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96년, 그 때 인류 역사에 등장한 두 가지”
[차 권하는 의사 유영현의 1+1 이야기] 18. 서양 우두법(牛痘法)과 동양의 백차(白茶)
코로나19 대유행과 감염 공포, 백신 개발, 그리고 불안정한 백신의 범(汎)지구적 접종. 지난 수년간 지구촌을 짓누른 아주 무거운 주제였다.
인류 역사상 최초의 백신은 1796년 탄생하였다. 영국인 에드워드 제너(Edward Jenner, 1749~1823)에 의한 우두 접종 성공은 의학 역사에서 손꼽을 수 있는 업적이다. 그리고 1980년, WHO는 “지구상에서 천연두가 근절되었다”고 선언하였다. 우두법 개발은 중요하면서도 곱씹을 내용도 많은 사건이다.
제너의 우두법은 영국에서 바로 인정받지 못했다. 임상시험이 성공하자 "소 고름을 맞으면 사람이 소로 변한다"는 헛소문도 돌았다. 제너는 자기 아들이 포함된 23건의 임상시험을 추가로 시행하여 왕립학회에 보고하였으나, 왕립학회가 요구한 특허를 신청하지 않아 왕립학회의 무시를 받았다. 이를 지적하여 당시 영국인의 무지를 탓하지만, 백신을 탐탁히 여기지 않은 움직임은 철학과 윤리의 문제로 볼 수도 있다.
인류 살린 우두법도 그땐 "사람이 소로 변한다"는 루머에 시달렸다
다수의 생명을 구하기 위한 집단면역 형성. 예나 지금이나 감염병 강제 접종의 논리이다. 이 논리는 집단의 안전을 위하여 사회 구성원들은 협조하여야 한다는 공리주의적 태도로 정당화된다.
하지만 다수의 행복을 위하여 소수의 권리나 신념을 침해할 수 있느냐는 문제는 남는다. 자신의 신체에 대하여 스스로 결정할 권리를 무시하고 국가나 사회가 강제할 수 있느냐는 의문도 여전히 해결되지 않았다. 백신의 부작용으로 고통받을 수 있는 소수의 불행도 정당화되지 못한다.
공리주의에서 내거는 행복은 누구나 받아들일 만큼 객관적이지도 않다. 절차와 과정이 비윤리적이라면, 사회 전체의 유익이라는 결과에 중심을 둔 철학을 정당하다 볼 수 없다. 최근에도 코로나 백신을 거부하는 이들이 많다. 인류가 이룬 업적으로 자랑하는 예방접종과 집단면역은 여전히 풀리지 않은 숙제를 안고 있다.
1796년 나폴레옹이 조세핀과 결혼하였고, 조선에서는 경기도 수원 화성이 완공되었으며 미국 초대 대통령 조지 워싱턴이 은퇴하였다. 이즈음 동서양 문명 차이도 많은 생각 거리를 준다.
1796년경 유럽은 산업혁명을 통과하면서 동시에 전쟁의 소용돌이를 겪는 중이었다. 영국에서는 가내공업으로 생산되던 면직과 모직이 방적기로 대량 생산되었고 증기기관 발명으로 교통에도 혁명이 일어났다.
산업혁명 이후 도시로 몰리는 사람들...감염병도 확산
제철공업도 확대되었다. 공업과 상업의 중심도시가 성장하였다. 도시에 노동자가 모였고 노동계급이 탄생하였다. 사람 감염병도 확산하였다. 천연두도 당시 무서운 감염병의 하나였다,
제너가 우두법을 개발한 배경에 산업혁명이 관계하였다는 판단은 맞기도 하고 틀리기도 한다. 산업혁명은 기술 혁신뿐 아니라 사회 구조의 변화를 가져왔다.
기술적 과학적 발전을 촉진하는 환경이 마련되었으며 제너와 같은 의사 혹은 과학자들에게 연구를 수행하는 기회를 제공하였다. 산업노동자들이 대규모로 도시로 이동하여 전염병의 확산이 우려되는 환경은 예방 접종과 같은 공중보건의 필요성을 부추겼다.
그러나 천연두 개발은 시골 의사 제너가 그의 고향 농촌 생활 중에 이루어졌다. 산업혁명의 도시적 환경과 직접적인 연결이 있다는 증거는 부족하다.
우두법은 엉뚱하게도 프랑스의 유럽 정복에 유리하게 작용하였다. 나폴레옹은 영국에서 제너가 인정을 받기 전에 우두법을 신뢰하여 자신의 군인들에게 우두 접종을 시행하였다.
우두법이 발표되던 시점, 유럽대륙은 프랑스와의 전쟁으로 시끄러웠다. 프랑스 대혁명 후 1795년에 나폴레옹이 등장한다. 나폴레옹은 이탈리아, 이집트와 전쟁을 벌여 프랑스 국민의 지지를 얻어낸다.
나폴레옹은 1799년 쿠데타로 정권을 쥐고 프랑스 제1대 통령이 되고 이어 황제로 등극한다. 집권 이후에도 나폴레옹의 프랑스는 오랜 기간 이웃 나라들과 전쟁을 벌였는데 우두법으로 접종한 프랑스군은 전쟁에서 득을 보았다. 당시 천연두는 집단을 감염시키는 무서운 감염병이었다.
유럽을 넘어 미국으로도 퍼진 우두법
이어 우두법은 유럽 각지, 그리고 이어서 미국 등지에서 인정되어 확산하였다. 여기서 끝이 아니다. 제너의 우두법은 서양의학의 감염병 정복 초입부에 이룬 뚜렷한 성과였다. 이후 프랑스와 독일에서의 세균학과 면역학 연구의 기폭제가 된다. 다양한 감염병에 대한 백신이 만들어져 예방이 가능해졌고, 감염병 치료제 개발로 이어져 전염병 정복이라는 서양의학 최고의 업적이 달성되었다.
1796년, 동양의 주축 청나라에서는 제7대 가경제(帝)가 즉위하였다. 6대 건륭제는 60년 넘게 재위하며 청나라의 전성기를 통치하였으나 그의 재위 기간 말에 청나라는 안팎으로 내홍을 겪기 시작한다. 탐관오리를 총애하여 매관매직과 부패를 방치하였으며 과학혁명과 산업혁명으로 명백한 실적을 내던 서방을 외교 상대로 인정하지 않는 큰 실수도 저지른다.
건륭제는 신하들의 만류를 무릅쓰고 생전에 아들 가경제에게 양위(讓位)한다. 그리고 1796년 가경제가 정식 즉위한다. 그리고 가경제 재위 때 청나라의 쇠락은 가속도가 붙는다. 백련교도의 난과 묘족의 난이 이어지고 아편이 넓게 유입된다. 가경제 재임 시기는 후임 도광제 때의 아편전쟁을 잉태한 시기이다.
당시 모두에게 분명하게 보이지 않았을 뿐, 제너가 종두법을 정립한 1796년에는 서양의 기술과학 문명이 약진하며 동양을 실질적으로 따돌리고도 한참이 지난 때였다.
1796년에는 중국 푸젠성에서 오늘날의 ‘백차’가 탄생하였다
1796년에는 대부분 유럽인이 차를 마셨다. 영국에서는 특히 차 문화가 융성하였고 차는 영국의 국민 음료가 되었다.
처음 유럽인들은 녹차와 청차 등을 마셨으나 중국에서 생산된 홍차가 유럽인의 취향에 맞아 18세기 말에 유럽인 국가들은 홍차에 빠졌다. 홍차가 이미 세계인의 입맛을 잡은 뒤였을 뿐 아니라, 청 제국이 쇠락하며 다른 차종의 수출도 급감하였으니 뒤늦게 탄생한 백차는 널리 유행하지는 않았다. 푸젠성에서 백차가 생산되고 서양에 수출되었다는 기록도 있으나 수출량이 많지 않아 세계인에게 생소하였고 중국 내에서도 적은 양이 소비되었다.
백차(白茶)는 솜털이 덮인 차의 어린싹을 닦거나 비비지 않고, 약간 시들려 그대로 건조해 만든 차이다. 열을 가하거나 비비지 않아 차를 제작한 후에도 백색의 솜털이 덮여 있다. 차에서 은색의 광택이 나서 백차라고 부른다. 제법이 단순하여 차의 원형에 가깝다. 향기가 맑고 맛이 산뜻하다.
전문가에 따라 의견이 달라 백차의 역사는 중국 당송(唐宋)대까지 올라가지만, 현대 백차로 부르는 백호 은침, 백모단, 수미, 공미 등 백차는 우두법과 탄생 연도가 같다. 복정이 원산지에 가까워 복정백차는 백차를 대표한다. 가장 어린 잎으로 제작하면 백호 은침, 그보다 큰 잎으로 만들면 백모단이라 부른다. 조금 더 큰 잎으로 만들면 수미 혹은 공미라 부른다.
빠르게 높아가는 백차의 인기...탄생 200년만에 달라지는 위상
세계 백차 시장은 최근 6년 동안 2배로 성장하였다. 가공 과정이 단순하여 다른 차 종류보다 자연상태의 차 성분이 높은 수준으로 유지되어 건강에 좋다는 자료들이 많이 나왔다. “1년 되면 차, 3년 되면 약, 7년 되면 보물”이라는 좋은 평도 붙었다.
반갑게도 최근 한국에서도 백차가 생산된다. 한국 백차는 중국 푸젠성 백차와 차나무부터가 다르지만, 단순 시들리기를 통해 제작하여 푸젠성 백차와 유사한 맛과 향을 낸다. 국내 차 박람회에서도 최근 여러 종의 백차들이 전시되고 시음 되어 방문객에게 호평을 받고 있다. 양산 체제를 갖추고 애호가가 늘어나면 가격도 내려가 "한국 백차 대중화 시대가 열릴 수도 있겠다" 기대한다.
현재 천연두 균은 미국 질병통제예방센터와 러시아 국립 바이러스학 및 생명공학연구센터에 철저한 보안 속에 관리되고 있지만, 우두 예방접종은 중단되었다. 1796년생에 탄생한 우두법은 임무를 뜨겁게 다하고 역사 밖으로 떠나버렸지만, 우두법과 같은 해 태어난 백차는 별 존재감 없이 가느다란 명맥을 200여 년 이어가더니 21세기 들어서 기지개를 켜기 시작하였다. 같은 해 태어난 종두법과 백차, 둘의 전혀 다른 운명이 흥미롭다.
유영현 엘앤더슨병원 진료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