뇌전증 환자 갈 곳 없다...여수서 350km 서울로, 왜?
뇌전증학회·협회, 세계 뇌전증의 날 맞아 '뇌전증 지원관리법' 제정 촉구
37만 명이 넘는 국내 뇌전증 환자의 치료 접근성이 여전히 낮다는 지적이 나왔다. 치료를 위해 이동하는 중에 발작이 나타날 위험이 있는 질병인 만큼 국가의 적극적인 관리가 필요하다고 뇌전증 환자와 가족, 전문의 모두 한목소리를 내고 있다.
한국뇌전증협회와 대한뇌전증학회는 15일 오후 서울 여의도 국회의원회관에서 '세계 뇌전증의 날 기념식 및 토론회'를 개최했다.
전담병원 지정이 시급...권역별 전담센터 지정이 첫걸음
이날 의료계는 뇌전증 치료 접근성 개선을 위해 권역별 뇌전증 전담병원 지정이 시급하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현행 제도론 뇌전증 환자가 사각지대에 놓여있다는 이유에서다.
뇌전증 환자는 일시적 발작이라는 질병적 증상으로 발생하는 신체적 기능 이상과 함께 사회적 편견으로 사회·경제활동을 어려워지면서 발생하는 정신·사회적 기능 이상을 동시에 겪는다. 따라서, 일본, 미국, 호주 등에선 이들 환자를 종합적으로 치료·관리하는 전담 의료기관을 충분히 마련하는 추세다. 반면, 국내에서 해당 역할을 하는 전담 의료기관은 사실상 서울 용산구에 소재한 '뇌전증지원센터' 1곳에 불과하다.
국내 뇌전증 권위자이자 뇌전증지원센터장을 맡고 있는 삼성서울병원 홍승봉 교수는 "치료를 위해 여수나 순천 등에서 서울로 올라오는 환자가 여전히 많다"면서 "서너시간씩 이동하다 발작 증상이 나타나서 이가 부러진 중증 환자도 있었다"고 토로했다.
이어 "이들 환자가 안심하고 치료받을 수 있도록 전국에 15~20개의 권역별 뇌전증 전담병원을 지정한다면, 1년에 20~30억 원의 예산만으로도 환자들이 이러한 위험을 감수하지 않도록 막을 수 있다"고 강조했다.
질병관리본부장을 역임했던 차의과대 전병율 보건산업대학원장 역시 "당장 지역 환자의 어려움을 해결하기 위해 바로 시작할 수 있는 일은 권역별 전담센터 지정"이라고 강조했다. 이어 "이들 센터가 뇌전증 환자의 치료와 재활, 돌봄, 사회적 인식 개선·교육을 총괄하도록 지원한다면 향후 정식 제도화를 위한 근거를 빠르게 확보할 수 있을 것"이라고 전망했다.
우울증 등 정신질환 동반 쉬워... "환자와 가족에 대한 지원 제도화 해야"
근본적으론 이들 환자와 가족에 대한 각종 의료·사회적 지원을 제도화하는 '뇌전증 관리지원법'의 제정이 필요하다는 목소리도 높았다.
학회와 협회는 2011년부터 10년 넘게 해당 법안의 제정이 추진 중이지만, 여전히 국회의 문턱을 넘진 못하고 있다. 2022년에는 세계보건기구(WHO) 역시 '뇌전증과 기타 신경계 질환의 범국가적 지원체계 추진 결의안'(IGAP 2022-2031)을 채택하며 각국에 해당 법안 제정을 촉구하고 있다.
대한뇌전증학회 허경 이사장(세브란스병원)은 "뇌전증은 전 세계의 모든 질병부담 중에서도 0.5%의 매우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면서 "70% 이상의 환자가 약물과 수술 치료를 통해 충분히 일상생활이 가능함에도, 사회적 낙인으로 치료를 두려워하거나 우울증·불안장애 등 정신질환을 동반하기 쉽기 때문"이라고 지적했다.
허 이사장은 "환자가 질병적 증상 이상의 고통을 받는 상황은 다른 어떠한 만성질환에서도 쉽게 찾아볼 수 없는 경우"라면서 뇌전증 관리지원법 제정의 필요성을 강조했다.
한국뇌전증협회 김흥동 회장(강북삼성병원)는 "임상의사가 이러한 법안을 촉구하는 이유는 단 하나뿐"이라면서 "진료실에서 환자와 관련한 모든 문제가 해결되지 않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김 회장은 이어 "학회와 현장 의사들이 13년간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려 뛰어다녔지만, 결국 국가가 관리하지 않으면 해결할 수 없다"면서 "지금으로선 37만 명의 환자와 200만 명의 가족을 방치하고 있는 상황"이라고 우려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