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의의 여신'은 의료사고 책임을 누구에게 먼저 물을까
[유희은 의료소송 ABC]
2015년 어느 날. 뼈를 다친 73세 남자환자가 병원에 입원했다. 의료진과 환자, 보호자는 수술하기로 했다.
이에 마취과 전문의 A 씨는 마취(10:15)하고, 간호사에게 환자를 지켜보도록 지시(10:42)한 후 수술실을 나왔다. 수술은 오전 11시 즈음 시작되었다. 수술 중 환자에게 저혈압과 함께 산소포화도 하강이 발생했다. 마취과 의사 A 씨는 의료진의 호출에 수술실로 돌아왔다(11:17).
마취과 의사와 함께 의료진은 수술을 중단하고 심폐소생술 등 응급처치를 시행하였다. 하지만 상황이 나아지지 않자 의료진은 환자를 대학병원급 ‘상급의료기관’으로 급히 이송했다.
하지만 대학병원 응급실 도착(13:33)할 당시, 이미 심정지 상태에 있던 환자는 결국 회복하지 못하고 사망했다.
유가족은 손해배상을 청구하는 민사소송, 담당 의사의 업무상과실치사 책임을 묻는 형사 소송을 함께 제기했다. 수년간의 법정 다툼 끝에 올해 8월, 대법원 최종 판결이 나왔다.
유가족, 민사와 형사 소송 함께 제기...8년만에 대법원 판결까지
먼저, 민사소송. 대법원은 “마취과 의사 A씨가 마취 중인 환자에 대한 감시 업무를 소홀히 하여 응급상황에서 간호사의 호출에 즉시 대응하지 못함으로써 제때 심폐소생술을 시행하지 못했다”고 지적했다.
그러면서 “A 의사가 신속히 혈압회복 조치를 하였더라면 저혈압 등에서 회복하였을 가능성도 있었다”라고 덧붙였다. 진료상 과실이 환자를 사망에 이르게 했을 개연성이 충분하다고 판단한 것.
또 “A 씨 등 의료진이 사망 원인이 진료상 과실이 아니라는, 즉 다른 원인에 의한 것임을 증명하지 않은 이상 진료상 과실과 사망 사이의 인과관계는 추정된다”고 판시했다. [대법원 2023년 8월 31일 선고, 2022다219427 손해배상(의)]
의료진의 과실과 환자의 사망 사이에 (직접적) 인과관계가 있다고 인정된다는 얘기다. 하지만 이 판결은 더 중요한 의미가 숨어 있다. 피해자, 즉 환자 측의 '증명 책임'을 덜어준, 새로운 판례이기 때문이다.
대법원은 “환자 측이 진료상 과실로 평가되는 행위의 존재를 증명하고, 그 과실이 환자 측 손해를 발생시킬 개연성이 있다는 점을 (충분히) 증명한 경우에는, 진료상 과실과 손해 사이의 인과관계를 추정하여 인과관계 증명책임을 완화하는 것이 타당하다”라고 했다.
대법원은 그러면서 인과관계 증명책임 완화의 이유로 의료행위의 특성을 들었다.
즉 ①(의료행위가)고도의 전문 지식이 필요한 분야인 점, ②현대의학지식 자체가 아직 불완전하다는 점 때문에 “진료상 과실과 환자 측에게 발생한 손해 사이의 인과관계는 환자뿐만 아니라 의료진도 알기 어려운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
'전문가'인 의료진도 다 알기 어려운 의료사고 원인과 결과를 '비전문가'인 환자와 보호자들에게 충분히 증명하라고 요구하는 것엔 한계가 있다는 얘기다. 지금까지 내려진 우리나라 기존 판결들과는 사뭇 다른 방향성이 내포돼 있다.
피해자 '증명 책임' 부담 덜어준 대법원 판결은 역사적 진보
또 하나, 이번 대법원 판결이 중요한 것은 다음 이유 때문이다.
같은 날, 같은 재판부인 대법원 1부는 같은 사안에 대한 ‘형사’ 사건에 대해선 이렇게 판결했다. “업무상(진료상) 과실과 피해 인과관계에 대한 증명이 부족하다”는 이유로 “의사 A 씨는 무죄”라는 것이다. (2021도1833 업무상과실치사죄)
같은 사건에 대한 ‘민사’와 ‘형사’ 사이의 결과가 크게 다르게 나왔다는 얘기다. 이는 형사 사건에선 민사사건에서 적용한 ‘인과관계 추정’ 법리가 적용되지 않기 때문이다.
형사 사건은 민사사건과 달리 “합리적 의심이 없을 정도의 증명이 이루어져야” 피고인(의사 A 씨)의 업무상 과실치사죄가 인정되고, 처벌이 이루어진다.
범죄자에 대한 형벌권 행사라는 측면에서, 범죄의 성립에 민사보다 형사엔 더 엄격한 증명이 필요하다는 것을 보여준 중요한 또 하나의 판례인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