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운 의사협회에 바란다
[Dr 곽경훈의 세상보기]
새로운 의사협회에 바란다
119 상황실에서 중환자를 이송한다는 소식을 전하면 순식간에 긴장으로 팽팽한 공기가 응급실을 채운다. 상황실에서 특히 의식 저하, 저혈압, 약한 자발호흡 같은 설명을 추가하면 긴장은 절정으로 치닫는다.
뇌졸중, 심근경색, 성인호흡부전증후군에 해당하는 폐렴 같은 질환을 떠올리며 기관내삽관과 인공호흡기 연결부터 심폐소생술까지 만반의 준비를 한다. 코로나19 대유행이 시작한 후부터는 D급 보호구를 챙겨입고 격리실을 준비하는 것도 잊지 않는다.
그러다가 짧은 기다림 끝에 구급차가 도착하고 이동식 침대에 누운 환자를 내리면 전쟁터처럼 긴박하게 상황이 진행한다. 상황실의 연락과 비교하여 환자가 안정적이면 다행이나 그렇지 않으면 환자의 상태가 악화하지 않도록 조치하면서 동시에 그런 문제를 만든 원인을 찾아 적절한 치료계획을 세워야 한다. 그런 상황에서는 응급실 의료진 대부분이 해당 환자에게 집중할 수밖에 없다.
그래서 중증질환에 해당하지 않는 다른 환자의 진료는 늦어질 때가 많다. 또 중환자의 상태가 안정할 때까지 얼마나 시간이 걸릴지 정확히 예측하기 어려워 중증질환에 해당하지 않는 다른 환자에게는 ‘1시간 이상 기다릴 수 있다’, ‘진료순서가 지체할 가능성이 크니 인근의 다른 응급실을 방문하라’고 설명한다. 그래도 가까스로 중환자의 상태를 안정시킨 후, 돌아보면 짜증과 불만에 가득한 얼굴과 마주할 때가 적지 않다.
재미있게도 30분 혹은 1시간 정도의 기다림에 짜증과 불만을 호소하는 환자 대부분은 매우 경미한 질환에 해당한다. 애초에 그들의 순서가 밀린 이유가 중증질환에 해당하지 않아서였기 때문이다. 주방용 도구에 손가락을 다쳤거나 인후염 같은 사소한 호흡기 질환, 계단에서 발목을 삐끗하거나 지난 밤의 과음으로 구토를 호소하는 환자, 힘이 없으니 비타민 섞인 수액을 달라는 사례도 있다.
심지어 기다리지 않고 심폐소생술을 시행하는 중에 끼어들어 자신부터 진료하라고 윽박지르는 경우도 가끔 마주한다. 그런 이들에게 상황을 설명하면 ‘그럼 나는 환자가 아니란 말이냐?’, ‘응급실에 왔으면 모두 환자인데 왜 차별하느냐?’고 한층 분노하는 사례도 드물지 않다.
그러나 그들의 생각과 달리 응급실은 단순히 휴일과 야간에 외래의 기능을 대신하는 곳도 아니며 사소한 질환과 중증질환을 평등(?)하게 대우하는 곳도 아니다. 응급실은 모든 질환을 진료하고 환자의 모든 불만을 해결하는 곳이 아니라 적절한 치료를 신속하게 시행하지 않으면 생명이 위험하거나 심한 후유증이 예상하는 환자를 우선하여 진료하는 곳이다. 그러니까 중환자로 인한 진료 지연에 불만을 표시하는 사람은 응급실이란 개념을 잘못 이해한 것이다.
이런 개념에 대한 잘못된 이해는 응급실에만 그치지 않는다. 주변을 둘러보면 의료서비스의 개념을 잘못 이해하는 사례가 적지 않다. 심지어 의료인, 그러니까 의사도 마찬가지다. 대부분의 선진국이 의사의 독점적인 권리를 보장하고 보호하며 그걸 침해하면 법으로 처벌하는 이유는 몇몇 일반인의 생각과 달리 의사를 특별하게 좋아해서도 아니며 의사가 기득권층이라 결탁한 것도 아니다.
국가가 의사의 독점적인 권리를 보장하지 않고 누구나 원하면 마음껏 의료행위를 할 수 있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의사, 한의사, 간호사, 응급구조사, 약사의 면허를 통제하고 그 업무 범위를 명확하게 정하지 않으면 어떤 일이 발생할까? 몇몇 일반인의 주장처럼 ‘의사의 기득권이 무너져 모든 사람이 싼 가격에 훌륭한 진료를 받는 유토피아’가 아니라 검증하지 않은 기괴한 진료와 절박한 사정에 처한 환자를 달콤한 말로 속여 돈을 갈취하는 사기가 판을 칠 것이 틀림없다.
실제로 국가가 의사면허를 제대로 관리하지 않은 19세기 후반부터 20세기 초반 미국에서 그런 일이 벌어졌다. 따라서 국가가 의사의 독점적인 권리를 보장하고 보호하는 이유는 그렇게 해야 국민 전체에게 우수한 의료서비스를 제공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재미있게도 의사조차 가끔 이런 개념을 착각한다. 앞서 말했듯, 국가가 의료인의 권리를 보장하고 보호하는 이유는 의료인을 잘살게 하려는 배려가 아니라 그렇게 하는 것이 전체 국민에게 우수한 의료서비스를 제공하는 것에 유리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단순히 학창 시절 성적이 우수해서, 힘들고 긴 수련 기간을 거쳤으니 대우받을 권리가 있다는 주장은 합리적이지 않다.
의사협회 회장 선거가 끝났다. 작년의 공공의대 사태부터 최근의 의사 면허관리 강화법, 또 코로나19 대유행의 방역과 백신을 둘러싼 다양한 문제까지 어느 때보다 의사협회의 역할이 중요한 시기에 부디 새로운 집행부는 의료서비스의 본질적인 개념을 잊지 않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