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리 천국' 의료계, 제2의 신해철 또 나온다
#1. 지난 5월, 부산의 한 정형외과 소속 의사 ㄱ씨(46)는 의료 기기 영업 사원 ㄴ씨에게 환자 ㄷ씨의 어깨 수술을 맡겼다. 환자 ㄷ씨는 본인이 동의하지 않은 유령 수술을 받다 심정지가 일어나 뇌사 판정을 받았다. 의사 ㄱ씨는 지난 7일 자신의 혐의를 인정한 후 풀려나 17일부터 진료를 재개했다.
#2. 울산의 한 산부인과는 2014년 12월 이후 약 4년간 간호사, 간호조무사에게 수백 차례 대리 시술을 시켰다. 산부인과 원장 ㄹ씨(44)를 포함한 병원 관계자 22명이 무면허 의료 행위 방조 등 의료법 위반 혐의로 입건됐지만, 이 중 11명은 여전히 해당 병원에서 근무하고 있다.
의료기기상, 간호조무사에게 대리 수술을 시킨 병원 의료진이 진료 현장으로 속속 복귀하고 있다.
무면허 의료 행위를 부추겨 환자의 생명과 안전을 위협한 이들 의료진은 현행 의료법상 면허 정지, 면허 박탈 등 업무 행위에 직접 제재를 받지 않는다.
2000년 개정된 의료법에 따라 의사는 낙태, 허위진단서 작성, 마약류 관리 위반 등 의료법이 지정한 일부 범죄에서 금고형 이상의 처벌을 받았을 때만 면허가 취소된다. 살인, 강간, 절도, 횡령, 업무상과실치사 등 일반 형사 범죄에 의한 형 선고는 의사 자격 유지에 아무런 영향을 주지 않는 것이다.
'신해철 집도의'로 유명한 강세훈 씨(46)는 의료 사고를 일으킨 의사가 의료 행위를 지속하다 또 다른 사고를 저지른 대표 사례다. 지난 2014년 10월, 강 씨는 '서울스카이병원' 병원장 재직 당시 가수 신해철 씨의 위 수술 중 천공을 유발해 신 씨를 사망하게 한 업무상과실치사 혐의로 기소됐다.
강세훈 씨는 4년 넘게 이어진 법적 공방 속에도 의사 면허를 유지하며 진료를 이어갔다. '서울스카이병원'을 '서울외과병원 종합검진센터'로 바꾸어 운영하던 강 씨는 기존 병원을 폐업하고 2015년 8월 외국인 환자를 주 대상으로 한 '서울강외과의원'을 개업했다.
그 해(2015년) 12월, 강 씨에게 위 수술을 받은 호주인 환자 A씨가 사망했다. 신해철 씨에 이은 제2의 피해자가 발생했지만 강 씨는 지난 1월 구속 직전까지도 전라남도 한 종합병원의 외과 과장으로 근무하며 환자를 진료해왔다.
고(故) 신해철 씨 유족 법률 대리인을 맡은 박호균 히포크라 변호사는 "현행 의료법상 대리 수술을 종용한 의료진의 업무 행위를 제재할 방법은 없다"라면서도 "사법 처분과 별개로 복지부가 임시 조치로 면허 정지 등을 가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박호균 변호사는 "형사 처벌은 기본적으로 무죄 추정의 원칙을 따르"지만 "최근 보도된 의료기기상 유령 수술처럼 ▲ 일반 국민의 생명과 안전에 끼칠 위해가 크고 ▲ 피의자가 혐의를 인정하는 등 사실 관계에 다툼이 없는 경우는 보건 당국이 공익을 위해 행정 처분을 내릴 수 있다"라고 했다.
박호균 변호사는 "만약 피의자가 복지부의 행정 처분이 과하다고 생각한다면 행정 처분에 대한 소송을 제기하면 된다"라며 "이에 대한 판결은 행정법원이 조속히 내려줄 것"이라고 했다. 박 변호사는 "복지부의 행정 처분 조치조차 없다면 의료 사고가 발생하더라도 피의자의 신변에는 아무런 차이가 발생하지 않는 셈"이라고 강조했다.
대리 수술, 의료 사고에 대한 국민의 불안이 커지는 가운데 복지부는 소극적인 자세로 일관하고 있다. 김순희 보건복지부 의료자원정책과 서기관은 부산 의료기기상 대리 수술 사건에 대해 "사법부의 판단 이후 행정 처분이 이뤄질 것"이라고 답했다.
김순희 서기관은 "본 부서는 법원 판결에 따라 행정 처분을 할 따름"이라며 "의사 면허 규제 강화 등 대책 방향은 보건의료정책실 차원에서 논의돼야 할 사안"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