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구도 ‘운칠기삼’이다”
[유영현의 의학 논문 속 사람 이야기]
논문 24: Kim HY, Park SY, Lee MH, Rho JH, Oh YJ, Jung HU, Yoo SH, Jeong NY, Lee HJ, Suh S, Seo SY, Cheong J, Jeong JS, Yoo YH. Hepatic STAMP2 alleviates high fat diet-induced hepatic steatosis and insulin resistance. J Hepatol. 2015;63:477-485.
■사람: 김혜영(연구교수)
■학문적 의의: 고지질 식이 유도 지방간에서 STAMP2의 역할
30대 후반에 ‘세포사’라는 영역을 개척하여 이미 어느 정도 성취를 이룬 나에게 다시 격변의 바람이 불었다. 50대 초반 무렵이었다.
여섯 번째 연구교수로 내 방에 들어온 김혜영 박사가 지질대사 연구 수행을 희망하였다. 이 제안을 받아들이면 장기간의 고지질 식이로 지방간을 유도하는, 동물모델을 이용한 지질대사 연구로 내 방의 실험 주력이 옮겨가야 했다.
세포사 연구에 뛰어들면서 형태학 연구자 대신 세포분자생물학 연구자로 변신하던 때 이상의 변화가 요구되었다. 이전의 세포사 연구와는 비교할 수 없이 복잡한 연구를 감당할 자신도 없었다.
갈등이 일었다. 하지만 김 박사를 믿어 보기로 했다. 김혜영 박사는 분자생물학 전공 지도교수의 가르침을 받아 분자 수준의 연구에 좋은 경험을 갖추고 있었다.
나는 내 연구실의 방침대로 세포사라는 저수지에서 지질 독성을 연구하자고 수정 제안하였다. 지질은 독성이 높지 않아 다소 무리한 제안이었다. 이 무리한 제안을 김 박사가 받아들이며 내 방은 ‘위험성이 크나, 가치가 높은’ 지질 독성 연구에 돌입하였다.
세포사는 뒤로 밀리고, 지질대사가 전면으로
그동안의 내 연구실 주력 연구와는 전혀 다른 연구가 시작되었다. 막상 연구가 시작되니 지질 독성에 의한 세포사 연구는 뒤로 밀리고 지질대사 이상 연구에 집중하게 되었다. 이때부터 '세포사라는 저수지 속에서 헤엄치는 연구를 수행한다'는 내 원칙은 지켜지지 않았다.
그래도 산출되는 자료가 매우 흥미 있고 가치도 있어 나는 속수무책으로 이 연구에 휩쓸리고 말았다. 내 공부도 세포사 저수지를 넘어 지질대사 영역으로 확장되어 갔다.
의미 있는 자료가 추가되어가자 나는 자료가 완전히 나오지 않은 상태에서 이미 논문 작성을 시작하여 김 박사가 논문 작성 부담 없이 실험에만 전념하도록 손을 덜어주었다.
오랜 시간이 요구되는 동물실험 결과를 얻는 날에는 내 실험실 열 명 정도의 인원이 모두 동원되어 새벽부터 밤까지 혈액을 분석하고 조직을 떼어 내었다. 생쥐의 배를 열 때는 박수가 터져 나오기도 하였다. 우리 가설을 입증하는 명백한 자료들이 쏟아져 나왔다.
본 논문은 간(肝) 분야 최고 잡지인 ‘J Hepatol’에 제출되었고, 수정 없이 채택되어 가치를 인정받았다. 논문은 한빛사(한국을 빛내는 사람들)에도 등재되었다.
김 박사는 이 논문으로 아모레퍼시픽 ‘차세대 연구자상’을 수상하였다. 나는 이 논문으로 전국 기초의학 교수 한 명에게 주어지는 ‘의당학술상’을 받았다. 상을 받으려 연구하지는 않지만, 수상 순간에 업적은 가장 강하게 빛난다.
연구실 테마를 바꾸게 한 김혜영...그래도 '세포사' 저수지는 남았다
이후에도 지질대사 연구는 내 방의 주력 연구 분야가 되었고 연구 마감 때까지 지질대사 분야에서 주로 업적을 내었다.
세포사 연구에서 지질대사로 옮긴 내게 많은 동료 연구자들이 세포사 연구를 떠나 대사 연구로 옮긴 이유를 물었다. 세포사 연구가 뜸하였던 당시에는 답이 궁하였다.
하지만 나는 지질대사 연구를 수행하면서도 세포사 연구 저수지 둑을 터트려 버리지는 않았다. 이후의 지질대사 연구에서는 지질 독성에 의한 세포사 연구를 포함하게 되고 나의 연구 저수지 「세포사」는 결국 지켜지게 된다.
90년대 중반 세포사의 기작 연구에 뛰어들었을 때와 2010년 초반 지질대사에 뛰어들었을 때가 위기와 기회를 함께 포함한 내 연구의 전환기였다. 굳이 해석한다면, 내 정체성을 지키려고만 하지 않았고 유연한 태도를 보였기에 이 전환기를 잘 넘었다.
하지만 정체성이나 유연성에 대한 인지와 행동이 결과를 낳은 것은 아니다. 뒤돌아보면 설명할 수 없는 운(運)이 닿아 두 시기를 모두 넘겼다. 연구도 운칠기삼(運七技三)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