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고등어·꽃게에 납 넣어 수출했다 ‘딱’ 걸렸는데…

1999년에 국무조정실 정책평가위원회에 4개 분과(경제1, 경제2, 국방외교, 사회문화)가 있었는데 필자는 사회문화위원회 간사위원으로 위촉돼 2001년 4월까지 근무했다. 분과별로 1년에 2건 정도 특별프로그램을 준비해 토의했다. 1990년대에 중국산 식품의 수입이 늘어 안전에 대한 우려가 쌓이자

의대생 증원, 1990년대 실패 되풀이 않으려면…

1994년 5월 필자는 대한의학협회(현 대한의사협회) 학술이사로 선임됐다. 연세대 의대 교무부학장 임기가 끝나기 3개월 전이었고, 이사 중 제일 젊었다. 예방의학 전공 학자는 보건복지부와 가깝다는 느낌이 있어 의료계에서 꺼리는 느낌이 있었는데, 필자가 처음 상임이사가 됐다. 이후에는 여럿이 상임이사가 되

병원 설립 100년 만에 진료부원장에 非임상의사 임명

1990년 세브란스병원 진료지원 담당 부원장으로 임명을 받았다. 세브란스의 한 세기 역사상 임상의사가 아닌 교수가 부원장으로 임명된 것은 처음이었다. 2년 임기가 끝나기 한 학기 전인 1992년 9월엔 의대 교무과장(현 교무부학장)의 중책도 맡게 됐다. 최우선 순위로 교수 인사제도 개선을 염

아이 돌보미 없어 간호사 사직한다는데…

1991년 3월 연세의료원 세브란스병원에 간호, 약제, 의무기록, 영양, 의공학 등 5개 진료지원부서를 담당하는 ‘진료지원 부원장’ 제도가 새로 생겼고, 필자가 임명됐다. 필자는 1982년 존스홉킨스대에서 박사학위를 마치고 귀국했는데, 이듬해에 병원 부원장 제안을 받았지만, 교육과 연구에 집중한다며

美 존스홉킨스대, 한국 의료보험 배우려고…

1977년 국민소득 1000달러, 수출 100억 달러의 제4차 5개년계획 목표가 조기 달성됐다. 1980년대는 비로소 농업국가에서 공업국가로 변모했으며, 북한과의 체제 경쟁에서도 경제적으로 앞서가기 시작했다. 우리나라 보건의료의 국제 활동도 활발해졌다. 해방 후 국제 보건 무대에 씨앗을 뿌린 선각자

70년대 화장지 없는 화장실은 어떻게 바뀌었나

1967년 미국의 세계 1위 제지회사 킴벌리-클라크 사의 임원이 주한 미국대사관을 방문, 한국 진출을 타진했다. 대사관 직원은 한국의 경제사정과 생활문화 등을 알려주면서 부정적 의견을 내비쳤다. 그러면서 “그래도 미래를 보고 투자한다면 유한양행이 그나마 파트너가 될 수는 있을 것”이라고 알려줬다.

은행은 어떻게 병원으로 들어갔나?

1970년대에만 해도 병원 안에 ATM은커녕, 은행 지점도 없었다. 서울 서대문구 신촌로타리에 유일하게 한일은행(현 우리은행) 신촌지점이 있었는데 연세대 교직원과 학생, 세브란스병원 직원, 그리고 병원 입원환자 또는 보호자가 은행을 이용하려면 신촌로타리까지 20~30분을 부지런히 걸어가야 했다. 필

한국이 ‘바퀴벌레 천국’에서 벗어나기 시작한 때는?

1986년 12월 말 미국 볼티모어의 존스홉킨스 보건대학원에 강의하러 갔다. 동료 교수들을 만나러 휴게실에 갔다가 우연히 경제잡지 《포브스(Forbes)》에 그해 10대 상품이 소개된 것을 봤다. 그 가운데 바퀴벌레 퇴치 약 ‘컴배트’가 있었기에 자세히 살펴보았다. 나중에 친구와 선후배들이 오자,

대학병원 청소를 총무과 직원이 돌아가며 했다?

1980년 즈음 정부가 병원시설을 확충하려고 재정차관 제도를 채택해 전국에서 50개 병원이 문을 열었다. 이 가운데 공업지역에 있던 마산 고려병원과 부산 인제백병원은 의료수요가 풍부해 잘 운영됐다. 그러나 나머지 병원들은 대부분 병원의 위치가 부적합하거나 병원경영 능력 없이 주먹구구로 운영했다. 환자도

의료서비스 품질 얘기하면 욕먹은 까닭

1977년에 국민소득 1000달러 목표가 달성됐고, 당연 적용 의료보험이 출범했다. 의료 서비스의 수요가 증가하기 시작했고, 공급도 따라서 증가했다. 의료서비스에 대한 국민 의식의 변화가 눈에 보이기 시작한 것이다. 이에 따라 1980년대에는 아프면 약국이나 약방을 드나들던 시대에서 병의원에 진료받