말했다. 그는 “전산을 잘 활용하면 시간을 벌 수 있고 소중한 생명을 살리고 후유증을 최소화할 수 있겠다는 생각에 BEST 프로그램을 개발했다”고 설명했다.
허 교수는 2007년 국제학술지 ‘뇌혈관질환’지에 BEST 프로그램으로 당시 응급실 도착 후 국내 평균 79.5분보다 훨씬 빠른, 56분 만에 혈전용해제를 투여하고 있다는 사실을 발표해서 국내외 학계의 박수를 받았다. 현재는 그보다 더 시간이 앞당겨져 40분대에 이뤄진다. 서울의 주요병원을 포함해서 국내 10여 개 대학병원에서 BEST를 가르쳐달라고 요청했고, 허 교수는 기꺼이 정보를 공개했다.
2006년 선보인 NICE는 ‘Neurologic Outcome and Quality of Life Improvement through Came Excellence in Stroke(뇌졸중 환자의 신경학적 치료결과와 삶의 질의 전반적 증진)’의 약자다. 환자의 전 치료과정이 최상의 상태로 이뤄지도록 각 진료과의 의료진이 긴밀하게 협조하도록 고안됐다. 이 프로그램에 따라 환자는 금연 교육처럼 병의 원인이 된 생활습관을 고치는 교육도 받는다. 보호자에게도 뇌졸중 교육을 한다. 재활치료가 필요한 경우엔 입원 뒤 24시간 안에 재활의학과 전문의가 찾아와 환자에게 맞는 재활교육 프로그램을 짠다. 이 모든 일이 동시에 이뤄진다.
BEST와 NICE는 의료의 질은 표준화에 달려 있다는 허 교수의 신념이 빚어낸 결과다.
허 교수는 뇌경색 환자를 볼 때 교과서에서 한 치도 벗어나지 않는다. 환자가 진료실에 들어오면 “어떻게 오셨습니까?”라고 묻고, 이미 아는 내용도 말을 자르지 않고 끝까지 듣는다. 뇌경색 환자에게도 청진기를 빠뜨리지 않고 댄다. 그는 제자들에게 “의사가 자기 주관에 따라 생략하기 시작하면 중요한 것을 놓칠 수가 있다”면서 “나는 습관을 유지하기 위해서 꼭 청진을 한다”고 말한다.
그의 두 형은 허창회 전 대한한의사협회장, 허종회 민족의학신문사 발행인으로 한의학의 유명인사다. 누나 둘은 약사와 간호사이고 매형은 산부인과 의사, 치과의사여서 어릴 적부터 병원에서 일하는 것을 자연스럽게 생각하고 의대에 지원했다. 의대에서도 응급실에서 일하는 것이 재미있고 보람찼다. 본과 3학년 때 3주 동안 오전 수업 뒤 참가하는 응급실 실습에 재미를 붙여 집에 가라고 해도 밤늦게까지 선배 의사와 환자 곁을 지켰다. 선배들과 함께 자면서 응급상황에 대처했고 응급환자가 많은 신경과를 지원했다.
허 교수는 미국 연수를 앞두고 두 갈래에서 고민을 했다. 당시에는 뇌졸중 환자의 신경세포가 죽는 과정을 규명하는 연구가 유행이었으며, 이 과정을 억제해서 신경을 보호하는 약이 나올 것으로 믿는 의학자가 많았다. 일부 의학자는 뇌졸중은 혈관의 문제이므로 혈관을 막는 피떡을 녹여 ‘막힌 곳’을 뚫는 치료가 우선이라고 봤다. 허 교수는 환자를 보면서 혈관이 열쇠라고 믿었지만, 당시 미국의 유명 대학병원에서는 ‘신경보호치료’가 대세였다.
그는 논문을 검색하고 수소문해서 미국 샌디에이고에 있는 세계 최대 민간 생명의학연구소인 스크립스 연구소의 델 조포 교수가 ‘혈관설’의 대가라는 것을 알아내고 “연구비를 안 받아도 좋으니 함께 연구하고 싶다”는 편지를 썼다. 그는 스크립스 연구소에서 뇌경색이 오면 혈관벽의 미세한 혈관이 깨져서 뇌가 붓고 뇌혈관이 터지게 된다는 것을 밝혀 ‘뇌대사’지에 발표했다. 이 논문은 지금까지 다른 학자들의 논문에 200여 회 인용될 정도로 ‘혈관설’이 부각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허 교수는 1999년 귀국해서 혈전용해제 치유 개발과 뇌경색환자 치유법 표준화의 두 토끼를 잡고 있다.
그는 1990년부터 뇌경색 환자의 정맥에 혈전용해제를 투입한 다음 동맥에도 투여해서 치료효과를 높였으며 이 결과는 2004년 ‘미국신경방사선학회지’에 발표돼 호평을 받았다. 2001년 혈전용해제로 혈관의 피떡을 녹였지만 다시 혈전이 생긴 환자에게 혈소판응집분해제(엡시지맙)을 정맥으로 넣어 치료하는 방법을 개발해서 로이터통신 등 외국 언론에 소개되기도 했다. 그는 또 ‘뇌심혈관연구 중심사업’의 일환으로 뱀독에서 추출한 원료로 혈전용해제를 개발하고 있다.
허 교수는 2002년 국내 처음으로 뇌졸중 집중치료실을 개설해서 급성기 뇌졸중 환자를 집중관리하는 시스템을 갖췄고, BEST와 NICE로 뇌경색 환자의 생존율과 치료율을 높이고 있다. 허 교수 팀은 2010년 국내 최초로 국제의료평가위원회(JCI)로부터 뇌졸중 임상치료 프로그램 인증(CCPC)을 받았고 지난해 재인증을 받았다. 이 인증은 미국 외 국가에서는 지구촌을 통틀어서 6번째로 받은 것이다.
허 교수는 제자들로부터 ‘교과서,’ ‘선비,’ ‘백발의 신사’ 등으로 불리지만 더러는 ‘삼촌,’ ‘오빠,’ ‘형님’이 되기도 한다. 그는 토요일 회진이 끝나면 병원 3층 커피숍에 가서 동행한 제자 2, 3명의 사적인 고충을 경청하고 문제를 해결하려고 노력한다.
환자에게도 마찬가지다. 환자가 아무리 억지를 부려도 화를 내는 법이 없다. 환자의 목소리를 최대한 들으려고 애쓴다. 제자와 간호사들도 모두 그를 닮아 친절하고 섬세하다. 이 때문에 뇌졸중집중진료실에는 수많은 환자들로부터 ‘감사의 편지’가 날아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