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의대 안 갔어?”... 전교 1등 이공계 회사원의 또 다른 스트레스
[김용의 헬스앤]
지난 21일 서울 여의도 국회 의원회관에서 열린 ‘이공계 지원 특별법 개정 토론회’. 중년의 정부출연연구기관 고위 간부가 토론석에서 자신의 고3 시절을 얘기했다. “담임 선생님이 ‘네가 원하는 공대나 화학과보다 합격선이 더 낮은 의예과에 지원하라’고 권하셨어요. 하지만 저는 기어코 공대 가려고 재수를 선택했습니다. 수능을 다시 봤고 우리나라 여학생 중 전체 수석으로 공대에 진학했습니다.”
그가 대학에 진학하던 1990년대까지만 해도 이공계가 큰 인기를 끌었다. 컴퓨터공학과, 전자공학과는 물론 물리학과, 화학과 등 기초과학에도 전국의 이과 1등들이 모여들었다. 이공계 열풍에 의대의 바람은 미풍에 불과했다. 이 당시 공대, 이과대를 선택한 과학 영재들이 우리나라 전자, 반도체 분야를 세계 1등으로 이끈 사람들이다. 1970~80년대에도 대학 수석 입학생은 물리학과 등에서 많이 나왔다. 이런 S급(특A급) 인재들이 ‘과학강국 대한민국’의 기반을 단단하게 다졌다.
“왜 그 성적에 의대에 가지 않았어?”
이처럼 의대를 압도했던 공대가 요즘은 ‘의대로 가는 정거장’이 되고 있다. 올해도 서울대 신입생 중 공대에서 휴학생이 많이 발생하고 있다. 의대 진학을 위해 대입에 다시 도전하는 것으로 보인다. 최근 10~15년 사이에 대입에서 의대 쏠림 현상이 심화되고 있다. 반면에 공대의 위상은 점점 낮아지고 있다. 과학-공학자의 꿈을 위해 공대에 진학한 학생들도 “왜 그 성적에 의대에 가지 않았냐”는 말을 자주 듣는다고 한다. 의대 열풍에 ‘과학강국 대한민국’의 주춧돌이 흔들리고 있는 것이다.
국회 ‘이공계 지원 특별법 개정 토론회’에 나온 정부출연연구기관 고위 간부도 “전국 수석 성적으로 왜 의대를 안 갔느냐?”는 질문을 자주 받는다고 했다. 의대를 마다하고 공대를 선택한 이 S급 인재가 수십 년 동안 경험한 이공계 출신의 현실은 어떨까? 그는 “이공계 출신들은 직업 안정성이 보장되지 않는다. 인류와 사회에 기여하는 연구를 하면서도 자긍심을 느끼기 쉽지 않은 구조”라고 주장했다.
‘명퇴’에 맛 들인 민간 기업들... 수많은 이공계 출신이 타깃
이공계의 위상 하락은 1997년 외환위기(IMF) 사태가 결정타가 됐다. IMF의 권고로 기업들이 구조조정을 하면서 ‘명퇴’에 맛을 들이기 시작했다. 지금도 경영이 어려워질 조짐을 보이면 직원부터 자를 생각을 한다. 이익을 많이 내면서도 세대교체라는 명분으로 사정 없이 칼날을 휘두른다. 미래를 위해 연구하는 수많은 이공계 출신들이 타깃이 됐다. 연구기관에서는 50대 중반이 되면 임금피크제 적용으로 월급이 줄어들고, 사기업은 아예 연구 인력을 ‘명퇴’시킨다. 연구자는 더 이상 ‘과학강국 대한민국’을 이끄는 전문직이 아니다. 사회적 인식도 크게 낮아졌다.
의사는?... 사기업 명퇴 쏟아지는 50대가 전성기
의사는 기업의 이공계 인력들이 명퇴하는 50대부터 전성기다. 높은 연봉에 환자를 살피는 보람과 자부심도 느낄 수 있다. 90세, 100세 시대애 ‘의사 면허’는 최고의 가치다. 80세 넘어서도 일하는 의사들이 적지 않다. 물론 아픈 사람을 돌보는 것이 쉽지 않다. 의료 분쟁의 가능성에 가슴 조리기도 한다. 고3 시절 의대를 외면하고 이공계를 선택했던 전교 1등 동창생은 집에서 쉬고 있다.
국내 글로벌 기업들의 위기 징후... 의대에 인재 뺏긴 후유증 시작?
요즘 국내 글로벌 기업들의 위기 징후가 심상찮다. AI 등 최첨단 분야에서 경쟁국에 비해 뒤처지고 있다. 미국 스탠퍼드대 AI 인덱스 보고서(2024년)에 따르면 한국은 2013년~2023년 세계 각국의 AI 민간 투자 규모에서 18위에 머물고 있다. 중국은 미국에 이어 2위를 차지하며 AI 분야를 적극 공략하고 있다. 중국은 이공계 인재의 산실 칭화대 등을 중심으로 눈에 띄는 연구성과를 일궈내며 한국을 따돌리고 있다. 중국의 이공계 열풍은 여전하다. 우수한 인재들이 이공계를 지원하고 있다. 의대로만 몰리는 한국과 격차를 더 벌릴 기세다.
한국의 이공계 출신들은 대학 졸업 시 또 한 번 고민해야 한다. 취업, 국내 대학원 진학, 외국 유학 등이 선택지다. 대기업 취업은 ‘일찍 잘릴까봐’ 꺼림칙하다. 반면에 의대 졸업생은 인턴-레지던트-봉직의나 개원의로 이어지는 길이 탄탄대로다. 전공 선택 때 ‘피안성’(피부과-안과-성형외과 등) 등 인기과를 놓고 고민하지만 의사 면허는 그대로다. 이공계 출신은 기업 재직 시 사내 정치 등 외풍에 휘말리기 쉽다. 천성적으로 상사에 아부를 못하면 능력과 별개로 명퇴 대상자로 찍히기 쉽다.
한국은 미국과 다르다... 오래 재직한 직장에서 나가면 갈 곳 없어
40세 중반에 명퇴를 생각하는 이공계 선배들을 보면서 후배들은 좌절한다. 곧 닥쳐올 나의 앞날이기 때문이다. 기업들도 인사관리를 ‘과학적으로’ 할 필요가 없다. 법적 정년(60세)을 보장하면서 임금피크제를 유연하게 적용하는 등 이공계 인재 지키기에 나서야 한다. 연구직이 아니더라도 ‘선임 연구위원’ 등의 보직을 부여해 수십 년 간의 노하우를 살려야 한다. 그들의 경험과 축적된 자산을 활용할 길은 얼마든지 있다.
한국은 미국 등과 달리 오래 재직한 직장에서 나가면 갈 곳이 없다. 운 좋게 대기업 재직 시 인연을 맺은 중소기업에 가더라도 1~2년이 고작이다. 해고가 쉽도록 하는 노동 유연성의 효율이 떨어지는 나라다. 노동 유연성을 주창하는 대학교수가 있다면 대학교수 직에도 명퇴나 임금피크제를 도입하라고 권하고 싶다. 대학교수는 65세가 정년이다. 나이 들어 연구성과가 뚝 떨어져도 65세 철밥통이다. 일부 교수는 자리만 지키며 유능한 후배들의 앞길을 가로막고 있다.
왜 이공계 진학을 망설이는가?... 의대 쏠림 현상의 가장 큰 이유는?
정년이 보장된 정부출연연구기관 고위 간부가 “이공계 출신들은 직업 안정성이 보장되지 않는다”고 했다. 연구자들은 1997년 외환위기(IMF) 사태 때 줄어든 65세 정년의 복원이 필요하다. 의사처럼 80세까지 일할 순 없어도 50세만 넘으면 명퇴를 의식해야 하는 현재의 기업 풍토에선 이공계 진학을 권할 수 없다. 90세, 100세 시대에 직장에서 잘리면 무엇을 할 것인가? 천신만고 끝에 재취업에 성공해도 이전 직장 연봉의 1/3이면 많이 받는 것이다. 아이들 대학 등록금 마련이 벅차다.
이공계 출신은 의사처럼 ‘평생 면허’가 없다. 의사 못지 않게 해당 분야의 전문성이 뛰어나도 ‘전문가 면허’는 없다. 명퇴하면 수십 년 동안 쌓아 올린 전문성이 모래성이 되고 만다. 이것이 의대 쏠림 현상의 가장 큰 이유다.
시스템 전체가 망가져 뭘 해도 안된다
이공계인재영입에 교육부는 특별대책을 강구할 때가 아닌가 ? 이공계장려는 일 시적이 아니라 장기적인 정책이 절실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