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달이’ 이봉주, 137m 신화 만들다

김화성의 종횡무진 육상이야기 ⑪

잠실대교가 시작되는 35km지점. 나란히 어깨를 맞대며 달리던 케냐의 키루이(당시

27세)가 갑자기 성큼 성큼 속력을 내기 시작했다. ‘봉달이’ 이봉주(당시 37세)도

젖 먹던 힘까지 다하며 떨어지지 않기 위하여 안간힘을 다했다. 키루이의 최고기록은

2시간 6분44초. 이봉주의 최고기록은 2시간 7분 20초. 46초 차.

마라톤에서 35km지점 이후에서의 1m 차이는 심리적으로 ‘십리 거리’나 마찬가지이다.

만약 나란히 선두다툼을 벌이다가 한 선수가 10m쯤 뒤처진다면 그 선수는 천리만리쯤

뒤처진 것 같은 절망감에 빠진다. 한마디로 나란히 선두를 달리다가 한번 뒤처지면

그대로 끝이나 마찬가지인 것이다.

이봉주는 키루이가 치고나가자 즉시 따라붙었다. 하지만 역시 나이는 어쩔 수

없었다. 10cm…50cm…1m…2m…10m…. 키루이는 점점 멀어져 갔고 이봉주는 자꾸만

뒤로 처졌다. 길가 시민들은 발을 동동 굴렀다.

 “봉달아, 힘내라!” 목이 터져라 외쳤다. 주먹을 불끈 쥐고 허공에 내지르며

“파이팅”을 소리쳤다. 손바닥이 부서져라 박수를 치는 사람들도 있었다. 모두들

안타까워 애간장이 탔다. 손수건으로 눈시울을 훔치는 아주머니도 보였다.

그렇다. 이봉주는 너무 많이 뛰었다. 40만km쯤 뛴 승용차라고 할 수 있었다. 그

때까지 16년 동안 공식대회 35번 완주(황영조는 5년 동안 8회)는 기네스북에 올라야할

정도이다. 아무리 세계적인 선수라도 많아야 20번 정도 완주하고 나면 은퇴하기 마련이다.

키루이는 당시 겨우 5번째 뛰는 선수였다. 갓 뽑은 새 차나 같았다. 2만~3만km쯤

달린 ‘씽씽 잘나가는’ 세단이라고 할수있다. 게다가 이봉주보다 10년이나 젊다.

그만큼 힘이 있고 스피드가 빠르다.

마라토너에게 35km지점은 ‘삶과 죽음’의 아득한 경계라고 말할 수 있다. 일단

그 경계를 지나면 확실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 가도 가도 사막 길. 타는 목마름.

휘청거리는 다리. 터질 것 같은 심장. 길은 사라졌다가 다시 나타나고, 나타났다가

또 사라진다.

마라톤의 엔진은 폐와 심장이다. 이봉주의 최대 산소섭취량(1분간 몸무게 1kg당

산소섭취량)은 78.6ml(20대 평균 남자 45ml)이다. 선수시절 황영조의 82.5ml보다

적다. 무산소성 역치도 70% 정도로 현역 시절 황영조의 79.6%보다 낮다. 무산소성

역치란 어느 순간 피로가 급격히 높아지는 시점을 말한다. 가령 이 값이 50%라고

한다면 신체 능력이 50%를 발휘할 때 갑자기 피로가 몰려와 운동능력이 급격히 떨어진다.

이봉주는 35km 지점에서 몸의 바닥까지 와 있었다. 무산소성 역치가 한계점인

70%를 지났다. 기댈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절대 절명의

순간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기적이 일어났다. 결승선을 1.575km를 앞둔 40.62km지점. 한때 30여m까지

떨어졌던 이봉주가 어느새 키루이와 어깨를 나란히 하더니 갑자기 뛰쳐나가기 시작했다.

길가 시민들은 처음엔 자신의 눈을 의심했다. 설마 했다. 그러나 몇 번이나 다시

봐도 틀림없는 이봉주였다. “원 세상에!” 모두들 자신도 모르게 박수를 치기 시작했다.

‘봉달이’ 이봉주, 137m 신화 만들다

“봉달이 잘한다”

“보~옹달이, 대한민국~”

인도를 따라 이봉주와 함께 달리는 사람도 있었다. 태극기를 휘두르는 사람도

있었다. 그냥 “와! 와!” 하며 무턱대고 소리를 지르는 시민도 있었다. 너무 숨이

막혀 말을 잊고 그냥 껑충껑충 뛰는 사람도 보였다.

2007년 3월18일 서울에서 열린 제78회 동아마라톤. 이봉주는 2시간8분04초의 기록으로

결승선을 맨 먼저 통과했다. 케냐의 폴 키프로프 키루이는 25초 늦은 2시간8분29초의

기록으로 2위에 골인했다. 25초 차이는 거리로 환산하면 약137m. 이봉주는 이 137m의

‘머나먼 길’을 ‘깡’과 ‘오기’라는 ‘정신 근육’으로 한방에 날려 버렸던 것이다.

이봉주 스토리

이봉주는 공을 잘 찬다. 천안 성거초등학교 시절 그의 축구 실력은 인근에서 알아줄

정도였다. 포지션은 공격수. 지금도 이봉주는 휴식 시간이면 공을 즐겨 찬다. 물론

그의 스피드는 아무도 못 따라간다. 게다가 발기술도 빼어나다. 오인환 감독은 혹시

부상이라도 당할까봐 “제발 공 좀 차지 마라”고 하지만 이봉주는 배시시 웃으며

슛을 날린다.

이런 이봉주가 천안농고에 입학하자마자 축구부를 제쳐두고 육상부를 택했다.

가난 때문이다. “육상부는 바지 하나만 있으면 될 것 같았다”는 게 그의 말.

이봉주는 고등학교를 4년 동안 3군데나 다녔다. 인근의 삽교고에 1학년으로 재입학했다가

육상부가 해체되자 광천고로 옮겨 졸업했다. 고교시절 대회성적도 시원찮았다. 다행히

3학년 때 전국체전 10km에 나가 3위 턱걸이를 한 덕분에 간신히 서울시청에 들어갈

수 있었다.

이봉주는 풀코스 도전 15번 만에 96년 애틀랜타올림픽 2위에 올랐다. 그 뒤로도

두 번(2000시드니 24위·2004아테네 14위)이나 더 도전했지만 끝내 올림픽월계관을

쓰는 데는 실패했다. 아시아경기 2연패(98방콕·2002부산), 2001보스턴마라톤

우승 등 히말라야 8000m급 봉우리는 두루 올랐지만 에베레스트 정상에 오르는 것은

끝내 실패한 것이다.

1990년 이봉주가 광천고 3학년 때 이야기다. 이봉주는 전국체전을 앞두고 충남대표로

선발돼 대전공설운동장에서 합숙훈련을 하고 있었다. 그러 던 어느 날 장대비가 쏟아졌다.

선수들은 물론 지도자들도 으레 훈련이 없을 줄 알고 트랙에 나갈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 때 한 선수가 그 장대비속에서 트랙을 묵묵히 달리고 있었다.

이봉주였다. 그 당시 충남대표 감독을 맡고 있었던 대전체고의 김영준 선생은 “그때는

이름도 잘 모를 정도로 무명이었지만 ‘쟤가 언젠간 엄청난 선수가 될 것’이라고

생각했었다”고 말했다.

이봉주는 2001년 4월 보스턴 마라톤 우승 다음날 귀국도 미루고 곧바로 8월 세계육상선수권이

열리는 캐나다 애드먼턴으로 날아갔다. 이봉주는 가자마자 오 감독과 함께 코스를

둘러봤다. 그리고 그 다음날은 서울로 향할 예정이었다. 그런데 바로 그날 이봉주는

새벽에 일어나 35km지점에서 결승선까지 조깅을 하며 코스를 샅샅이 살폈다. 대회를

마친지 이틀 만에 달리는 것도 놀랍지만 우승의 만족감에 빠지지 않고 다음 대회를

준비하는 이봉주의 집념에 모두 혀를 내둘렀다.     

이봉주는 하루 종일 말이 거의 없다. 어쩌다 하는 말도 어눌하다. 그러나 그는

성실하다. 아무리 힘든 훈련도 묵묵히 해낸다. 그는 깔끔하다. 방은 언제나 깨끗하고

침대나 책상 등 모든 것이 가지런히 정돈돼 있다. 다른 사람한테 싫은 소리 한번

못하지만 한번 아니다 싶으면 그 누구도 그의 고집을 꺾을 수 없다. 99년 겨울 후배들을

이끌고 코오롱을 뛰쳐나와 지방 여관을 전전하며 훈련했던 일은 너무나 유명한 이야기이다.

그 때 육상계에선 여러 말들이 떠돌았다.

“이봉주는 이제 끝났다” “이봉주가 스승 정봉수 감독을 배신했다” 등등. 그러나

그 때도 이봉주는 아무 말 없이 훈련에만 몰두 했다. 여러 곳에서 팀 창단을 조건으로

오라고 했지만 그는 응하지 않았다. 나 혼자 살자고 후배들을 놔두고 갈 수 없다는

게 그 이유였다. 그 때 이봉주는 훈련비로 자신이 먼저 1000만원을 선뜻 내놓고 4000원짜리

식당 밥을 먹으며 후배들과 함께 달렸다. 결국 그해 겨울 소속팀 없는 무적 선수로

출전한 2000년 도쿄마라톤에서 한국 최고기록(2시간7분20초)으로 우승했다.

골인 직후 이봉주는 어린아이처럼 엉엉 울었다. “정말 원 없이 울었어유~ 그날

밤 축하 파티 자리에서도 울고 또 울었어유~” 이봉주의 말이다.

그러나 시련은 계속됐다. 그 해 시드니올림픽에서의 추락(24위)과 2001년 초 아버지의

별세로 또 한번 충격에 빠진 것이다. 한창 보스턴마라톤에 대비해 훈련에 급피치를

올리던 때였다. 오인환 감독도 “그 때가 가장 힘들었다”고 말한다. 하지만 이봉주는

2001년 4월 보스턴마라톤에서 우승하며 오뚝이처럼 다시 일어섰다.

이봉주가 마라톤에 눈을 뜬 것은 94년 당시 정봉수감독이 이끄는 코오롱에 입단하면서부터.

이전까지 이봉주는 풀코스 8번 완주에 최고기록 2시간10분27초에 불과했다. 우승도

호놀롤루 대회가 고작. 마침 오인환 코치가 거의 같은 시기에 부임했다. 결국 이들은

이때부터 입단동기이자 사제지간으로서 끈끈한 연을 이어오고 있는 셈이다.

코오롱에서 이봉주의 출발은 순탄치 않았다. 코오롱엔 ‘몬주익의 영웅’ 황영조와

당시 한국최고기록(2시간8분34초) 보유자인 2년 선배 김완기가 있었다. 이봉주는

어디까지나 2진에 불과했다. 팀에서도 크게 신경써주지 않는 판에 성격마저 내성적이고

조용했다. 오죽했으면 생전에 정봉수감독이 “봉주는 평소 옆에 있는 지 없는지도

모르는 놈”이라고 말했을까.

그러나 이봉주의 속은 끓고 있었다. 그는 방황했고 술을 마셨다. 가끔 팀을 이탈해

정감독으로부터 심한 질책도 들었다. 크고 작은 부상까지 이어졌다. 이때 그의 마음을

다잡아준 사람은 현재 그의 동갑내기 아내인 김미순씨. 아이러니컬하게도 이봉주는

김씨를 황영조의 소개로 만났다. 김씨가 마침 황영조의 고향 초등학교 동창생이었던

것.

이봉주는 96년 3월 애틀랜타올림픽 티켓이 걸린 동아국제마라톤에서 2위에 오르면서

꽃을 피우기 시작했다. 라이벌 황영조는 29위(2시간29분45초)로 올림픽출전이 좌절됐고

이어 은퇴를 선언했다. 이후 이봉주는 애틀랜타올림픽 2위-98방콕아시아경기 우승-2000도쿄마라톤

2위(한국최고기록 2시간7분20초 작성)-2001보스턴마라톤 우승-2002부산아시아경기에서

우승했다.

이봉주는 1970년 10월11일(음력) 충남 천안 성거에서 태어났다. 혈액은 A형. 전문가들은

하나같이 “이봉주는 A형 마라토너의 전형”이라고 말한다. A형은 완벽주의자다.

계획한 연습을 제대로 하지 않으면 안절부절 어쩔 줄 몰라 하며 다른 것은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것이다. 어쩌다 부상으로 연습을 하지 못해도 마찬가지.

다른 사람과의 승부보다도 자신과의 싸움에 몰두하는 스타일이다. 하지만 스트레스를

잘 받는 게 약점. 똑같은 일인데도 스트레스를 받는 강도가 O형의 3배나 된다. 자신의

몸을 힘들게 하여 목표를 이루기 때문에 지도자가 이를 잘 조절해 줘야한다.

A형은 레이스 스타일도 자기 페이스를 유지하면서 후반에 한발 한발 따라가는

스타일. 정말 이봉주가 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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