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방 암 환자, 왜 서울로 올라가나 봤더니...
“지역 병원들에 대한 신뢰도 문제”가 가장 큰 이유
중증질환, 특히 암에 걸리면 숱한 환자들이 서울로, 서울로 몰려든다.
국민건강보험공단에 따르면 2020년 지방의 암 환자 중 약 30% 이상이 서울에서 진료를 받았다. 경기, 인천 등 수도권 전체로 넓히면 그 비율은 더 높아진다.
(사)한국암환자권익협의회(대표 김성주)는 지방 암 환자들을 대상으로 ‘수도권 의료 이용 현황 및 만족도’를 최근 조사했다.
암 환자 중 ‘비수도권’에 살지만 ‘수도권 병원’에서 ‘암 치료’를 받아온 ‘19세 이상’ 성인 188명에게물었다. 이들의 거주지는 부울경(43명), 대구·경북(43명), 대전·충청(43명), 호남·제주(40명), 강원(19명) 등이다.
이들이 먼 길을 오가며 암 치료를 받는 데 따른 고통은 컸다.
일단 암 치료를 받기 위한 대기 기간이 한 달이 넘었다. 보통은 4~8주(71명, 37.77%)나 됐고, 12주 이상 기다리는 경우(30명, 15.96%)도 많았다.
집을 떠나 자녀·친척·지인 집에 임시 거주(68명, 36.17%)하거나 요양병원 등에서 지내며 통원하는 경우(40명, 21.28%), 호텔이나 원룸, 셰어하우스, 환자방을 전전하는 경우(29명, 15.43%)도 많았다.
이들이 한번 병원에 갈 때 들이는 시간은 평균 3시간(194.49분)이 넘었지만 164명(86.77%)이 ‘만족’ 또는 ‘매우 만족’한다 했다.
다른 암으로 진단 받는 상황이 생길 때도 176명(93.62%)이 “수도권 병원을 이용하겠다”고도 했다. "(자신뿐 아니라)가족, 지인에게도 추천하겠다”는 비율까지 92.55%(174명)로 높았다.
김성주 대표는 3일 “서울아산병원 등 이른바 빅(Big)5 병원의 의사들을 절대적으로 믿는다는 얘기”라면서 “다양한 채널을 통해 정보를 찾아봐도 이들 외엔 전국적 지명도가 있는 의사가 별로 없기 때문”이라 풀이했다.
실제 이들 중 절반이 넘는 124명(65.96%)이 “수도권 의사들의 전문성에 대한 신뢰가 높아서”라고 응답했다. 병원 인지도(70명, 37.23%), 암 전문기관(49명, 26.06%), 큰 병원 규모(22명, 11.70%)도 중요한 이유로 들었다.
지방 병원을 선택하지 않은 이유는 그 반대로 생각하면 됐다. 가장 많은 106명(56.38%)이 “의사 전문성에 대한 신뢰도가 낮아서”라고 응답했다.
설문에 응했던 한 암 환자는 "처음엔 부산이나 창원에 있는 병원에 가려 했는데, 남편과 아들이 무조건 '서울 명의'에게 가야 한다고 우기는 바람에 서울로 가게 됐다"고 했다.
이들을 멀리 서울까지 가게 만든 암은 식도암(23.94%), 유방암(13.83%), 위암(12.23%), 대장암(11.17%), 췌장암(7.45%), 자궁경부암(6.91%), 간암(4.79%), 갑상선암(4.26%) 등 이었다.
진단과 치료가 어려운 암도 있지만, 대부분은 진단 방법과 수술법, 약물치료법 등 진료 프로세스가 표준화돼 있는 질환들이다. 즉, 전국 어디에서도 대학병원급 정도만 되면 비슷한 결과가 나온다는 것이다. 일부 암은 부울경 쪽의 5년 생존률이 평균 이상인 경우도 있다.
이는 매체 홍보의 영향이기도 하다. 경쟁이 심한 수도권 병원들은 마케팅 차원에서 매스컴 노출에 적극적인 반면, 지역 대학병원들은 그렇지 않다. 병원 수용 한계를 넘어설 정도로 병실은 물론 외래까지 가득 차 있어서다. 의사들의 '불친절'과 고압적인 자세도 한몫을 한다.
암 환자들은 또 '암 관련 의료진 부족'(94명, 50.00%)이나 '작은 병원 규모'(28명, 14.89%)와 함께 '낮은 병원 인지도'(27명, 14.36%)를 서울로 가는 주요 이유로 들었다.
'최신 의료 장비를 이용할 수 없음'(26명, 13.83%), '체계적이지 않은 치료 절차'(16명, 8.51%) 등도 지역 병원의 선택을 꺼리는 이유다.
'지방 병원을 이용하면 다음에 수도권 병원으로 옮길 때 전원(轉院)절차가 불편할 것 같아서'(40명, 21.28%)나 '주위 사람이 만류해서'(34명, 18.09%)라는 이들도 있었다.
비용 문제를 포함해 온갖 불편에도 이들이 서울로, 수도권으로 힘든 발걸음을 옮기는 데는 다양한 문제가 복합적으로 깔려 있다는 얘기다. 특히 ‘3기’가 넘는 중증 암 환자 중엔 새로운 항암제 ‘임상시험’ 기회를 염두에 두고 수도권 병원을 선택하는 예도 있었다.
김성주 대표는 이에 “수도권 병원으로의 쏠림 현상이 시간이 갈수록 심해진다”면서 “암 치료를 위한 대기 기간이 더 길어지고, 제때 적절한 치료를 받지 못하는 환자가 늘어날 수밖에 없다”고 우려했다.
실제로 지방 환자가 빅5 등 대학병원급 수도권 상급종합병원(42곳)으로 ‘원정’을 가는 수는 이제 100만 명 돌파가 코 앞이다. 북새통인 서울 대형병원 외래환자의 절반 정도가 지방 환자라는 얘기도 그래서 나온다.
이들이 수도권 병원들에 낸 (급여)진료비만 2조 원을 훌쩍 넘는다. 21년에 이미 2조7060억 원이었다. 개인이 부담하는 '비급여' 진료비까지 합하면 이미 3조 원대에 들어섰을 수 있다. 절반만 지역으로 돌려도 매년 대학병원 한두 개는 더 지을 수 있는 재원이다.
지방에선 "의사가 없다" 또는 "돈이 없다"고 아우성이다. 커질 대로 커진 대한민국 '의료격차'를 보여주는 중요한 증거다.
김 대표는 “이를 극복하자면 지역 병원 전문성에 대한 신뢰도 회복이 시급하다”고 했다. “상대적으로 매스컴 노출이 많은 수도권 병원에 맞서 매스컴 활용은 물론 지역 내 주민 커뮤니티나 단체 등과의 협력을 통해 새롭게 신뢰 관계를 재구축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전문성 있는, 그리고 전국적 지명도가 있는 의사들을 초빙해오거나 내부에서 집중적으로 양성해야 할 필요성도 제기된다. 그는 “암의 종류와 특성에 따라서 해당 의료진이 없거나 부족해서 수도권을 이용할 수밖에 없는 환자도 있었다”고 했다.
물론, 이번 조사는 수도권 병원을 선택한 이들만을 대상으로 했다는 점에서 일정한 한계는 있다. 애초부터 지역 병원을 선택한 이들에겐 또 다른 이유가 있을 터.
보건의료산업학회 배성권 학회장(부산 고신대 의료경영학부 교수)은 “지역 암 환자 중엔 수도권 병원을 선택하는 이들만 있는 것은 아니다”면서도 “수많은 불편을 감수하면서도 수도권 병원으로 향하는 이들의 마음을 읽을 수 있다는 점에서 의미는 있다”고 했다.
그는 이어 “지방 환자들의 수도권 쏠림 현상은 수도권에 대형병원 분원들이 잇따라 들어서면 앞으로 수년동안 더 빨라질 것”이라며 “정부는 국가 의료격차를 개선하기 위한 획기적인 특별 조치를, 지역은 병원과 의사들 인지도를 높이려는 노력을 지속해서 경주할 때”라고 지적했다.
실제로 서울대병원과 세브란스병원이 2026년 완공을 목표로 800 병상 분원을 경기도 시흥과 인천 송도에 설립한다. 앞으로 수도권엔 대학병원 분원만 10곳이 더 들어설 예정이다. 지금도 전국 환자들을 쓸어 담고 있는데, 여기에 6000병상 이상이 더 늘어난다는 것이다.
시설과 인력, 브랜드와 자본 등에서 압도적인 수도권 대형병원들이 분원들 추가 개원하며 마케팅까지 덧붙이는 시점이 되면, 전국에서 의사도 환자도 여기로 몰리면서 지역 의료 생태계는 본격적으로 황폐화 위기를 맞게 될 수도 있다.
한편, 부산대 의대 장철훈 학장은 "암에 걸리면 반드시 서울로 가야한다는 '확증편향'을 지닌 이들에겐 지역 병원들이 객관적 증거를 제시하며 '굳이 서울까지 갈 필요가 없다'고 아무리 설득해도 별 소용이 없는 듯하다"면서 "이들이 안심하고 지역 병원에 몸을 맡길 수 있는, 새로운 접근법이 필요하지 않나 생각한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