쓴소리를 해야 수퍼바이저다
[유영현의 의학 논문 속 사람 이야기]
논문 17: Kim TH, Lee SY, Rho JH, Jeong NY, Soung YH, Jo WS, Kang DY, Kim SH, Yoo YH. Mutant p53 (G199V) gains antiapoptotic function through signal transducer and activator of transcription 3 in anaplastic thyroid cancer cells. Mol Cancer Res. 2009;7:1645-1654
■사람: 김태현(세 번째 연구교수)
■학문적 의의: p53 돌연변이 G199V의 항세포사 기능 획득 기전 규명
한 60대 여성은 수십 년 전 대학입시 창구에서 어머니와 벌이던 실랑이를 아직 잊지 못한다. 그때 어머니는 학력고사 성적에 맞춰 약대에 지원하라고 딸을 설득하셨다. 그녀는 친구와의 깍지 낀 맹세를 지키기 위하여 인문계열에 진학하겠다고 고집을 부렸다.
그날, 어머니는 딸의 고집에 굴복하고 말았다. 이후 전문가로 살아갈 수 있는 자격증이 부러울 때마다 그녀는 "엄마가 철부지 소녀의 뜻을 꺾어 주었다면 좋았을 것"이라는 회한에 젖었다.
부모는 자식들이 원하는 데로 놔두어야 한다는 작금의 세상 철학에 그녀는 동의하지 않는다. 일간지에 “자식의 전공과 진로에 개입하는 건 자식과 함께 동반 자살하려는 것과 같다”는 기사가 나오는 세태를 그녀는 강하게 비판한다.
그녀는 "어른은 아래 사람들에게 바른 이야기를 숨기지 않아야 한다"는 신념을 가지고 산다. 이 논문은 수퍼바이저의 역할에 대해 같은 맥락의 교훈을 내게 준다.
김태현 박사는 박사학위 과정을 마치고 내방의 세 번째 연구교수로 부임하였다. 나는 그의 수퍼바이저가 되었다. 영향력이 큰 연구를 구상하다 연구 초기 갑상선암세포에서 p53의 새로운 돌연변이를 찾아내었다. G199V 돌연변이는 유전자은행에 등록하였다.
다음으로 G199V 돌연변이가 세포사에 저항하는 기작을 연구하였다. 세포사 돌연변이 기작을 풀어나가는 과정은 짧지 않았다. 4년여 연구 끝에 주요한 자료들이 모였다.
논문 작성에 들어가자, 나는 두 가지 핵심적인 자료가 더 나온다면 ‘Cancer Res’급 잡지에 채택될 수 있다고 판단하였다.
김 박사에게 조심스레 물었다
나는 늘 학생과 연구원들에게 강하게 지시하지 않고 조심스레 내 의견을 내어 그들의 뜻을 물었다.
“논문 제출이 늦어지더라도 연구를 추가하면 어떻겠습니까?”
김 박사는 선뜻 응하지 않았다. 오랜 연구를 마감하였다는 해방감을 맛본 그가 다시 그 일로 돌아가고 싶지 않다는 점이 이해되었다. 나는 수퍼바이저의 본분을 잊고, 김 박사 의견을 받아들이고 말았다.
작성된 논문을 암 관련 최고의 전문 잡지인 ‘Cancer Res’에 제출하니 심사위원들은 내가 예상하였던 대로 "두 자료가 결핍되었다"고 지적하였다.
이후 몇 잡지를 떠돌며 논문 심사를 받았으나 비슷한 이유로 계속 거부되었다. ‘Mol Cancer Res’에서는 두 분석 자료 첨가를 조건부로 채택하겠다는 심사 결과를 보내주었다. ‘조건부 채택’이라는 답을 받았으니 필요한 두 가지 분석을 추가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 논문을 생각할 때마다 나는 논문의 아쉬운 결과를 김 박사 탓으로 돌렸다.
하지만 은퇴를 앞두고 논문들을 훑으며 비로소 깨달았다. 상사의 책임을 다하지 않고 결과에 대한 책임을 김 박사에게 미루었던 내 잘못이었다. 대학입시 창구에서 딸의 뜻을 받아 주고 만 어머니, 손을 씻는 행위로 자신의 죄와 단절하려던 본디오 빌라도의 태도와 다름없었다.
쓴소리를 해야 올바른 수퍼바이저다. 그러나 내년 2월 은퇴를 앞둔 나에게 수퍼바이저 노릇을 제대로 할 기회는 다시 오지 않을 것이다. 철 들자 은퇴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