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동자와 대화하고 환자와 소통하는 의사

[대한민국 베스트 닥터 ①] 각막 난치병 ‘의사의 의사’ 김응권 세브란스병원 교수

눈동자와 대화하고 환자와 소통하는 의사

면역계가 온몸을 공격하는 ‘루푸스’와 눈물샘, 침샘이 파괴돼 눈과 입이 건조해지는 ‘쇼그렌 증후군’ 때문에 양 눈이 곪아가던 주부 A씨(53). 절망의 벼랑에서도 눈물 흘릴 수 없는 눈에 백내장까지 왔다. 설상가상으로 대상포진 바이러스가 왼눈을 파고들어 세상은 오른쪽만 흐릿흐릿 보였다. 동네병원 의사는 실명이 운명이라고 했다. 지난해 말이었다.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찾은 의사가 연세대 세브란스병원 안과 김응권 교수(63). A씨는 매주 꼬박꼬박 치료를 받은 지 두 달 만에 남편 손을 잡고 말했다. “이제 앞이 보여요!” A씨 부부는 최근 김 교수가 세브란스안이비인후병원 원장에 임명됐다는 뉴스를 보고 외쳤다. “대한민국 만세!”

K대 경영학과의 B교수(64)도 지난해 봄 실명 직전까지 갔다. 각막 이상으로 시력이 떨어져 모교 병원에서 치료를 받았지만 계속 악화된 것. 가족이 수소문 끝에 김 교수에게 진료예약하고, 행여 하는 마음에 미국 존스홉킨스병원 안과에 문의를 했더니 “한국의 닥터 김이 세계 최고인데 왜 오려 하느냐”는 회신.

김 교수는 “상태가 위급하니 토, 일요일에도 와서 치료받으라”고 했다. B교수는 “이런 특혜를 주다니…”하고 주말에 병원에 갔다가 먹먹해졌다. 전국에서 온 서민 환자들로 붐비고 있었던 것. B교수는 석 달 만에 ‘맑은 세상’을 다시 보게 됐다.

김 교수는 전국의 안과 의사들이 ‘각막질환 해결사’로 부르는 의사다. 환자들은 대부분 낙담 끝에 설마하며 왔다가 희망을 찾는다. 인터넷에서는 그를 은인으로 여기는 환자들의 감사 글이 넘친다. 기도하며 치료하는 교수님 덕분에 교회에 가게 됐다, 교수님 은혜를 갚으려 사후 안구기증을 약속했다….

그는 선친인 김춘익 인천 김외과 원장의 영향을 받아 스스로 ‘외과의사’라고 여기고, 의사는 수술 실력을 유지하기 위해서 늘 긴장해야 한다고 믿는다. 제자들에게 “수술하는 의사는 왼손도 능숙하게 쓸 줄 알아야 한다”고 강조하며 늘 의식적으로 왼손으로 문을 여닫으며 모범을 보인다.

김 교수는 최근까지 ‘아벨리노 각막증’으로 불린 ‘제2형 과립형 각막이상증(GCD-2형)’ 분야의 세계적 석학이다. 이 병은 유전적 이유로 각막에 단백질 덩어리가 끼는 병으로 미세한 점들이 나타나서 결국 각막을 가득 채우고 환자의 시력을 앗아가는 무서운 눈병. 이탈리아 아벨리노 지역에서 미국으로 이민 온 사람에게서 처음 발견돼 아벨리노 각막증으로 불렸다. 김 교수의 잇단 연구는 이 병이 ‘과립형 각막이상증(GCD)’의 아류임을 밝히는 데 핵심 역할을 했고 지금은 이름이 GCD-2형으로 이름이 바뀌었다.

김 교수는 2002년 20대 여성 환자를 치료하다가 이 병 연구에 매달리게 됐다. 난생 보는 병이어서 고민하던 중 국제학술대회에서 만난 석학에게 ‘비방’을 얻었다. “닥터 킴, 아벨리노 각막증이라는 병인데 허연 점이 있는 부위를 깎아내면 치료됩니다.” 당시 안과 교과서의 구석에 실렸던 대로 레이저로 제거했더니 시력이 좋아졌다. 그러나 헉! 2주 뒤 재발해서 환자의 눈은 급격히 나빠졌다. 김 교수는 죄의식과 싸우면서 이 병을 파고들었고 교과서에 ‘함부로 건드리면 증세가 급격히 나빠진다’로 바꿔 쓰게 했다.

김 교수는 최승일 연구교수와 짝을 이뤄 이 병 환자가 라식, 라섹, 엑시머레이저(PRK)를 받으면 안 된다는 사실을 규명해 국제 학술지에 잇따라 발표했다. 국내에서 870명 가운데 1명, 5만7000명이 환자인 ‘흔한 병’이라는 것도 밝혀냈다. 그는 또 점이 안개처럼 흩어져 실명 직전인 환자에게 레이저로 각막을 30∼40㎛ 두께로 잘라 5년 이상 시력을 유지하는 치료법을 개발했다. 이 병 환자에게 백내장이 왔을 때 치료하는 공식을 만들어서 250여 명이 각막 이식 없이 지낼 수 있게 도왔다. 김 교수는 또 자신이 환자인지 모르고 라식 수술을 받은 사람에게 재발을 줄일 수 있는 방법도 개발했다. 그는 또 멜라토닌, 4-페닐뷰티릭 산 등의 물질이 이 병을 수술 없이 치유할 수 있는지 연구하면서 환자들에게 희망을 주고 있다.

김 교수는 2016년 안과 분야의 교과서 격인 학술지 《망막 및 안구 연구의 진보》에 GCD-2형의 원리와 치료법을 정리하는 초빙 논문을 게재함으로써 이 병의 세계 최고 연구가임을 공인받았다.

김 교수는 미국 조지아 주 애틀랜타에 ‘양아버지’가 있었다. 일제강점기 세브란스병원 안과에서 인술을 베풀었던 얼 W 앤더슨의 아들 폴 앤더슨이다. 그는 선친의 유지에 따라 변호사로서 평생 번 돈 55만 달러를 기부해서 한국인 의사를 교육하게 했다.

김 교수는 ‘앤더슨 재단’의 첫 한국인 장학생으로 뽑혀 에모리대 의대 안과연구소에서 세계적 대가 헨리 에델하우저 교수 문하에서 연구의 기본기를 다졌다. 김 교수는 2005년 톱콘안과학술상, 2008년 한길안과학술상을 받았을 때 상금 전액을 각각 앤더슨재단과 에모리대에 기부하면서 앤더슨 부자의 자선정신을 갚았다. 그는 최근 양아버지가 96세의 일기로 별세하자 장례식에 참석해 추모 서적 《앤더슨 부자, 에모리와 연세대》를 헌정하고 추모사를 하면서 “사랑과 기부의 정신을 잊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김 교수는 유학시절 에델하우저 교수로부터 들은 “의학자는 기초연구와 임상진료의 가교가 돼야 한다!”는 말을 좌우명으로 삼고 있다. 1992년 미국 연수 후 귀국해서는 연구에 지친 몸으로 밤늦게 각막이식 수술을 하기 위해서 집을 목동에서 연희동으로 옮기기까지 했다. 집값 손해 볼 것을 뻔히 알면서.

김 교수는 GCD-2형 환자 3000여명을 비롯해 백내장, 각막염, 고도근시 환자 등 1만5000여명의 환자를 보느라 주말에도 진료실을 지키면서도 지금까지 150여 편의 논문을 국제 학술지에 발표했다. 이 과정에서 쥐 500마리와 토끼 300마리가 희생양이 됐다. 쥐는 동물실험의 기본적 동물이고, 토끼는 눈이 크고 덜 깜빡이기 때문에 안과실험에 많이 쓰인다. 김 교수는 “늘 토끼들에게 미안하며 죽으면 토끼 지옥에 떨어질 것”이라면서 “난치병 환자의 치유를 앞당기기 위해 실험을 게을리 할 수 없었다”고 말한다.

김 교수의 유일한 취미는 주말에 짬을 내서 테니스를 치는 것. 중 2때부터 시작한 테니스는 지난해 전국 교수테니스대회 노년부에서 준우승할 정도의 실력. 그 외엔 일부러 운동할 시간을 못 내기 때문에 안과의사의 직업병인 허리 병을 예방하기 위해 시간만 나면 걷는다.

김 교수는 제자들에게 환자를 진료할 때 “각막, 눈과 대화하라”고 강조하고 스스로 이를 실천한다. 그는 꼭 환자의 눈을 보면서 얘기한다.

“교수님은 환자에게 정확한 상태를 알려줘 병을 극복할 자신감을 갖게 합니다. 교수님의 깊은 눈을 마주 하면 꼭 나을 것 같은 희망이 생깁니다.”(환자 C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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