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기 치매 억제하는 돌연변이 유전자, 치매 치료 돌파구 될까
아밀로이드 응집이 많았음에도 오랫동안 정신 건강 유지
조기 치매에 걸리는 가족력을 지닌 남성에게서 치매의 발병을 억제하는 희귀한 유전적 돌연변이가 발견됐다. 알츠하이머병 원인 규명과 치료법 개발에 돌파구가 될지도 모른다는 희망적 반응이 나오고 있다. 15일(현지시간) 《네이처 의학》에 발표된 콜롬비아와 미국 연구진의 논문을 토대로 《네이처》가 보도한 내용이다.
콜롬비아 안티오키아대의 프란시스코 로페라 명예교수(신경과)는 40세 안팎의 나이에 알츠하이머병이 발병하는 대가족을 거의 40년 동안 추적 관찰해 왔다. 약 6000명의 가족 구성원 중 상당수가 조기 치매가 발생하는 파이사(Paisa) 돌연변이라는 유전적 변이를 가지고 있음이 밝혀졌다. 이제 로페라 교수 연구진은 파이사 돌연변이가 있지만 67세까지 치매에 걸리지 않은 한 남성에게서 치매 발병을 지연시키는 제2의 돌연변이를 발견했다.
연구진은 45세~50세에 조기 치매에 걸리게 하는 파이사 돌연변이를 가진 콜롬비아인 1200명의 게놈과 병력을 분석했다. 그러다 67세 때까지 경미한 인지장애만 보인 남성을 발견했다.
연구진은 그의 뇌를 스캔했다. 알츠하이머병의 양대 원인 물질로 추정되는 아밀로이드 단백질 응집(플라그)과 타우 단백질 축적이 높은 수준으로 발견됐다. 논문의 공동저자인 하버드대 의대의 조셉 아르볼레다 교수(안과)는 중증 치매 환자의 뇌를 보는 것 같았다고 말했다. 그러나 기억과 탐색 같은 기능 조정을 맡는 내후각피질(entorhinal cortex)의 타우 축적 수준은 낮았다.
연구진은 이 남성이 정신분열증과 자폐증 같은 뇌질환과 관련된 단백질인 릴린(Reelin)을 코딩하는 유전자에 돌연변이가 발생했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알츠하이머병에서 릴린의 역할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거의 없다.
그래서 연구진은 동일한 돌연변이가 일어나도록 유전자 조작한 생쥐를 해부했다. 그 결과 돌연변이가 발생한 릴린 단백질은 타우 단백질이 화학적으로 변형되어 신경세포 주위에 축적되지 못하게 한다는 것을 발견했다.
이는 알츠하이머병의 주된 원인이 타우 축적보다는 아밀로이드 응집에 있다는 기존 이론에 도전하는 결과다. 최근 미국 식품의약국(FDA)이 잇따라 승인한 레카네맙과 도나네맙 같은 알츠하이머병 치료제의 표적도 아밀로이드 응집이다. 이들 약물은 뇌에서 끈적끈적한 아밀로이드를 효과적으로 제거하지만 인지 기능저하 속도만 개선해준다.
이 남성이 뇌에 아밀로이드 응집이 많았음에도 불구하고 오랫동안 정신 건강을 유지했다는 사실은 알츠하이머병이 훨씬 더 복잡하다는 것을 시시한다. 미국 캘리포니아대 샌프란시스코캠퍼스(UCSF) 산하 글래드스톤 연구소의 야동 황 연구원(신경과 전문의)는 알츠하이머병에는 여러 가지 아형이 있을 수 있으며 그 중 일부만 아밀로이드에 의해 유발될 가능성이 있다고 제안했다. 반면 타우와 연관성은 더 높아 보이는데 이번 논문이 타우가 정신기능 저하에 중요한 역할을 함을 암시하기 때문이다. 타우를 표적으로 하는 치료제는 현재 임상 시험 중에 있다.
해당 돌연변이가 발생한 남성의 형제 역시 파이사와 릴린 돌연변이를 모두 갖고 있었는데 58세에 인지 장애가 시작됐고 64세에 중증 치매에 걸렸다. 이는 파이사 돌연변이를 가진 사람의 평균보다 늦은 나이다. 다만 그 형제는 두부 손상을 겪었고 조기 치매를 유발하는 다른 장애를 갖고 있었다고 연구진은 밝혔다.
돌연변이 릴린 단백질은 알츠하이머병과 관련된 APOE라는 또다른 단백질과 동일한 수용체에 결합한다고 아르볼레다 교수는 지적했다. 동일한 연구진은 2019년 파이사 돌연변이를 가진 여성이 평균보다 30년 늦게 치매에 걸린 것을 확인했는데 그 원인이 APOE2 돌연변이로 인한 것임을 발견했다. 릴린 돌연변이가 있는 남성과 마찬가지로 이 여성의 뇌에서도 훨씬 더 높은 수준의 아밀로이드 응축이 발견됐다.
논문을 검토한 미국 미시간대의 캐서린 카초로프스키 교수(신경과학)는 “논문을 읽고 소름이 돋는 줄 알았다”면서 “알츠하이머병 치료법 모색에서 매우 중요한 돌파구가 열렸다"라고 말했다. 그는 특히 알츠하이머병이 릴린과 APOE 두 단백질과 공유하는 기전이 있음을 알게 됐기에 “멋진 결과”라고 밝혔다.
이번 연구와 2019년 연구결과를 종합하면 릴린과 APOE, 두 단백질이 알츠하이머병 수용체에 결합하기 위해 경쟁하는 사이이며 더 강한 릴린 단백질 또는 더 약한 APOE 단백질 중 하나가 알츠하이머병으로부터 뇌를 보호할 수 있음을 시사한다. 아르볼레다 교수는 릴린 또는 APOE를 표적으로 하는 치료법이 파이사 돌연변이를 지닌 콜롬비아 가족이 경험하는 조기 발병 유형보다 덜 공격적이고 더 느리게 진행되는 산발성 알츠하이머병에 더 효과적일 수 있다고 분석했다.
릴린 돌연변이가 있던 남성이 숨졌을 때 학습과 기억을 통제하는 뇌 영역인 해마가 평균보다 작은 상태였다. 이는 해마가 퇴화하고 있음을 시사한다. 그러나 그의 인지능력이 비교적 온전했기 때문에 뇌의 다른 영역에 있던 신경세포들이 해마의 역할을 대신했을 가능성이 있다고 카초로프스키 교수는 밝혔다.
황 연구원은 “대부분의 연구는 왜 일부 사람이 알츠하이머병에 걸렸는지에 초점을 맞추고 있으며 이 질병에 대항할 수 있는 요인을 갖춘 사람은 극소수에 불과하기에 그에 대한 연구도 희귀하다”면서 이번 연구의 희귀성과 중요성을 강조했다. 그는 릴린과 APOE가 타우에 영향을 미치는 메커니즘을 밝히고 이러한 단백질을 표적으로 삼는 것이 파이사 돌연변이가 없는 알츠하이머병 환자에게도 도움이 될 수 있는지 여부는 추가 연구가 풀어야 할 숙제라고 밝혔다.
해당 논문은 다음 링크(https://www.nature.com/articles/s41591-023-02318-3)에서 확인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