암 환자 위한 무모한 도전… 암 연구 토대 닦다
[Voice of Academy 3 -학회열전] 암 임상시험 정착시킨 대한항암요법연구회
지난 6월 2~6일 미국 시카고에서 열린 미국임상암학회(ASCO.American Society of Clinical Oncology). 암 분야 세계 최대 규모 학술대회에서 한국인 139명이 주저자로 논문을 발표했고, 이 가운데 무려 44명이 한 스터디그룹에서 나왔다. 대한항암요법연구회는 지난해 35건에 이어 올해도 ASCO의 주요 연단을 빛냈다.
대한항암요법연구회(KCSG·Korean Cancer Study Group)는 현재 세계적으로 중요한 목소리를 내고 있지만, 창립 멤버들은 20여 년 전에 연구회를 결성한 것 자체가 ‘무모한 도전’이었다고 회고한다.
이정신 정태준 방영주 등 '무모한 도전'
당시엔 암 환자가 초기에 발견해서 수술받을 수 없다면 그야말로 암울했다. 환자뿐 아니라 의사도 마찬가지였다. 매일 속절없이 환자를 떠나보내야 했기 때문에 종양내과 의사가 환자와 너무 공감하면 우울증에 걸린다는 말까지 있었다. 그나마 전국에서 암을 전공하는 의사는 40명이 채 안 됐다. 이들은 미국에서 약 치료법이 정해지면, 효과를 확신하지 못하더라도 따라가야만 했다.
“1980년대 미국에서 젬자, 탁솔 등 항암제가 등장하며 종양학이 발전하기 시작했습니다. 미국학회에서는 커뮤니티의 의사들이 함께 연구해서 발표를 하는 바람이 불었어요.” -이정신 서울아산병원 명예교수
MD앤더슨암센터를 거쳐 펜실베이니아대 폭스체이스병원 종양혈액내과 조교수로 지내다 서울아산병원 개원 때 합류한 이정신 교수는 가톨릭대 의대를 졸업하고 미국 슬론-캐터링 암센터 임상전임의를 거쳐 한양대병원에서 명성을 떨치던 정태준 교수에게 미국과 같은 연구그룹의 필요성을 제안했다. 정 교수가 앞장 섰다. 서울대병원에 종양학을 본격 도입한 김노경 교수에게 찾아가 수제자인 방영주 교수를 소개받았다. 연세대 노재경, 경희대 조경삼, 순천향대 박희숙, 원자력병원 강윤구, 삼성서울병원 박근칠 교수 등이 뜻에 공감하고 합류했다.
“당시에는 우리가 할 수 있는 게 별로 없었어요. 기존의 항암제를 어떻게 컴비네이션하는 게 좋은가 알아보는 정도를 할 수 있었지만 그마저도 쉽지 않았습니다.” -방영주 방앤옥컨설팅 대표(전 서울대 교수)
이들 ‘선구자’들은 수시로 만나 정보를 교류했다. “미국 기준만 그대로 받아와서 쓸 수는 없다. 우리도 임상시험을 해야 하지 않겠나?” “우리도 체계적으로 항암치료를 해보자!” “우리끼리 경쟁해서 뭐하나? 함께 우리만의 연구를 해보자. 소화기질환에서는 경쟁력을 갖출 수 있을 텐데….” “한국 1위 암인 위암은 미국에서 드무니 우리가 위암 항암데이터 분야에선 세계를 선도할 수 있을 것!”
선구자들은 1998년 6월 연구회의 돛을 올렸다. 초대 회장은 정태준, 총무는 강윤구 박사. 다른 과 일부 의사들은 “국제학회 가면 찬밥 신세인데, 우리가 임상시험을 주관한다니…”하며 수군댔지만 개의치 않았다.
1998년 돈도 없이 맨땅에서 연구회 출범
임상연구는 제약회사에서 지원하는 '의뢰자 주도 임상시험(SIT.Sponsor Initiated Trial)'과 의료진이 주관하는 '연구자 주도 임상시험(IIT. Investigator Initiated Trial)'으로 구분되는데, 외국 제약회사들이 SIT에도 식품의약품안전처의 허가를 받기 위한 3상에만 관심을 기울일 뿐, 부가가치가 큰 1, 2상을 한국에서 하는 것엔 큰 관심이 없었다.
“데이터 매니저먼트 시스템이 핵심이고 이를 위해서는 적지 않은 자금이 필요합니다. 그러나 펀딩 없이 시작할 수밖에 없었어요.” -방영주 대표
재원은 회비로 충당하는 수밖에 없었다. 그야말로 맨바닥, 불모지에서 시작한 것이다. 강윤구 총무는 회비와 후원금을 요청하는 팩스를 보내고, 또 보내야만 했다. 그러면서도 한 달에 최소 한 번 만나 정보를 교류하며 토론했다.
연구회는 전국 병원 의사들의 임상시험을 통합 관리하는 임상시험센터를 설립했고 2006년에는 임상시험센터로 도약시켰다. 자체 데이터센터를 통한 연구 선순환이 일어나기 시작한 것.
6대 정현철 연세대 교수 때에는 전국 환자 증례를 체계화하는 e-CRF(전자 증례기록서) 시스템을 구축했다.
2000년대 들어 연구회가 악전고투하며 하나 둘 씩 성과를 내기 시작하면서 해외 연구단체와 글로벌 제약회사가 관심을 기울이기 시작했다. 미국 국립종합암네트워크(NCCN), 암국제연구단(DIRG), 동부협력종양그룹(ECOG) 등과 협력 체계가 가동했다.
2017년에는 식품의약품안전처 사단법인으로 등록해 본격적 재정 지원을 받을 수 있게 됐다. 곧바로 국립암센터가 주관하는 국가암정복추진연구개발사업의 암연구 인프라 구축사업을 맡아 매년 5억원씩 25억원을 받았다. 지난해에는 성과를 인정받아 같은 조건으로 5년 연장했다. 연구회가 보건복지부, 식품의약품안전처 등의 정부 정책용역을 수주하면 11개 질병 분과의 젊은 교수들이 밤을 새워 보고서를 썼다. 항암제의 수가에 대한 의견도 내고 있다.
"연구자 주도 임상에 재정지원 늘려야"
연구회는 초기부터 홈페이지(www.kcsg.org)를 통해 전문가들끼리 서로 정보를 교류하고 일반인에게도 임상시험에 대해 알리고 있다. 현재 연구자 주도 189건, 의뢰자 주도 임상시험 178건을 함쳐 367건의 임상시험에 대한 정보를 찾아볼 수 있다.
연구회는 또 ‘임상시험교육 워크숍’을 통해 임상시험 전문가를 양성하고 있다. 현재 서울 성동구 성수동 사무실에는 연구행정직원, 종양전문간호사, 임상연구간호사, 임상시험연구원 등 70여 명이 근무하고 있으며 종양 전문의 950여 명이 정보를 교류하고 있다.
연구회는 관련 학회의 탄생에도 기여했다. 2005년 연구회 운영위원회는 한국임상암학회(KACO) 창립을 제안했고 초대 회장 박희숙, 초대 이사장 이정신 체제로 출범케 했다. KACO는 현재 대한종양내과학회(KSMO)로 이름을 바꿔 학술지 발간, 학술대회 개최 등에 집중하고 있다.
“SIT 못지 않게 중요한 것이 IIT입니다. 처음에는 유방암 치료제가 위암에도 듣지 않을까 라든지, 두 항암제를 섞어쓰는 병용요법이 효과가 있지 않을까 하는 탐색요법에서 시작했지만 지금은 용량, 부작용의 검증부터 수술 후 항암제를 얼마나 줄여도 되는지, 언제부터 약을 끊어도 되는지 등 다양한 분야의 임상연구가 진행되고 있습니다. 공익적, 윤리적 임상연구라 할 수 있는데 미국이나 유럽 등에서는 정부 차원에서 막대한 돈을 지원하지만 한국은 아직 부족해요. 이 자금을 좀 더 확보해서 보다 더 큰 일을 하도록 하겠습니다.” -장대영 현 항암요법연구회 회장(한림대 성심병원 교수)
“제약사의 허가 임상 데이터와 실제 의료현장의 데이터는 많이 차이가 납니다. AI를 활용, 단일 보험 시스템에 쌓인 방대한 진짜 데이터를 분석해서 진료 가이드라인에 참조해야 할 겁니다. 또, 미국이나 유럽에서 쏟아져나오는 슈퍼 고가 신약을 여론에 휘둘려 승인해줄 수밖에 없는데 그것이 실제로 의미 있는지도 우리가 검증할 수 있겠지요.” -이정신 명예교수
“우리나라 환자에 맞는 임상연구를 진행하고 있지만, 중개연구가 아시아로 확장하고 나아가 글로벌 임상연구의 발전에 기여하게 되기를 꿈꿔왔는데, 하나 둘 실현되고 있습니다.” -라선영 연세대 의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