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부른 소리한다’ 비난받던 배고픈 학회, 세계적 학회로
[Voice of Academy 1-학회 열전] 선구자의 열정이 열매 맺은 대한비만학회
“유럽에 유럽비만학회, 미국에는 미국비만학회가 있다면, 아시아엔 대한비만학회가 있습니다.”
지난 5월 18일 아일랜드 더블린 컨벤션센터에서 열린 유럽비만학회. 제이슨 핼포드 유럽비만학회 회장은 ‘비만의 디지털 치료와 빅 데이터’ 주제의 한·유럽 공동 세미나를 시작하며 대한비만학회를 이렇게 소개했다. 박철영 비만학회 이사장(성균관대 의대)과 연자였던 고려대 의대 김양현 교수 등 한국 의사 50여 명을 포함, 세계 각국의 의사 200여 명이 참석한 자리에서 비만학회의 위상이 확인되는 순간이었다.
박 이사장의 눈앞에는 학회의 지난날들이 파노라마처럼 스쳐 지나가며 가슴이 울컥했다. 박 이사장은 2001년 경희대병원 내과 전임의(Fellow) 시절, 스승인 김영설 교수의 엄명을 받고 학회 10주년 기념식을 준비하면서 학회 일에 본격 뛰어들었다. 사무실은커녕, 총무이사에게 넘겨받은 학회 관련 자료는 라면 박스 하나가 전부. 그나마 절반 가량은 총무이사가 속했던 대한골다공증학회의 자료였다. 그러나 학회가 얼마나 어렵게 시작해서 분투를 벌이는지를 잘 알고 있기에 불평할 수조차 없었다.
故 이태희 교수 등이 학회 탄생 산파역
비만학회는 1990년대 초 움텄다. 당뇨병을 치료하던 이태희 전남대 교수(2015년 작고)의 열정과 헌신이 없었으면 출범도, 생존도 불가능했을지 모른다. 이 교수는 1980년대부터 진료실에서 비만을 거쳐 당뇨병 진단을 받는 환자가 증가하는 점에 주목했다. 혼자 미국비만학회, 유럽비만학회 등에 참여해 강의를 들으며 비만이 당뇨병의 원인이라는 것을 확신했다. 특히 북미비만학회에서 조지 브레이 루이지애나 주립대 교수가 “경제가 성장하는 개발도상국에선 비만과 만성질환도 꾸준히 늘어날 것”이라고 경고하는 것을 듣고, 주위 의사들에게 부지런히 전파했다.
1990년 일본 고베에서 열린 세계비만학회는 한국에서 비만 문제를 눈여겨 보던 의사들에게 전환점이 됐다. 대회장이었던 친한파 의사, 바바 일본비만학회 회장이 한국인 의사들을 초대했고, 당시 대한당뇨병학회 회장이었던 이태희 교수는 서울대 민헌기(2021년 작고), 연세대 허갑범 교수(2020년 작고) 등과 함께 참석했다. 이들은 일본당뇨병학회 멤버들이 비만학회를 결성하고 왕성한 활동을 펼치는 데 신선한 충격을 받았다. 또, 의사뿐 아니라 연세대 영양학과 이양자 교수, 이화여대 체육학과 임미자 교수 등이 참석한 것을 보고 무릎을 쳤다.
이 교수를 비롯한 의사들은 이듬해 이양자, 임미자 교수 등과 접촉해 학회 결성의 뜻을 키웠다. 이들은 그 해 가을에 북미비만학회에 참관한 뒤 연말부터 학회 창립준비 돌입했다. 세미나와 심포지엄도 열었다.
이들이 비만과 관련한 학회를 만들려고 하자 곳곳에서 부정적 목소리가 나왔다. 일부 원로 교수는 “(아직 배고픈 나라에서) 배부른 소리 한다”고 꾸짖었다. 일부 의사는 살이 찐 것은 영양이 좋은 상태이므로 치료는 필요없다고 우겼고, 일부 교수는 제자가 모임에 가는 것을 대놓고 말렸다. 그러나 학문적으로 비만이 큰 문제가 될 게 뻔한 데 멈출 수는 없었다. 연세대 허갑범 교수, 경희대 최영길 김영설 교수, 서울대 이홍규 교수, 중앙대 신순현 교수 등 비만의 초기 전문가들은 “지금은 비만이 부의 상징으로도 치부되지만 언젠가 가난의 징표가 될 것”이라고 주위를 설득하며 회원을 확보했다. 마침내 1992년 7월 서울 신라호텔에서 대한비만학회 창립총회와 기념 심포지엄을 열었고 이태희 회장, 김영설 총무이사 체제가 출범했다.
학회 문호 개방...다양한 전문가 참여
비만학회는 출범부터 획기적이었다. 폐쇄적인 대부분의 의학회와 달리 소아청소년과, 가정의학과, 정신건강의학과, 정형외과, 외과, 산부인과 등의 전문의는 물론 영양학, 체육학 등의 전문가들에게도 문을 열었다. 이태희 회장은 박용우, 강재헌 등 젊은 가정의학과 교수들의 참여도 적극 반겼으며 소아청소년과의 이동환 순천향대 의대 교수를 영입해 ‘소아비만위원회’를 만들도록 했다.
그러나 학회의 앞길은 가시밭길이었다. 원로 의사들이 마뜩치 않아서 참여를 주저하는 의사들이 적지 않았다. 회원들은 친한 의사를 데리고 오는 일을 주요 임무로 여겼다. 회비를 낼 회원이 적으니 돈도 부족했다. 비만 분야에 일찍 뛰어든 스위스 제약사 로슈가 일부 후원을 했지만 학회 한 번 치르고, 학술지 발행하면 예산이 바닥났다. 이태희 회장은 그때마다 사비를 내놓았다. 학술지와 도서 발행을 위해 적지 않은 돈을 내놓았으며 ‘문석 연구비’를 만들어 젊은 연구자들의 연구비 걱정을 덜어줬다.
그러나 이들이 옳다는 것이 증명되는 데에는 10년 남짓이면 충분했다. 우리나라 비만 인구가 급격히 증가하면서 각종 합병증이 사회문제로 떠올랐다. 2001년 식욕억제제와 지방분해제 등 비만치료제가 시판되면서 의료계도 눈길을 주지 않을 수 없었다. 방 하나 없던 학회의 위상이 올라가면서 사무실도 생겼고, 자료도 좀 더 체계적으로 정리할 수 있었다. 그러면서도 비만이 돈이 된다고 알려지면서 우후죽순 생긴 각종 모임과 상업적 치료에 ‘원칙’으로 대응하는 궂은 역할도 마다하지 않았다.
2001년 9월 가톨릭대 의대 마리아홀에서 열린 연수강좌에선 500명이 참석할 것으로 예상했는데 700명을 훌쩍 넘겨 그야말로 발디딜 곳이 없었다. 회원들은 부랴부랴 부족한 점심 도시락을 주문하면서 ‘행복한 비명’을 질러야 했다.
비만학회는 초기 어려운 여건 속에서도 학술대회 개최, 학술지 발간, 전문가 교육, 사회 교육 등을 모두 적극적으로 펼쳐 학회의 모범으로 꼽힌다. 학회는 1992년 10월 첫 공식 학술대회 이후 계속 규모를 키웠으며, 2015년 국제학술대회(ICOMES)로 발전시켰다. 첫 국제학회엔 26개국 960명의 비만 전문가들이 참석했다.
창립 첫해부터 학술지 《대한비만학회지》를 발간한 것은 다른 학회에서도 ‘엄지 척’을 할 수밖에 없는 성과다. 학술지는 질과 양에서 발전을 이루다가 2017년 이름을 《Journal of Obesity and Metabolic Syndrome(J Obes Metab Syndr, JOMES)》으로 바꾸면서 국제학술지로 변모했고 그해 한국연구재단의 학술지 평가에서 우수등재 학술지로 선정됐다. JOMES는 미국 국립보건원(NIH) 의학도서관의 학술지 목록인 PubMed, 스웨덴 룬드대 도서관의 학술지 목록인 DOAJ 등에도 이름을 올렸으며 과학기술논문인용색인 확장판(SCIE) 등재를 눈앞에 두고 있다. 2018년에는 JOMES에 게재한 ‘대한비만학회 진료지침’이 그해 한국학술지인용색인(KCI) 인용지수에서 의약학분야 1위를 차지하기도 했다.
아시아 대표하는 비만학회로 성장
2000년 10월엔 세종문화회관에서 조지 브레이 교수를 초청해 개원의 연수강좌를 출범시켰다. 2016년 비만전문가 과정을 시작해 이듬해 비만전문가 기초과정과 심화과정으로 분화시켰으며, 2018년 비만 전문의사와 전문영양사를 첫 배출했다.
사회적 역할도 적극적으로 수행했다. 2003년 4월 ‘비만주간 선포식을 열며 ‘한국인을 위한 비만 가이드라인’을 발표했고 2008년엔 ‘한국인 비만치료지침’을 선보였다. 2010년에는 ‘비만의 날’을 시행했고, 이듬해부터 ‘비만예방의 날’로 이름을 바꿔 지금까지 이어오고 있다. 올해는 ‘세계 비만의 날’인 3월 4일 걷기 대회를 성공적으로 펼쳤으며 내년부터는 참가 인원을 1만 명 규모로 키울 계획이다. 이와 함께 1998년부터 어린이 소아비만 여름 캠프를 열었으며, 이름을 ‘Fun & Run 헬스 캠프’로 바꿔 매년 성공적으로 열고 있다.
위상도 쭉 올라갔다. 학회는 정회원 460여명, 평생회원 1200여명, 인터넷 회원 1만여명. 모두 1만2000여명의 회원이 포진한 대규모 학회로 성장했다.
국제적으로는 1995년 세계비만학회 정회원이 됐으며, 2007년에는 서울에서 아시아오세아니아 비만학회를 개최하기도 했다. 2005년 시작한 한일비만심포지엄은 2016년부터 대만이 참여해 3국 연례 심포지엄으로 발전했다. 올해엔 유럽비만학회, 미국비만학회와 협력관계를 맺는 성과를 이뤘다.
대한비만학회는 지난 5월 유럽비만학회에서 아시아 대륙을 대표하는 학회로 소개받은 데 이어, 5개월 뒤인 10월 15일 미국 댈러스에서 열린 ‘비만주간학회’에서 또 한 번 위상을 인정받았다. ‘비만 정의의 다양성 - 세계적 관점’을 주제로 열린 한미공동심포지엄이 일요일 황금시간대인 오전 8시~9시 반 대회의실에서 열린 것이다.
박철영 대한비만학회 이사장은 “오로지 국민 건강만 생각하며 난관을 헤쳐나갔던 선배 의사들의 희생과 헌신이 국제적 인정의 밑거름이 됐다”면서 “학회가 글로벌 건강에 기여할 수 있도록 역할을 업그레이드하고 실행해나가겠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