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자집회 르포] "휴진 말만으로도 불안...의사들은 제발 돌아오라"
92개 환자단체 보신각에 모여 호소...일반 시민도 참여 '환자와 국민이 최대 피해자'
4일 오전 서울 종로구 보신각 앞에서 '의사 집단휴진 철회 및 재발방지법 제정 환자촉구대회'가 열렸다. 국내 92개 환자단체에서 온 400여 명의 환자와 가족, 일반 시민들이 참석했다.
몸이 불편한 환자들이 대규모 실외 집회를 개최한 것도, 다양한 환자단체가 이처럼 대규모 행사를 진행한 것도 처음이다. 의정 갈등이 5개월째로 접어드는 가운데 대학병원들의 집단휴진까지 이어지자, 중증 환자들의 불안감이 그만큼 커졌기 때문이다.
"환자들은 불안하거든요. 정부나 의사협회나 서로 헤게모니 싸움은 그만 하고 몸이 애처롭고 절실한 환우들을 좀 생각해 줬으면 좋겠습니다."
보신각 한편에서 휴대폰을 이용해 집회를 스트리밍 중계하던 파킨슨병 환자 '킨슨'(닉네임, 58) 씨는 코메디닷컴 취재진에게 휴진 등 의료계 집단행동에 대해 큰 불안감을 토로했다. 스트리밍 화면 너머 환우들에게 이야기를 건네던 그는 "저희들은 약이 없으면 하루 이상을 못 버틴다"며 "환우들은 당장 치료가 필요한데, 휴진은 거의 사형선고나 마찬가지"라고 했다.
킨슨 씨는 파킨슨병환우회와 한국파킨슨시낭송예술협회에서 활동 중이지만, 이날 집회엔 개인자격으로 혼자 나왔다. 병상에 누워 있어 집회에 나올 수 없는 파킨슨병 환우들과 현장을 공유하기 위해서였다.
집회장 너머에서 담배를 태우던 윤병모(73) 씨 역시 취재진을 만나자 "세상이 야속하다"며 한숨을 쉬었다. 윤 씨는 일반 시민이었지만, 이날 집회 소식을 듣고 경기도 양주에서 오전 8시에 집을 나섰다고 한다.
두 번의 뇌경색과 두 번의 뇌출혈, 한 번의 구안와사(얼굴 근육 마비)를 겪은 윤 씨는 지팡이 없이는 걸음을 옮기기 쉽지 않은 몸이었다. 연신 담배 연기를 내뱉던 윤 씨는 "나라 꼴이 이래 가지곤..."이라면서 "하도 속이 상해서 나왔다"고 토로했다.
그는 "약 없인 하루 이상 못 버티는데, 대형병원에서 약을 타려면 보름이나 한 달 후 예약하고 오라고 한다"면서 "지금은 3차 병원 진료를 포기하고, 집 주변 작은 의원에서 급한 약만 처방받고 있다"고 말했다. 의사들에게 '병원에 돌아오라'고 말하고 싶다는 윤 씨는 복잡한 심경을 털어놨다.
"나 같은 사람은 의사들 덕분에 살고 있어요. 나도 고마움을 모르는 건 아닙니다. 그래도 환자들이 있어야 의사도 있는데, 지금은 환자들 생명을 담보로 '밥그릇 싸움'하는 거 아닙니까?"
킨슨 씨와 윤 씨 모두 현 상황에 대한 답답함을 호소했다. 상당수의 대학병원에서 중증·응급치료를 중단하진 않았어도 '휴진'이라는 말 자체에서 오는 불안감이 먼저 다가온다고 말한다.
의료계 집단행동 재발 방지법 등의 필요성엔 공감대를 표했지만, 그렇다고 의사들에 대한 일방적인 처벌이나 법적 책임만을 바라진 않는다고 했다.
윤 씨는 "병원에 없는 의사들을 전부 자르고 면허정지해야 한다고 말할 수도 있겠지만, 난 어찌 됐든 또 그분들 도움을 받으며 살아야 한다"털어 놓았다. 그러면서 윤 씨는 "이런 일을 방지하는 법이 있으면 좋겠다. 법이 너무 강해도 안 되겠지만, 물렁해서도 안 된다"고 말했다.
킨슨 씨 역시 재발 방지를 위한 제도적 해결 방안이 반드시 필요하다면서도, 그 내용은 더 협의해야 한다고 했다. 다만, 그는 "그래도 제일 불쌍한 게 환자"라면서 "환자를 먼저 생각하고 어떻게든 해결해달라"고 주문했다.
한 2차 종합병원의 수술실 간호사로 일한다는 허 모(31) 씨는 보신각 인근을 지나다 발길을 멈추고 집회 모습을 휴대폰 영상에 담고 있었다.
허 씨는 평소라면 상급종합병원에서 진료받을 환자들이 자신이 근무하는 병원을 찾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저희 병원까지 안 와도 되는 사람들이 돌다가 돌다가 온다"면서 "이런 분들에게 대학병원으로 가야 한다고 얘기하면 '안 받아준다'고만 말한다"고 토로했다.
이어 허 씨는 "저희가 할 수 있는 환자들은 치료하지만, 안되는 분들은 그저 하염없이 기다릴 뿐"이라며 "환자들도 엄청 답답해 한다"고 했다. 그러면서 "본인 건강이 제일 중요한데 그 건강을 지금 못 챙기고 있는 상황"이라며 "가장 많이 피해를 입는 사람들은 환자들이고 국민들"이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이날 집회 분위기는 대체로 차분한 분위기였다. 참석자들은 의사 직군이나 정부를 향한 울분을 쏟아내기보단 그간 서로의 답답함과 불안감을 공유하는 목소리를 내는데 무게를 뒀다.
현장에서 만난 안기종 한국환자단체연합 대표는 "지금 상황은 정부도, 의료계도 '환자 중심 의료'에 대한 고민이 없기 때문에 생긴 문제라는 공감대가 컸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장기적으론 의사 집단행동 금지법을 넘어 환자권리법 제정을 요청해야 한다는 환자단체의 공감대가 있었다고 전했다. 안 대표는 이날 집회 발언에서도 이와 같은 부분을 피력하기도 했다.
"전공의도 의대생도 피해자가 맞습니다. 하지만, 환자의 피해는 장기간의 의료 공백으로 생명을 잃을 수 있는 피해이고, 질병이 악화할 수 있는 피해이고, 육체적으로 고통받는 피해이고, 불안으로 투병 의지를 잃어 치료를 포기하는 피해입니다. 이제 더 이상 '환자를 위해'라는 단어를 정부나 의사 집단은 언급하지 말아 주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