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이 ‘바퀴벌레 천국’에서 벗어나기 시작한 때는?
[유승흠의 대한민국의료실록] (33) 바퀴벌레 퇴치 약 컴배트
1986년 12월 말 미국 볼티모어의 존스홉킨스 보건대학원에 강의하러 갔다. 동료 교수들을 만나러 휴게실에 갔다가 우연히 경제잡지 《포브스(Forbes)》에 그해 10대 상품이 소개된 것을 봤다. 그 가운데 바퀴벌레 퇴치 약 ‘컴배트’가 있었기에 자세히 살펴보았다.
나중에 친구와 선후배들이 오자, 자연스럽게 컴배트에 대해서 대화가 오갔다. 미국의 교수들은 “컴배트를 썼더니 바퀴벌레가 쉽사리 없어지더라”면서 신나게 경험담을 전했다. 필자의 서울 아파트에 바퀴벌레가 있었고, 의대 연구실에도 득실댔다. 그때는 온갖 곳에 바퀴벌레가 득실득실하던 때여서 ‘바퀴벌레와의 동거’가 당연시됐다. 당연히 귀국할 때 컴배트를 몇 상자 사왔다. 컴배트는 1984년 미국 사이나미드 회사가 살충제 성분 피프로닐(Fifronil)을 주원료로 만들어 출시한 제품으로 미국을 비롯한 서구에서 화제가 된 상품이었다.
서울에서 컴배트를 집과 연구실에 놓았더니 얼마 뒤 바퀴벌레가 감쪽같이 사라졌다. ‘서민들이 컴배트를 구입하면 위생에 큰 도움이 될 텐데…’하는 생각에 사로잡혔다.
유한양행 창업자 유일한 박사의 큰조카로 회사의 비상근 이사였던 필자는 유한양행 이사회에서 컴배트의 수입판매를 제안했다. 약사인 이사가 “이전에 컴배트 스프레이를 일부 수입해 시판했는데, 효능이 없어서 유야무야됐다”고 넌지시 반대했다. 다른 이사들도 내 의견에 동의하지 않았다. 두 달 뒤 이사회에 컴배트 수입 판매에 대하여 다시 제안하며 “내가 책임지겠다”고 했더니 일단 반대 목소리는 없었다.
보건의료계 유명인사들과 바퀴벌레와 컴배트에 대하여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랬더니 어느 중견 제약사가 관심을 갖고 수입을 진행하고 있다는 소식이 들렸다. 회사에 알려줬더니 유한양행도 움직임을 보였다.
마침 유한양행 임원이 업무 상 미국에 갔는데, 사이나미드에 들려서 확인하기로 했다. 유한양행이 사이나미드와 오랫동안 업무 관계를 가진 터이기에 유한양행 안양공장에서 제품을 만들어 판매하기로 했다. 1988년 당시로는 획기적인 바퀴벌레 퇴치 약이 시판에 들어갔다.
컴배트가 국내 시판이 되자 금세 효과가 입소문이 났다. 원료 수입을 선박으로 했는데, 수요가 밀려들어 기다리지 못하고 항공편으로 도입했다. 유한양행은 매출이 엄청나게 늘어났다. 관련 임직원 너댓 명은 3년 뒤 포상휴가로 필리핀 마닐라에서 며칠 즐길 수 있었다. 사이나미드가 제품 일부를 다른 회사에 넘겼으므로 유한양행은 2005년까지 시판했다.
컴배트 수입판매를 제안하였던 필자에게는 아무런 보답이 없었다. 그러나 예방의학을 전공하는 전문가로서 바퀴벌레를 퇴치하는 데 기여했다는 것이 큰 기쁨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