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남편은? 정년 없는 의사 vs 정년 의미 없는 이공계
[김용의 헬스앤]
고 송해 선생이 생전에 ‘주부들이 가장 선호하는 남편감’에 본인이 포함되었다고 우스갯소리를 한 적이 있다. 전국노래자랑 녹화로 일주일에 3~4일 집을 비우고, 90세 넘어서도 돈을 벌어오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편안한 분위기를 위해 시중에 떠도는 농담을 소개한 것이다.
최근 심화되고 있는 의대 입학 열풍을 생각하면서 문득 송해 선생의 말씀이 떠올라 옮겨 적었다. 의대 열풍은 여러 이유가 있지만 기대수명이 크게 늘어난 것도 꼽을 수 있다. 월급쟁이가 은퇴하면 20~30년을 놀아야 하는 시대다. 50세에 명퇴하면 집에서 머무는 시간이 더 늘어난다. 본인은 물론 아내도 힘들다. 평생 가족을 위해 헌신했지만 퇴직 후 아내의 눈치를 살펴야 하는 월급쟁이 출신들의 비애가 고스란히 숨어 있다.
퇴직한 교수, 교사, 공무원 등은 두둑한 연금이 있지만 일반 기업 출신들은 임원으로 퇴직해도 빛 좋은 개살구다. 초거대 기업을 제외하곤 임원 봉급이나 퇴직금도 생각만큼 큰 액수는 아니다. 오히려 최근 5~6억 원을 받고 명퇴한 은행원들이 부럽다. 60세 중반이 돼야 나오는 국민연금을 받기 전까지 ‘소득 크레바스’를 넘는 것이 힘겹다. 재취업도 쉽지 않다. 중소업체 취업에 성공해도 임금은 전 직장의 절반 이하, 근무 기간도 길어야 2~3년이다. 식당을 차렸다가 힘들게 모은 돈을 까먹기 일쑤다. 요즘은 그냥 노는 게 돈을 버는 것이라는 얘기도 나온다.
대기업 취업 보장되는 반도체 관련 학과 대거 미달... 왜?
의사는 기업이나 자영업 오너를 제외하곤 정년이 없는 직종이다. 의사 면허가 있으니 병원을 퇴직해도 재취업이 쉽고 동네병원을 차려서 다시 안정된 수입을 올릴 수 있다. 본인의 의지만 있으면 송해 선생처럼 90세에도 현역 생활을 할 수 있다. 공부 잘했던 이공계 출신들은 퇴직해 집에서 소일할 나이에 병원으로 출근한다. 돈 버는 것도 좋지만 나이 들어서도 일을 한다는 게 부럽다.
졸업하면 대기업 취업이 보장되는 명문대 반도체 관련 학과가 대거 미달됐다는 소식이다. 극심한 취업난에 유명 대기업 입사가 보장되는데 왜 인재들이 이공계를 외면할까? 명문대 이공계에 입학을 해도 잠시 머물다 지방 의대 등으로 다시 빠져 나간다. 요즘 명문대 이공계 학과는 ‘의대 입학 대기소’ 같은 분위기다. 고교 최우등생들이 몰려들던 예전의 이공계 명성은 사라진지 오래다.
‘취업 보장’으로 이공계 인재들을 붙잡겠다는 시도 자체가 아마추어적인 생각이다. 요즘 젊은 인재들은 대기업 인사 담당자보다 생각이 더 깊고 미래를 향한다. 40세 넘은 자신의 자화상이 그려지는 것이다. 극심한 사내 경쟁에 실적 미달 시 명퇴 압력, 회사를 나오면 재취업이 쉽지 않다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안다. 국가가 규정한 정년의 의미가 없는 게 대기업 이공계 분야다. 차라리 공장 기능직으로 취업해 60세 정년을 보장받아야 했다는 후회도 한다. 대졸 연구직-사무직들이 명퇴를 고민할 때 공장의 친구들은 억대 연봉을 받으면서 ‘안전하게’ 10~20년을 더 근무한다.
기업 이공계에게는 ‘65세 정년-75세 연구 지원’이 꿈 같은 얘기
김복철 국가과학기술연구회(NST) 이사장이 24일 기자회견에서 25개 과학기술 분야 정부출연연구기관(출연연) 과학자들의 정년을 65세로 환원하는 방안을 추진하고 우수 연구인력에 대해서는 75세까지 지원하는 제도를 강구하겠다고 밝혔다. 출연연은 1997년 금융위기 당시 정년이 65세에서 61세로 단축된 데 이어 2015년부터 임금피크제가 시행되고 있다. 출연연은 우수 연구진들이 해마다 대학으로 빠져나가 인재 유출에 시달려왔다. 수도권 대학은 65세 정년이 보장되고 상대적으로 대우가 좋다. 긴 방학도 큰 장점이다.
공기업-출연연 이공계는 그나마 사정이 나은 편이다. 법으로 정년이 엄격히 보장되고 임금 수준도 나쁘지 않다. 사기업에 재직하고 있는 이공계 인재들에게는 ‘65세 정년-75세 연구 지원’이 꿈 같은 얘기다. 국가가 규정한 60세 정년이라도 지켰으면 하는 바람이 있을 뿐이다. 자녀들 학비 등 한창 돈 들어갈 나이에 ‘명퇴’로 포장해 차가운 밖으로 내보내지 말라는 간절한 소망이다. 의사처럼 평생 면허가 없는 이공계 입장에선 직장을 잃으면 모든 것을 잃는 것이나 다름없다. 박사 학위를 가진 인재가 평생 해보지 않았던 닭도 튀겨야 한다.
일부에서 ‘노동의 유연성’을 얘기한다. 나이 든 사람이 비켜줘야 젊은 인재들이 수혈되는 선순환이 이뤄진다는 의미다. 해고가 자유로운 미국은 동종업계 재취업도 쉬운 편이고 대우도 비슷하게 갈 수 있다. 하지만 우리는 미국의 업계 상황과 많이 다르다. 우선 나이가 조금이라도 들면 재취업이 쉽지 않고 설사 취업에 성공하더라도 대우가 박하다. 아들, 딸의 더 나은 미래를 위해 교육비를 투자하기가 버겁다.
기업의 이공계 우수 연구인력 정년 보장-지원 방안 마련해야
일부 대기업이라도 NST 이사장이 제기한 우수 연구인력 지원 방안을 벤치마킹하는 게 어떨까? 우수 이공계 인력들은 임원 승진 여부와 관계없이 ‘선임 과학자’로 대우해 60세 정년을 보장하는 것이다. 65세 정년은 대기업엔 현실성이 떨어지지만 우수 과학자는 충분히 고려할 수 있다. 그들이 평생 쌓아 올린 노하우와 지식, 기술을 살려야 한다.
나이가 많다는 이유로, 사내 정치력이 없다는 이유로 새까만 후배 팀장 밑에 배치하던 구태의연한 인사 관습을 버려야 한다. 명퇴를 유도하는 이런 케케묵은 인사는 이제 주부들도 안다. 20년 이상 헌신한 회사가 남편을 버렸다는 얘기를 듣는 순간 분노가 치솟는다. 집에 귀하게 간직했던 남편 회사 제품을 몽땅 버리는 주부도 있다. 공부 잘하는 자녀에겐 명문대 이공계보다 재수, 삼수를 해서 지방 의대로 가라고 한다.
이공계 인재 유치는 대학생의 취업 보장으론 역부족이란 것이 증명됐다. 이공계는 의사처럼 70세, 80세까지 일하고 싶진 않을 것이다. 다만 법으로 정한 60세 정년은 지켜줘야 한다. 대기업 인사 담당자들도 ‘사람 자르기’가 더 이상 실적이 아니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중년의 우수 이공계 인재들이 다시 어깨를 펴고 세계 1위 제품을 계속 만들 수 있도록 획기적인 인사 혁신안을 마련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