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사로서 ‘탈모약 공약’이 씁쓸한 까닭

[Dr 곽경훈의 세상보기] 탈모공약과 보험 우선순위

미국을 배경으로 하는 영화와 드라마에는 노숙인이 종종 등장한다. 물론 노숙인은 미국에만 있는 문제가 아니다. 경제가 일정 이상의 규모와 수준에 도달한 나라, 흔히 말하는 ‘선진국’에서도 노숙인을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다. 런던, 파리, 로마, 도쿄 그리고 서울처럼 특정 국가의 수도가 아니라 ‘국제적인 중심지’로 각광 받는 도시도 마찬가지다.

하지만 미국을 배경으로 하는 영화와 드라마에 등장하는 노숙인에는 독특한 특징이 있다. 불과 1, 2년 전만 해도 안정적인 직업을 가진 중산층이었고 도박, 약물, 음주 같은 문제가 전혀 없는 노숙인이 등장할 때가 많다는 부분이다. 안타깝게도 그런 특징은 재미를 위해 억지로 만든 허구가 아니다. 현실에서도 충분히 개연성을 지닌 이야기다.

그렇다면 안정적인 직업을 가진 중산층이 도박, 약물, 음주 같은 문제가 없어도 1, 2년 만에 노숙인으로 전락하는 과정은 무엇일까?

일단 비극의 발단은 실직이다. 이런저런 일이 겹쳐 몇 개월 정도 일자리를 구하지 못하는 상황은 그리 드물지 않다. 그런데 하필이면 그때 본인 혹은 가족이 불의의 사고에 다치거나 갑작스레 심각한 질병을 진단받으면 비극이 본격화한다. 미국에는 전체 국민을 대상으로 하는 보편적인 의료보험이 존재하지 않고 중산층이 가질 법한 ‘괜찮은 일자리’는 대부분 의료보험의 혜택이 있지만 실직과 함께 의료보험의 혜택도 사라지는 경우가 적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엄청난 의료비를 감당하지 못하고 파산하여 1~2년, 심지어 불과 몇 개월 만에 중산층에서 노숙인으로 전락하는 일이 드물지 않다.

이런 문제는 의외로 심각해서 의료비를 감당하지 못하고 노숙인으로 전락하는 상황을 다룬 다큐멘터리와 영화도 드물지 않다(마이클 무어 감독의 ‘식코’와 덴젤 워싱턴 주연의 ‘존 큐’가 좋은 사례이며 최근 NBC에서 방영하는 메디컬드라마 ‘뉴암스테르담’에도 비슷한 사례가 자주 등장한다). 다행히 한국에는 전체 국민을 대상으로 하는 보편적인 의료보험이 있어 상황이 조금 다르다.

보험은 ‘꼭 발생한다고 확신할 수 없지만 그럴 위험이 다분한 재앙’을 대비하는 제도다. 예를 들어, 평소에 일정 금액을 꾸준히 내는 대신, 화재가 발생하여 재산의 손실이 생기면 피해액의 일부를 구제받는 제도가 화재보험이다. 같은 방식으로 상선이 침몰하여 운송하는 화물을 잃어도 피해액의 일부를 구제받는 제도가 해상보험이다. 이런 보험은 위험에 따라 평소에 내야 하는 금액이 다르다. 낡은 주택, 인화성 물질을 보관하는 창고, 술을 증류하는 시설처럼 화재가 발생하기 쉬운 곳은 한층 많은 보혐료를 납부한다. 마찬가지로 상선에 실린 화물이 귀중하거나 항로가 위험하면 역시 한층 많은 보혐료를 낸다.

우리나라 의료보험은 다르다. 의료보험도 다른 보험과 마찬가지로 평소에 일정 금액을 꾸준히 내면 병이 생겼을 때, 실제보다 적은 금액으로 의료서비스를 받는 제도다. 그러니 나이가 많은 사람, 만성질환이 있는 사람, 과거에 큰 수술을 경험한 사람에게 한층 비싼 보험료를 받아야할 듯하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 한국의 의료보험은 소득에 따라 납부할 보험료를 책정한다.

한국의 의료보험이 지닌 이런 독특한 특징은 의료서비스가 공공성을 띠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실상 국가가 의료보험을 주관하며 모든 의료기관과 전체 국민이 의무적으로 가입한다. 덕분에 한국에서 국민 대부분은 미국에서 종종 발생하는 ‘의료파산’을 경험하지 않는다.

하지만 완벽한 제도는 없다. 한국의 의료보험도 모든 질환에 혜택을 줄 수 없다. 그래서 뇌졸중, 심근경색, 악성종양처럼 많은 사람이 걸리는 ‘보편적인 중증질환’에는 대부분 혜택을 보장하지만 극소수의 사람이 걸리는 희귀질환에는 혜택을 주지 못하는 사례가 많다.

여기에서 ‘한국의 비극’이 발생한다. 희귀질환에 걸린 환자는 막대한 치료비를 감당하지 못하고 가족이 파산할 뿐만 아니라 아예 ‘특효약이 있어도 치료할 수 없는 상황’을 마주할 수 있기 때문이다.

척수성 근위축증(Spinal Muscular Atrophy)이 좋은 사례다. 척수성 근위축증은 1만 명당 1명꼴로 발병하며 근육이 점차 위축하여 1형 환자의 90%가 2세 이전에 사망한다. 오랫동안 효율적인 치료법이 없었지만 다행히 유전자 대체 치료제인 ‘졸겐스마’가 최근 개발되어 1회 투여만으로 큰 효과를 기대할 수 있다. 다만 졸겐스마를 투여하는 비용은 20억을 훌쩍 넘는다. 의료보험에서 혜택을 주지 않으면 대부분의 사람은 치료할 엄두조차 낼 수 없는 금액이다.

척수성 근위축증은 가장 강렬한 사례일 뿐이다. 그만큼 극적이지 않아도 의료파산을 초래하는 희귀질환이 적지 않다. 한국의 의료보험은 과거와 비교하면 보장성이 크게 향상했지만 여전히 이런 부분에 대한 개선이 필요하다.

그런데 얼마 전, 한 대선후보가 ‘탈모의 의료보험 적용’을 공약으로 발표했다. 물론 탈모도 많은 사람에게 적지 않은 고통을 안겨주는 질환이다. 또, 탈모로 고통받는 사람의 숫자는 척수성 근위축증 같은 희귀질환으로 고통받는 사람의 숫자를 압도할 만큼 많다. 하지만 한정적인 의료보험 재정을 탈모와 같은 질환에 투여하면 당연히 척수성 근위축증 같은 희귀질환을 앓는 사람의 순서는 밀릴 수밖에 없다. 탈모인이 특정 질환의 보험 적용을 애타게 기다리는 환자와 가족보다 수로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많을 것이다.

그러나 그 후보가 보험의 본질에 대해서 깊이 생각했는지 궁금하다. ‘훌륭한 정치인은 단순히 대중의 인기만을 목표하지 않고 사회의 가장 불우하고 소외된 사람에게도 관심을 기울인다’란 말을 떠올리면 ‘탈모 공약’이 한층 씁쓸하게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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