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리 절단 않고 살린다" 가난 이긴 골육종 代父

[대한민국 베닥] ⑱골연부종양 원자력병원 전대근 과장

원자력병원 정형외과 전대근 과장(61)의 진료실 책장에는 1년 전 초등학생으로부터 받은 그림이 있다. 자신을 잘 치료한 ‘의사 선생님’에게 상장을 주는 내용이다. 아이의 부모는 딸이 다리가 아프다고 칭얼거려 병원에 갔다가 청천벽력 같은 소리를 듣고 사색이 됐다. 딸의 장딴지 근육에 암이 생겼고 다리를 절단해야 한다는 것. 같은 아파트에 사는 다른 의사가 원자력병원에 가보라고 귀띔하자, 지푸라기를 잡는 심경으로 왔다가 딸의 생명도, 다리도 살렸다. 전 과장은 암이 있는 근육만 잘라내는 수술에 성공했고, 지금 친구들과 잘 뛰어다니는 아이는 그림을 그려 은인에게 선물했다.

전대근 과장은 뼈에 생기는 암인 ‘골육종’을 비롯해, 팔다리 골반 척추의 뼈 근육 관절 조직에 생기는 종양인 ‘골연부종양’ 환자들에게 희망과도 같은 의사다. 특히 골육종의 경우 전 과장이 처음 환자를 보던 30년 전만 해도 완치율이 10~20%에 불과했지만, 수술과 항암요법을 병행하기 시작한 뒤 지금은 사지를 절단하지 않아도 70%에 이를 정도로 치료성과가 좋아졌다. 전 과장은 특히 수술 부위를 최소화하고, 항암치료의 시기를 조절해서 세계 최고 수준의 성적을 올리고 있다.

전 과장의 진료실에는 숱한 기적의 이야기가 있다. 왼쪽 넓적다리 전체에 번진 암이 피부를 뚫고 나올 정도여서 “혹만 제거해서 1년만 살게 해 달라”고 애원한 환자가 두 발로 전국 여행을 다니게 된 경우, 골반 대부분을 잘라내고도 살 확률이 30% 남짓 이라는 환자가 수술을 받고 다른 환자를 위한 연주회를 연 경우….  전 과장은 수많은 환자를 살렸지만, 많은 환자를 속절없이 떠나보내기도 했다. 전 과장은 환자가 잘못되면, 기적이 일어난 환자를 떠올리며 한 명이라도 더 건강하게 지키기 위해 마음을 다잡는다.

전 과장은 “애초에 사람을 살리기 위한 거창한 목표를 위해 의사가 된 것은 아니다”고 말한다. 그는 대입 시험을 앞두고, 군대를 중령 예편했던 아버지가 사업에 실패해서 서울 끝자락 방학동의 단칸방으로 이사해야만 했다. 그해 연세대 의대에서 떨어졌고 단칸셋방에서 부모, 두 동생과 함께 지내며 버스로 1시간 반 거리의 학원까지 오가면서 공부해서 서울대 의예과에 합격했다.

대학에선 돈이 없어 친구들과 어울리는 것조차 어려웠다. 선배들이 미술반을 모집한다고 해서, “중학교 때 미술에 소질 있다는 이야기는 들었는데, 돈이 들면 어떡하지?”하며 동아리 방에 놀러갔다가 첫날 낮술을 마시고 ‘포섭’됐다. 동아리 방에 갈 때마다 선배들은 배고픈 후배에게 라면을 사줬다. 전 과장은 아르바이트 2, 3개를 하면서 부모에게 생활비를 드리고 남은 돈으로 붓과 물감을 샀다.

화가의 심미안 때문이었을까, 전 과장은 본과 3학년 때 정형외과 실습에 갔다가 쪼글쪼글한 할머니의 피부를 절개해서 노출된 뼈와 혈관을 보고, 빛나는 갈치를 연상했다. 그리고 “아름답다. 이게 내 길!”이라고 정했다. 그러나 성적이 턱도 없이 모자라서 공중보건의사로 병역의무부터 복무했다. 경북 예천군에서 근무했지만 환자가 너무 없어서 《해리슨 의학교과서》 2,000쪽을 번역하며 공부를 다시 하며 자신의 한계를 돌아다봤다. 선배 김흥준 박사와 전시회를 열기도, 최승순 박사와 지리산 종주를 하기도 했다. 무엇보다 이 무렵 극작가 이근삼 전 서강대 신문방송학과 교수의 딸인 반려자를 만나 결혼한 것은 삶의 가장 큰 행운이었다.

전 과장은 서울대병원 인턴시험에 합격해서 신방(新房)을 예천군에서 수도권으로 옮기려고 했지만 수중에는 1000만원밖에 없었다. 인천 만수동의 주공아파트 22평형을 1040만원에 선착순 분양한다는 광고를 보고 2시간을 가서 무작정 계약했다. 1주 두 번은 새벽 4시에 일어나서 6시까지 연건동의 병원까지 출근하고, 자정 무렵 귀가했으며 나머지는 병원에서 기거했다. 그해 연말 정형외과 전공의에 ‘기대반, 우려반’의 심정으로 지원했는데 덜컥 합격했다.

그러나 궁핍한 가계가 문제였다. 전 과장은 전공의 2년차부터 교수들 몰래 다른 병원에서 야간당직을 섰다. 오후 6, 7시까지는 일을 마쳐야 했으므로 모든 일을 날렵하게 처리해서 ‘전 번개’라는 별명이 붙었다. 야간당직을 하는 병원으로 환자의 엑스레이 사진을 들고 가서 꼼꼼히 봤고, 논문도 썼으므로 ‘일석삼조’였지만, 매일 스승에게 걸리면 어떡하나 마음 졸이며 퇴근했다. 선배인 구경회 현 분당서울대병원 교수가 가난한 후배의 사정을 알고 몰래몰래 도와줬다. 고생 끝에 전공의를 마칠 무렵 드디어 서울에서 아파트를 샀다. 그는 전공의를 마치고 월급 많이 주는 동네병원에서 근무하며 여유 있게 살려고 했지만, 아내가 정색하고 말했다. “이토록 어렵게 공부해놓고, 정형외과의 본령을 맛도 못 본 상태에서 동네병원을 가다니요? 큰 병원에서 있어야 해요!” 아내를 이길 수 없었다.

1991년 겨울 원자력병원에서 이수용, 백구현 박사로부터 “함께 일하자”는 연락이 왔다. ‘정형외과의 꽃’인 종양을 담당해달라는 것이었다. 전 과장은 “환자 죽는 것을 안 보려고 정형외과에 지원했는데…”하면서도 선배의 청을 매몰차게 거절하지 못해 약속장소에 나갔다. 두 사람은 강남의 일식당에서 회와 술을 권하면서 설득했다. 반쯤 넘어간 상태에서 아내를 위한 ‘회 도시락’을 사주자 유혹에 넘어가 버렸다.

그러나 백 박사는 서울대 교수로 자리를 옮겨 버렸고, 전 과장은 20일 근무하고 회의(懷疑)에 휩싸였다. “이곳은 이수용 박사처럼 큰 뜻을 품은 의사에게 어울리지, 나 같은 피라미에게는 안 어울려!” 아내와 의논했다가 또 퇴짜를 맞았다. “계약서 사인의 잉크가 마르지도 않았는데 그만 두다니요? 남자가 사인을 했으면 2년은 있어야하지 않나요?” 말문이 막혔다. “에라, 그래, 2년 동안 정형외과 종양이 어떤지나 제대로 보자! 그때 그만 두든지….”

그는 1995년 3월 원자력병원 정형외과 10돌 행사를 멋지게 치르려는 스승의 바람을 충족시키고 사표 낼 시기를 저울질 했지만, 스승은 제자보다 한 수 위였다. 이 박사는 제자를 불러서 미국 유학을 제안했다. 전 과장은 미국 뉴욕의 메모리얼-슬론케터링 암센터에 6개월 연수 갔다가 귀국한 뒤 개원을 준비했지만, 이번에는 국제통화기금(IMF) 경제위기 때문에 눌러앉아야만 했다.

“13년 동안 숱한 환자를 수술하면서 내가 뭘 남겼나? 메모리얼-슬론케터링 암센터의 존 힐리 박사가 나보다 수술을 훨씬 못하지만 세계적 대가로 인정받는 것은 논문 때문 아닌가? 환자를 제대로 보기 위해서라도 논문을 쓰자. 2년 내 성과가 없으면 연구 머리가 안 되니 그때 나가자.”

전 과장은 수술에 대해서만은 자신이 있었다. 자신의 기똥찬 수술결과에 대해서 논문을 쓰면 웬만한 학술지에서는 받아줄 것으로 생각했다. 그러나 판판이 거절당했다. 그러다가 편집장 리처드 브랜드 박사로부터 연락이 왔다. “논문을 쓰고 싶어 하는 열정은 존중하지만 논문을 쓸 줄 모르는 것 같다. 논문 쓰는 법에 대한 내 논문부터 읽어봐라”는 내용이었다. 얼굴이 후끈거렸다. 47세였지만 중고생처럼 논문을 코팅해 책받침으로 만들어 읽고 또 읽었다. 그리고 편집장의 룰에 따라 논문을 재작성해서 보냈더니 “지난번에 비해서 교정이 잘 됐다. 이것만 고치면 되겠다”고 수정요청사항을 보내왔다. 헉. ‘이것만’이 110개였다. 전 과장은 고치고 또 고치고, 해명할 것은 해명해서 보냈다. 수정 부문만 A4지 13장 분량이었다. 자신이 고칠 수 없는 부분은 이실직고했더니, 브랜드 박사가 직접 보완해서 학술지에 실었다.

정형외과 세계 3대 학술지 가운데 하나인 ‘CORR(Clinical Orthopaedics and Related Research)'에 넓적다리뼈와 고관절 전체를 인공관절로 바꾸는, 수술 13명의 사례 분석결과가 게재되자 국내 의학계가 술렁거렸고, 전 과장은 대한정형외과학회 학술 본상을 받았다. 전 과장은 이듬해 특정단백질 에즈린을 이용해서 골육종 환자의 위험도를 예측하는 모델을 개발해서 같은 학술지에 발표한 것을 비롯해서 매년 7~11편의 논문을 발표했다. 그는 2011년에는 무려 3000여 장의 사진 자료를 담은 교과서 《Pathfinder of Bone Tumor》를 발간하기도 했다. 

전 과장은 지금 세계의 교과서를 바꿀 작업을 하고 있다. 골육종은 항암치료 후 수술을 하는 것이 표준 치료법이지만, 전 과장은 많은 환자에게서 항암 치료 뒤 암 부위가 적어지지 않고 40%는 오히려 커진다는 점에 주목했다. 어차피 인공관절로 대체할 가능성도 큰데, 항암치료로 환자의 진을 빼는 것이 무의미해보였다. 그래서 필요에 따라 수술을 먼저 하고 항암치료를 받게 했더니 완치율이 10~20% 올라가는 결과가 나왔다. 하지만 국제 학계에서는 “믿을 수가 없다. 환자 케이스를 고른 것이 아닌가?”하며 인정하기를 꺼리고 있다. 전 과장은 데이터를 더 쌓아서 논문을 발표할 예정이다. 지금까지 250명의 환자를 수술부터 한 결과 기존의 55% 완치보다 뛰어난 70% 완치의 결과를 얻었다.

전 과장은 밑바닥의 가난을 경험했기 때문에 환자의 경제 사정까지 고려하는 의사다. 12세 때 왼쪽 허벅지의 골육종 진단을 받고 수술 후 인공관절을 넣은 30대 주부 황 모 씨는 2015년 아기 둘을 낳은 상태에서 인공관절에 연결된 뼈가 부러져 뇌사자의 뼈를 이식하는 수술을 받았다. 황 씨는 “보험이 되지만 수술비가 만만찮았을 때 전 과장님은 이런 부분까지 신경 써서 챙겨줬다”면서 “부부와 동생 모두 전 과장님과 세상의 도움에 보답하기 위해 인체조직 기증 희망서약을 했다”고 말했다.

대한민국 베닥은 의사–환자 매치메이킹 앱 ‘베닥(BeDoc)’에서 각 분야 1위로 선정된 베스트닥터의 삶을 소개하는 연재입니다. 80개 분야에서 의대 교수 연인원 3000명의 추천과 환자들의 평점을 합산해서 선정된 베스트닥터의 삶을 통해 참의사의 본모습을 보여드립니다. 여러분의 관심과 참여는 베닥 선정을 통한 참의사상 확립에 큰 힘이 됩니다.

 

    이성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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