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전자 치료 받고 밤하늘에도 구름이 있다는 걸 알게 됐죠”

희귀질환 망막색소변성증 이겨낸 박선경 씨

유전자 치료를 통해 망막색소변성증을 이겨낸 박선경 씨. 사진=천옥현 기자

“밤에도 앞이 보이는 게 신기해서 야광별 스티커를 벽에 잔뜩 붙였어요. 어릴적부터 방 안에 야광별 스티커 붙이는 걸 꼭 해보고 싶었거든요. 매일 켜고 자던 불을 끄고 자리에 누웠는데 정말 하늘에서 별이 쏟아지더라고요. 그게 너무 예뻐서 한참 울었어요.”

30대 박선경 씨가 망막색소변성증의 존재를 알게 된 건 중학생 때였다. 선경 씨 어머니는 초등학생 때 진단받은 병에 대해 쉽게 말을 꺼내지 못하다가 그가 중학생이 된 뒤에야 조심스럽게 알려줬다. 하지만 선경 씨는 의외로 많이 충격을 받거나 슬프지는 않았다고 했다. 어릴 적부터 시력이 좋지 않아 늘 맨 앞자리에 앉아야 했고, 눈이 점점 나빠지고 있다는 걸 스스로도 느꼈기 때문이다. 어느 정도는 자신의 상태를 예감하고 있었던 것이다.

일반인에게 다소 생소한 망막색소변성증은 점차 시력을 잃게 되는 진행성 희귀 질환이다. 유전적 요인으로 망막의 시각세포가 손상되면서 야맹증이 생기고, 시야가 점차 좁아지는 터널 시야가 나타난다. 주로 10대에서 20대 초반 증상이 나타나고, 심하면 중년기에 시력을 완전히 잃는다. 최근 방영된 드라마 ‘다리미패밀리’에서는 주인공 다림이 이 병을 앓으며, 고가의 유전자 치료제로 시력을 완전히 회복하는 과정을 다뤘다.

드라마 속 다림이 치료 과정이 단순히 상상 속 이야기만은 아니다. 실제 망막색소변성증과 같은 유전성 망막 질환을 치료할 수 있는 치료제가 있다. 글로벌 제약사 노바티스가 개발한 ‘럭스터나(Luxturna)’가 그 주인공이다. 이 약은 ‘RPE65’라는 유전자에 결함이 있는 환자의 망막에 정상적인 유전자를 전달해 시각세포를 복구함으로서 시야를 넓히고 병의 진행을 멈춘다. 선경 씨도 럭스터나로 치료 받은 사람 중 한 명이다.

럭스터나는 2017년 미국 식품의약국(FDA) 승인을 받으며, 유전자 치료 분야에서 획기적인 전환점을 마련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한 번의 투여만으로 지속적인 효과를 기대할 수 있다는 게 가장 큰 장점이지만, 현실은 드라마처럼 단순하진 않다. 선경 씨를 만나 직접 치료 과정과 전후의 차에 대해 이야기를 들었다.

원샷 치료제, 너무 비싸서 포기했지만...

선경 씨는 늘 실명이 될 가능성을 안고 살았다. 동생이 같은 병으로 거의 시력을 잃은 상태였기 때문에 병에는 이미 익숙했고 무덤덤했다. 그래도 병이 진행된다고 느껴지면 덜컥 겁이 나곤 했다. 가끔 컨디션이 나쁠 땐 평소보다 유독 눈이 안 보였는데 그럴 때면 밖에서 밝게 웃다가도, 혼자 방에서 울곤 했다.

그러던 중 새로운 치료제가 나왔다는 소식을 들려왔다. 귀를 쫑긋 세웠지만 잠시 뿐이었다. 미국에서 10억원 가까이 비용이 든다는 소식을 듣곤 복권에 당첨되더라도 치료비가 부족할 거라는 생각에 포기했다. 그런데 뜻밖의 소식이 전해졌다. 병원으로부터 럭스터나 임상시험에 참여하지 않겠냐는 권유였다.

그는 “당시에는 밑져야 본전으로 여겨 치료를 결정했다. 기대감보다는 ‘이게 정말 효과 있을까’ 하는 궁금증이 더 컸던 것 같다. 지금 돌아보면 너무 기대했다가 효과가 나타나지 않아 실망하는 게 더 힘들 것 같아 일부러 기대를 안 하려고 했던 것 같다”고 말했다.

2021년 7월 선경 씨는 유전자 검사 후 상태가 더 나았던 왼쪽 눈을 수술 받았다. 수술은 전신 마취 후 망막에 구멍을 여러 개 뚫어 약물을 투여하고, 그 위에 약물이 안정화하도록 돕는 공기 방울을 얹는 방식으로 진행됐다.

드라마보다는 덜 극적인 게 현실

시각장애를 다루는 많은 드라마나 영화를 보면, 수술 후 눈을 뜨자마자 모든 것이 완벽하게 보이곤 한다. 하지만 실제로는 대체로 그렇지 않다. 선경 씨도 마찬가지였다. 공기 방울 때문에 선글라스를 낀 것처럼 까맣게 보이던 시야는 2주 가량 지나 공기가 빠지면서 점차 밝아졌다. 이전에 0.1 수준이었던 선경 씨의 시력은 수술 후 0.2 정도로 개선됐다. 사람이나 사물의 윤곽만 보여 장애물 인식이 어려웠던 수준에서 큰 글씨가 보이는 수준으로 나아진 것이다. 특히 크게 변화를 체감한 부분은 야맹증이었다.

선경 씨는 “예전에는 야맹증이 심해 밤에 돌아다니는 게 거의 불가능했다. 낮에도 아는 길로만 다녔다. 그런데 이제는 밤에 나갈 수 있고, 모르는 길도 가게 되니까 새로운 세상이 열린 것 같다. 밤하늘에 구름이 있다는 걸 치료를 받고 나서야 알았다. 근데 서울에는 별이 많이 없어서 그게 조금 아쉽긴 하다”며 웃었다.

수술 후 그의 인생은 드라마처럼 극적으로 바뀌지는 않았다. 여전히 화장을 세밀하게 하기 어렵고, 아직 혼자서 여행을 가는 건 주저한다. 하지만 당장 안 보일 수도 있다는 불안감을 덜었고, 무엇보다 앞으로 더욱 열심히 살아야겠다고 다짐했다. 서른살 넘어서야 처음 보는 것들이 많았기 때문에 다시 태어난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오른쪽 눈에도 찾아온 희망

선경 씨는 최근 오른쪽 눈도 치료받았다. 올해 럭스터나에 건강보험 급여가 적용되면서 치료비 부담이 줄어든 덕분이다. 양쪽 눈 기준 약 6억5000만원이었던 약제비는 이제 800만~900만원 본인부담금만 내면 된다.

그는 “교수님과 의료진이 정말 신경을 많이 써주셨는데, 막상 앞에 가면 말이 잘 안 나오더라. 이 기회를 통해 세상을 더 선명하고 밝게 볼 수 있게 해주셔서 감사드린다고 말하고 싶다”고 했다.

아쉽게도 럭스터나가 망막색소변성증 환자를 모두 치료하는 건 아니다. 이 병은 대략 80여 개의 망막질환 관련 유전자 중 RPE65라는 특정 유전자 돌연변이에만 효과가 있다. 전체 망막색소변성증 환자 중 약 2~5%가 이 돌연변이를 가진 것으로 알려졌다. 그러다 보니 선경 씨는 자신의 사례가 다른 환자들에게 실망으로 다가갈까 염려하며 조심스럽게 입을 떼었다.

“제 경우에도, 기대하지 않았던 치료제가 나온 것처럼 다른 유전자 치료제도 나올 수 있다는 희망을 잃지 않으셨으면 좋겠어요. 또 더 중요한 건 너무 비관적이지도, 지나치게 기대에 의존하지도 않는 마음이라고 생각해요. 지금 할 수 있는 일들에 집중하면서 긍정적으로 생각하고, 작은 기쁨과 희망으로 하루하루를 채우시길 바랍니다.”

    천옥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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