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 연명치료를 의미 없다 하는가?
[손춘희 ‘죽음과 의료’]
오늘날 한국인 10명 중 8명은 병원에서 죽음을 맞는다. 그러면서 자연사는 없어지고, 모든 죽음이 병사나 사고사가 되었다. 태어난 자는 죽는 것이 자연의 이치인데 자연사가 없어지니, ‘이렇게까지 살아야 되는가’ 할 때도 치료가 멈추지 않는다.
연명치료 거절이 법제화되면서 멈춰야 할 곳을 선택할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올바른 선택법은 배우지 못한 채, 중환자실 앞 담당 의사의 긴박한 설명만으로 결정하고 오랫동안 후회할 수도 있다. 본 칼럼에서는 간단하게라도 연명치료의 중단 결정을 어떻게 할지 같이 생각해 보려 한다.
1. 연명치료 중단은 죽음의 선택인가?
2. 연명치료가 의미 없다고?
3. 누가 치료를 의미 없다 하는가?
4. 죽겠다고 한다면 죽일 수 있나, 안락사란?
5. 나의 연명치료 중단 결정 어떻게, 왜 해야 하나?
1995년 미국의사협회지(JAMA)에 말기 질환 통보나 생애 말 진료 결정에 관한 태도가 인종에 따라 차이가 있는지 조사한 연구 결과가 실렸다. 여러 인종이 모여 사는 로스앤젤레스에서 한국계, 유럽계, 아프리카계, 멕시코계 미국인에게 설문 조사 후 분석한 연구다.
먼저, 말기암으로 진단되었을 때 환자에게 직접 알려야 된다는 응답이 한국계(47%), 멕시코계(65%)는 유럽계(87%), 아프리카계(88%)보다 적었다. 그리고 회복 가능성이 없다는 앞으로의 경과 통보 역시 본인에게 알려야 한다는 비율이 한국계(35%), 멕시코계(48%)가 아프리카계(63%), 유럽계(69%)보다 낮았다.
인공호흡기 사용과 같은 생애 말 진료를 환자 본인이 결정해야 한다는 의견도 한국계(28%), 멕시코계(40%)가 아프리카계(60%), 유럽계(65%) 미국인에 비해 적었다. 한국계 미국인은 그런 결정을 가족이 해야 한다는 의견이 타 인종에 비해 높았다(57%).
오래전 연구여서 현재 우리들의 생각과 같을지 의문스러울 수 있다. 하지만 아직도 우리나라에서는 여전히 연명의료 중단 결정을 가족들이 하고 있다.
2023년 서울대병원 연구에 의하면 연명의료 중단 결정을 병원 윤리위원 지원 서비스에 의뢰했을 때, 90% 이상은 이미 의사결정 능력이 없는 상태였다. 이들 중 26.7%는 이전에 본인의 의사를 밝혔지만, 나머지는 가족 등의 대리 판단으로 결정한다.
'연명의료 중단 결정', 26,7%는 본인이, 나머지는 가족이
현대는 대가족을 이루면서 하루 대부분을 같이 생활하던 농경 사회가 아니다. 성인이 되어서는 일 년에 몇 번을 못 만나는 가족들도 많고, 만나서 진지하게 삶의 질이나 죽음을 얘기하는 가족은 많지 않다.
그렇다면 가족들의 대리 결정이 환자의 생각인지, 자녀들의 생각일지는 의문이다. 때로 떠나보내지 못하는 아쉬움이나, 주변 시선에 대한 부담 때문에 환자가 원치 않는 혹독한 치료를 결정하기도 한다. 어떤 때는 오랜 간병과 치료에 대한 부담으로 환자의 뜻에 반해 효과적인 치료를 포기할 수도 있다.
1993년 미국에서 말기 질환 환자와 자녀들의 치료에 관한 생각이 어느 정도 일치하는지 조사한 연구가 있었는데, 기대와 달리 의견 차이는 컸다. 심폐소생술 시행 여부는 31.8%, 치료 중단은 78.6%, 안락사에 대해서는 75%가 생각이 달랐다.
의료진 역시 환자에게 나쁜 상황을 전하고 의논하기가 부담스럽기는 마찬가지다. 때론 “환자에게 직접 얘기해서 심적 충격으로 병세가 악화하였다” 항의하는 가족들도 만난다.
‘동반자살’이라는 표현이 있다. 어린 자녀를 죽이고, 부모가 자살한 사건을 이를 때 사용하던 용어다. 하지만, 이제는 ‘자녀 살해 후 자살’ 사건으로 부른다.
부모와 자녀는 가족이라도 타인이다
타인의 가치와 그에 따른 결정은 미성년 자녀의 부모라 하더라도 대신할 수 없다는 의미다. 살아온 기간만으로 생각의 깊이를 가늠할 수는 없지만. 더 오랜 세월을 겪은 부모의 가치를 자녀들이 온전히 알고 그 뜻대로 하리라 장담할 수 없다.
오랫동안 죽음은, 특히 노인에게 죽음에 관한 얘기는 감히 꺼낼 수 없는 주제가 되었다. ‘방 안의 코끼리’라는 말이 있다. 누구의 눈에나 보이지만, 건드리면 골치 아파지기 때문에 아무도 얘기하지 않는 문제를 일컫는 말이다.
사람은 언젠가 죽는다는 것을 누구나 알고 있지만, 아무도 그 얘기를 꺼내지 않는 동안 ‘어떻게 죽고 싶은지’를 얘기할 시간을 놓치고 만다. 정확히 얘기하자면 ‘이렇게 해서까지는 살고 싶지 않은’ 방법이다.
죽음 이후를 아무도 모르기에, 우리가 죽음을 얘기할 때, 대부분 내용은 죽을 때까지 어떻게 살 것인가이다. 호스피스를 편안히 죽기 위해(흔히 ‘웰 다잉’이라고 부르는) 들어가는 곳으로 오해하지만, 호스피스는 임종의 시간이 오기까지 자신의 가치에 맞도록 살기 위해 들어가는 곳인 것처럼.
연명의료중단 결정에 관한 법이 제정되었다. 법의 뜻인 ‘이렇게 살고 싶지는 않을 때’를 본인 가치에 따라 숙고하고 결정하는 시간이, 우리의 삶과 죽음을 큰 틀에서 바라볼 수 있는 때가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